백두산 등정기

(백두산 등정기 11) 광개토대왕릉비와 광개토대왕릉을 참배하다

거북이3 2007. 7. 27. 09:29
 

(백두산 등정기 11)

        광개토대왕릉비와 광개토대왕릉을 참배하다

                                                                                                  이   웅   재


 장수왕릉을 관람한 우리는 근처의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로 향했다.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불리는 이 비석은 자연석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것으로 44행에 대체로 각각 41자씩을 담아 총 1,775자의 예서체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노천에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힘든 상태이다.

 비문 중의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을 일본인 스에마스는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신라 등을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한다. 신채호는 1914년 현지에 가서 직접 비석을 확인하고, “조선상고사”에서 비문의 "결자(缺字)에 석회를 발라 첨작(添作)한 곳이 있으므로 학자가 그 진(眞)을 실(失)함을 한(恨)한다."고 언급했다. 그 후 1930년대 말 정인보는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廣開土境平安好太王陵碑文釋略)”이란 글에서 신묘년 기사에 대해 일본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그는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아 "고구려가 왜를 깨뜨리고 백제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전혀 상반되는 견해를 제시하여 일본 학자의 견해를 반박했었다.

 마모되기 이전, 일제가 조작하기 이전의 초기의 탁본 같은 것이 있다면 명쾌하게 판명이 되련만, 역사적 유물의 소중함을 여기에 와서 뼈저리게 깨달아 본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홀대받는 유물 유적들이 많이 있다. 선조들이 남겨 놓은 이러한 것들이 심하게 훼손되기 이전에 소중히 보관 유지해야 함은 우리 후손들의 책무일 것이다.

 이 비문은 현재 방탄유리로 보호되고 있다. 독일에서 50억을 들여 수입 설치한 것이란다.  유리 바깥쪽에서는 괜찮지만 내부에서는 사진 촬영을 금했다. 관리자 1인이 상주하고 있다는데, 내가 보니 좌측 측면 하단엔 20~30cm 정도의 금이 가 있었다. 좀더 철저한 관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뒤로 하고 이곳에서 약 300여m 떨어진 곳에 있는 광개토대왕릉으로 향했다.

 길 양옆으로는 역시 클로버로 덮여진 초지가 있었고, 군데군데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오얏나무 등이 늘어서 있어서 관광객들의 길을 인도해 주었다. 이 일대는 그렇게 클로버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는데,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인근에 거주하던 300호 가량의 민가가 소개(疏開)되었다고 한다. 따진다면 그 300여 호의 사람들이 이곳 유적들을 훼손시킨 장본인들이 아닐까 싶었다.

 광개토대왕릉은 높이가 18m로 장수왕릉보다 훨씬 높아 작은 산처럼 보인다. 한 면의 길이만도 66m라 하니 훨씬 거대한 왕릉이다. 그러나 현재 심하게 훼손되어 원래 모습은 알아볼 수가 없고 자갈무덤만 남아있다. 남아 있는 모습만으로 유추해 볼 때 본래 7층 이상의 방단적석묘로서 묘실은 맨 위층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실(玄室)은 그리 크지 않아 오히려 장군총보다 작았다.

 한마디로 전체적인 크기는 장수왕릉보다 네 배나 컸지만, 웅장함에서는 훨씬 뒤진다고 하겠다. 돌이 무너져 내려앉으면서 잔돌로 부서져버려서 그렇다지만 장수왕과 광개토대왕은 아들과 아버지 사이인데 연대 상으로 보아서 그처럼 퇴락의 정도가 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애초 무덤을 쌓은 돌의 크기부터가 달랐다. 광개토대왕릉의 돌은 장수왕릉의 돌보다 훨씬 잘았다. 어쩌면 그것은 돌을 다루는 솜씨의 차이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다. 그러니까 광개토대왕릉을 조성하면서 석재술이 발달하게 되어 그 다음 왕인 장수왕릉에서는 보다 커다란 돌들도 마음대로 운반하고 쌓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역사도, 기술도 그렇게 발전해 나가는 것이 아니던가?

 여기서도 석관 개석 위로는 각국의 지폐들이 서로 뒤섞인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욕심은 죽은 사람 앞에서도 달라질 줄을 모르는가 보다. 방금 죽은 상태라면 저승 가는 노자 돈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죽은 지 1,600여 년이 지난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이는 순전히 산 사람들의 기복(祈福)의 의미 이외에 다른 뜻이 있다고는 보기 어려운 일인 것이다. 나만 잘살겠다는 생각, 인간의 욕심은 언제나 한이 없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릉에서 나와 북쪽을 바라보니 강 건너 쪽 북한 땅에 있는 공장에서 회색빛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최근 가동을 시작한 동제련소란다. 이제는 110km 정도 되는 통화(通化)로 이동할 예정이다. 아마도 한 두어 시간쯤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통화시의 인구는 한 46만 명쯤 된단다. 비류수(沸流水; 渾江이라고도 한단다)가 동서로 나누고 있는 도시 통화는 백두산과 고구려 유적의 중간 지점, 옛날 고구려의 변방쯤 된다고 했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이 강의 계곡인 홀본(忽本) 서쪽에 성을 쌓았다는 설도 있다고 했는데, 이 통화엔 백두산에서 나는 약초를 이용한 제약공장이 많았다.

 지나다가 보니 손미식성(飧美食城)이라는 간판도 보였는데, ‘飧(저녁밥 손)’ 자는 아무래도

‘餐(먹을 찬)’ 자를 간체자로 적은 것인 듯했다. 거기엔 ‘생일 모임, 동창 모임. 한감잔치’ 등의 문구가 함께 있었는데, ‘환갑잔치’를 ‘한감잔치’라고 써 놓은 것을 보고 가슴 한 구석이 싸아하니 아파왔다. 지금 벌써 저렇게 한글을 잊어가고 있으니, 100년․ 200년 후에는 어떨까 싶은 생각에서였다. 남북의 분단도 너무 오래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이어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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