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74) 호랑이도 잡았던 김질(金礩), 고자질만 안 했더라면….hwp
경북 인물열전 (74)
호랑이도 잡았던 김질(金礩), 고자질만 안 했더라면…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4. 慶尙道 安東大都護府 人物 條]
이 웅 재
김질(金礩: 1422-1478)은 조선시대 전기의 무신이자 문신이다. 본관은 안동, 자(字)는 가안(可安), 호는 쌍곡(雙谷)으로, 할아버지는 개국공신인 익원공(翼元公) 김사형(金士衡)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김종숙(金宗淑)이다. 고려의 장군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며, 의정부 영의정을 지낸 정창손(鄭昌孫)의 사위이며, 강희맹(姜希孟)의 사돈으로 강희맹의 딸은 그의 아들 김성동(金誠童)과 결혼했다. 낙풍부원군(樂豐府院君) 김자점(金自點)의 5대 선조이며,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20대 방조(傍祖)에 해당된다. 한성부에서 출생, 거주, 사망하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처음 문음(門蔭)으로 관직에 진출했으며, 충의위(忠義衛: 공신의 자손들을 소속시켰던 양반 숙위군으로, 공신 자손들의 군역을 대체하고, 관료 진출상의 특권을 베풀어주기 위해 마련한 병종) 부사직(副司直: 未補職의 문관·무관·음관·잡직 중에서 임용하였으며, 실무는 보지 않고 녹봉만 받던 종5품 武官)에 있을 때인 1447년(세종 29년) 식년과의 생원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 생원이 된 후, 휴가를 얻어 성균관에서 수학했다. 성균관에 수학하려 할 때에는 전례가 없어서 들어갈 수 없었는데, 의정부의 특별 건의로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 참상관(參上官)의 성균관 수학제도가 비롯되었다고 한다. 1450년(문종 즉위년) 문과에 급제한 후, 1453년(단종 2년) 이조(吏曹) 낭관(郎官: 관리를 뽑을 때 천거되는 사람을 기록하는 일을 맡았는데, 낭관이 반대하면 천거되지 못했다.)을 거쳐 1454년 8월 수양대군의 추천으로 6품에서 4품으로 특별 승진하였다. 뒤에 단종이 그 일을 문제 삼자 수양대군은 이를 극력 변호하였으며, 이후 그는 수양대군의 심복이 되었다.
그는 집현전 수찬, 사간원 우정언,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 유생들에게 음악 지도를 맡은 벼슬) 등을 거쳐 1455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다가 여러 번 기회를 놓치고 운검(雲劒) 설치가 취소되면서 위험을 느끼게 되자, 1456년 6월 뜻을 바꾸어 이 사실을 장인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세조에게 고변하였다. 정창손은 김질과 같이 대궐로 달려가, “신은 실로 모르고 김질만 혼자 참여하였는데, 김질의 죄는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라고 하니, 세조가 특별히 김질을 사면하였다고 한다.
그 공로로 군기감 판사(軍器監判事)가 되고,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과 함께 특별히 말 한필을 선물로 받았으며 상락군(上洛君)에 봉작되었다가 뒤에 부원군으로 진봉되었고, 사육신 가문의 부녀자를 하사할 때 민보흥(閔甫興)의 아내 석비(石非), 이윤원(李潤源)의 아내 대비(大非)를 하사받기도 했다.
한편, 단종(端宗)의 정비인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는 남편 단종이 강등되면서 군부인(君夫人)으로 격하되었다가, 관비가 되었다. 한때 신숙주(申叔舟)가 그녀를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했다가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후 세조는 그녀를 노비이기는 하지만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냈다.
그 뒤 평안도관찰사, 공조판서, 병조판서, 우참찬, 경상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1468년(예종 즉위년) 우의정이 되었다가, 곧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한명회(韓明澮)·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예종과 성종 초기에 어린 왕을 보좌하여 정사를 다스리던 직책인 원상(院相)을 맡으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1468년 세조의 사망과 1469년 예종의 사망 당시에는 원상의 한사람으로 정무를 처결하였다. 그 뒤 자을산군(者乙山君) 혈(娎: 성종의 諱)을 지지하고, 성종 즉위 직후에는 왕족 구성군(龜城君; 李浚)을 숙청하였다. 세조의 공신으로 특히 세조의 병제개편에 깊이 관여하였다. 성종 초반, 관료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사노비들의 수를 점검하게 하여 이를 감시, 사병을 형성하는 것을 방지하게 했다. 1472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이 되었다.
1474년에는 우의정으로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그는 세조의 병제 개편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경국대전 편찬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글씨를 잘 썼고 고전에 능하였으며 지식이 해박하였다. 무예에도 뛰어나 세조가 주관한 활쏘기에서 여러 번 상을 받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 세조 10년(1464)의 ‘김질이 호랑이를 잡으니 잔치를 베풀고 선온(宣醞: 궁중에서 쓰는 술) 등을 내려 주다.’라는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이보다 앞서 김질(金礩)에게 명하여 녹양(綠楊: 의정부)에 가서 호랑이를 잡게 하였는데,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과 재추(宰樞) 등이 입시(入侍)하여 아뢰기를, ‘김질이 반드시 능히 호랑이를 잡지 못할 것입니다. 그와 같이 되거든 김질이 벌연(罰宴)을 베풀고, 잡거든 신(臣) 등이 잔치를 베풀어 김질을 먹이겠습니다.’ 하였는데, 김질이 호랑이를 잡았다. 이에 김질에게 태평관(太平館)에서 잔치를 베풀고, 채단 철릭(彩段帖裏) 1령(領)을 내려주고 임금이 김질에게 명하여 즉시 옷을 입게 하였다. 대장기(大將旗)를 세우고 북을 울려 군사들을 거느리고 태평관에 가게 하였다. 임금이 판내시 부사(判內侍府事) 전균(田畇)에게 명하여 선온을 가지고 가서 내려주게 하였다. 그 이기지 못한 종친(宗親)·재추(宰樞) 등은 각각 술병과 어육(魚肉)으로써 김질을 대접하였다.”
1477년(성종 8년)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성종이 자신을 더 도와달라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듬해 병으로 사망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엄현1리 내촌중학교 근교 야산에 있다.
(2014.4.24. 16매)
'경북인물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북 인물열전 (77 )26세의 젊은 나이에 효수(梟首)당한 천재 시인 박은(朴誾) (0) | 2015.02.27 |
---|---|
경북 인물열전 (75)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던 영남학파의 종조 김종직(金宗直) (0) | 2014.07.08 |
(73) 김시습과 동문수학을 했던 정정정(亭亭亭) 서거정(徐居正) (0) | 2014.04.06 |
경북인물열전 (72) ‘여덟 분(盆)의 국화 화분과 함께 대작(對酌)을 하였던 신용개(申用漑)’ (0) | 2014.03.29 |
#경북 인물열전 (71) 7개 국어에 능통하였으며, 훈민정음 창제에 가장 공이 컸던 신숙주(申叔舟) (0) | 2014.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