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인물열전

경북 인물열전 (98) ‘백운동서원’을 창시한 주세붕(周世鵬)

거북이3 2018. 4. 10. 09:07


경북 인물열전 (98) ‘백운동서원’을 창시한 주세붕 주세붕(周世鵬).hwp

“慶北新聞” 제126호(2018.4.27자). p.14.


      경북 인물열전 (98)

                      ‘백운동서원’을 창시한 주세붕(周世鵬)

                                              [大東野乘 第21卷 海東雜錄 3]

                                                                                                                                            이 웅 재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경유(景遊), 호는 신재(愼齋)·무릉도인(武陵道人)·손옹(巽翁)·남고(南皐)이며, 시호 문민(文敏)이다.

  본관은문민(文敏)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증사복시정 주상빈(周尙彬), 할아버지는 주장손(周長孫)이고, 아버지는 주문보(周文俌)이다. 어머니는 별호군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선대에는 모두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주세붕의 현달로 증직되었다.

주세붕은 경상남도 합천군(陜川郡) 천곡리(泉谷里)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의 가문은 상주에 거주하였으나, 고조부 대에 합천에 우거하다가, 아버지 대에 칠원(漆原)으로 옮겨와 살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일곱 살 때 어머니가 병으로 오랫동안 머리를 빗지 못해 이가 들끓자, 그는 자신의 머리에 기름을 바른 후 어머니와 같은 베개를 베어 이가 옮아오도록 했다고 한다. 부친상을 당했을 때에는 시묘를 하면서 사흘에 한 번은 집에 들러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나, 한 번도 부인 방에는 들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이조, 병조 참판을 지낸 방유령(方有寧)의 문인이다. 중종 17년(1522), 28세에 사마시와 문과 별시에 연달아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가 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유능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공부하게 한 일)한 후, 예문관, 홍문관 등을 거쳐 병조좌랑, 사간원 헌납 등에 임명되었다. 그는 홍문관에 있을 때 당시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임금에게 바르지 못한 말을 하자, ‘공은 직제학이 아니라 곡제학(曲提學)이로군요’ 하였다는 말은 유명한 일화다. 그 일로 김안로의 배척을 받아 좌천되는 등 벼슬길에서 몇 차례의 파란을 겪기는 하였지만, 도승지, 황해도 관찰사, 성균관 대사성 등 내외직을 골고루 거치며 대체적으로 순탄한 관직을 지낸 편이었다.

  그는 지방관으로 곳곳을 다스리기도 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워주었다. 특히 풍기 군수를 지낼 때에는 백성들을 흉년에서 구하고, 인삼 재배를 권장해 지금도 인삼으로 유명한 땅이 되게 하였다. 또한 풍기 고을이 고려조의 유명한 성리학자 안향(安珦, 초명은 安裕)의 고향임을 널리 알리면서, 1542년(중종 37) 그 사당을 세우고, 이듬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지었다.

  이 서원은 1548년 10월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에 의해서 1549년(명종 4) 1월에 경상도관찰사 심통원(沈通源:1499~1572)을 통하여 조정의 사액을 바라는 글을 올림과 함께 국가의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명종은 1550년 2월 서원의 이름을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旣廢之學紹而修之)”는 뜻으로, ‘소수(紹修)’라 정하고 이듬해 ‘소수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내렸다. 이로써 이 서원은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이에 따라 백운동서원은 점차 풍기 사림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후 이를 모방한 서원들이 각지에서 건립되었다.

  그는 『죽계지(竹溪志)』에서 서원 설립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학전(學田)을 설치함은 예로부터 있었다. 진실로 학자들로 하여금 집을 넉넉하게 한다면 비록 밥을 싸가지고 와서라도 배우면 좋겠지만은 만일 가난에 시달린다면 비록 학문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형세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진실로 서원(書院)의 밭을 갖고자 하는 까닭이다. 나는 보잘것없는 인격으로서 이 고을을 욕되게 맡아서 이미 문성공(文成公 :安珦)의 사당을 세우고 영정을 모셨다. 생각하건대, 사당이 있으니 서원이 없을 수 없다 하여 여기에 서원을 세웠고, 또 생각하건대, 서원이 있으니 전지(田地)가 없을 수 없다 하여 이에 전지를 설정하고, 곡식으로 보(寶: 어떤 사업을 위해 돈ㆍ곡식 등을 기금으로 하고 그것을 이용하던 재단)를 세워 우리 학도의 학업을 위한 공급재원으로써 약간의 결복(結卜) 밭을 만들어 해마다 벼 몇 섬과 쌀 몇 섬이 들어오고,…숙수사(宿水寺)의 황폐한 터에다 사당을 세우고 서원을 세운 것도 한갓 어리석고 놀라는 의혹을 일소할 뿐만 아니요, 성조(聖朝)가 유학을 중하게 여기는 데에 일거양득이 아니겠는가.…이 서원에 처해 있는 자는 또한 능히 살피고 충효의 성품을 다하여 내고 들이는 데 억지로 맞추는 사사로움이 없는 연후에 주자(朱子)의 가르침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그 역시 힘써야 한다.”

  그의 『죽계지(竹溪誌)』에는 이현보(李賢輔)에 대한 언급도 있어서 후학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는데, 그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농암(聾岩) 상공(相公) 이현보(李賢輔)의 자는 비중(棐仲)이다. 벼슬을 내놓고 예안(禮安)에 살면서 몇 번이고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별장은 군의 동쪽에 있었다. 집 앞에는 소나무가 있어 비스듬히 펼쳐진 일산 같았는데, 멀리 티끌세상 밖에 뛰쳐나와서 여름에 더위를 받지 않으므로 공이 오면 반드시 그 밑에서 바둑을 두고 노니, 얼굴은 붉고 머리는 희어서 바라보기에는 마치 신선과 같았으며 온 고을이 그 덕에 감화되었다.”

  그는 청백리에 뽑히었고, 저서로 『무릉잡고(武陵雜稿)』, 편서로『죽계지(竹溪誌)』,『동국명신언행록(東國名臣言行錄)』,『심도이훈(心圖彛訓)』등이 있으며, 「도동곡(道東曲)」, 「육현가(六賢歌)」,「엄연곡(儼然曲)」,「태평곡(太平曲)」 등 장가(長歌)와 「군자가(君子歌)」 등 단가(短歌) 8수가 전한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칠원의 덕연서원(德淵書院)과 백운동서원에 배향되었다.

                                                           (18.4.9.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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