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웅재 칼럼("스포츠 한국",1972~)

神話의 意味 (이웅재 칼럼⑭, 월간 『스포츠 한국』73년 5월호, pp.78~79.)

거북이3 2020. 7. 17. 16:39

神話의 意味(이웅재 칼럼⑭, 월간 『스포츠 한국』73년 5월호, pp.78~79.).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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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話의 意味
(이웅재 칼럼⑭, 월간 『스포츠 한국』73년 5월호, pp.78~79.)

桓因(한울님) 天帝의 庶子 桓雄 大王이 太白山 마루 神檀樹 밑에 내려와 神市를 열고 世上을 다스리는데,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大王에게 사람되기를 祈祷하므로, 大王이 그들에게 쑥(靈艾) 한 줌과 마늘(蒜)스무 개를 주면서 백일동안 그것을 먹으면서 햇빛을 보지 말고 기(忌)하라 했더니, 범(虎)은 기하지 못하고 곰(熊)은 기하여 女子가 되니 이가 곧 熊女요, 이 熊女가 神檀樹 밑에 와서 아기 낳기를 비는지라, 大王이 거짓 혼인하여 아기를 낳게 하니, 이가 곧 檀君 王儉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 最古의 檀君 神話의 槪略이다. 신화란 어떤 민족에게나 있는 것이고, 그것은 그대로 그 민족의 민족성의 반영물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왜냐하면, 신화란 한 민족의 역사가 싹트기 시작할 때, 그 민족 집단의 사고방식에 의하여 제작되어진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창작된 신화는 후대로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계속하여 그 민족의 민족성을 무의식중에 지배하여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전승되어 오는 신화를 뜻을 가지고 살펴 본다는 것은 그리 무익한 일은 아니리라 생각된다.
한국 민족을 「고마」족이라고도 부른다. 고마」란 말은 「곰」이란 말에서 부터 나온 말이다. 「곰」의 語形이 長形化된 것이다. 이 「곰」은 「졸졸‧줄줄」「얼골‧얼굴」에서 「ㅗ‧ㅜ」가 서로 넘나들어도 語感은 다르지만 語意에는 변함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굼」과도 통하는 말이다. 이 「굼」은 고어(古語)에서 「구ᇚ」이라 쓰이는 「穴」을 지칭하는 말이며, 이는 곧 女性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이렇게 해서 「곰」이 「熊女」가 되었다는 얘기는 그럴싸하게 되어간다. 桓雄 大王과 熊女의 결혼설은 「桓雄」에 「수컷 웅(雄)」자가 있어서 더욱 타당한 이야기로 전개될 수가 있다. 檀君 王儉의 「檀」은 「박달나무 단」자로서, 「박달나무」의 「박」은 「밝다」의 「밝」과도 같아, 「光」이나 「明」을 말함이요, 이는 곧 「陽」, 다시 말해서 「男性」을 뜻하는 말이고, 「檢」(검)은 「곰」과도 통하는 말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단군 왕검이 桓雄 大王과 熊女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얘기 또한 충분히 납득되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단군의 자손, 고마족의 역사가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바로 이 단군 신화 속에 숨어있는 意識 세계와 思想을 不知不識間에 면면히 이어받으면서 오천 년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 「서자」로서의 설움과, 「서자」로서의 自己卑下를 속속들이 感知하면서, 때로는 事大主義를 스스로 택하기도 하고, 때로는 외세의 침략으로 전 국토가 초토화되는 일을 당하면서도 그 수모와 굴욕을 참으면서 정말 잘도 참으면서 오늘을 맞아왔다. 곰처럼 묵묵히, 곰처럼 순하디순하게 곰처럼 인내성을 배우면서, 그 많은 나날들을 잘도 견디어 낸 것이다. 하늘의 아들의 자손으로서의 총명함을 가지고서는, 호랑이처럼 날카롭지 않고, 호랑이처럼 과격하지 않고, 호랑이처럼 과욕하지 않으며, 오직 사람이 되기 위해 그 컴컴한 굴 속에서 3.7일(21일) 동안이나 그 독한 쑥과 마늘만 먹고 살면서 햇빛을 금하였던 곰처럼, 믿음 한 가지를 가지고 과거를 살아온 것이다. 하늘이 미리 정하신 운명을 순순히 따르면서, 언젠가는 지극히 평화로운 삶을 누릴 날 있으리라 굳게 믿으면서, 그 믿음 하나를 커다란 재산으로 여기고, 겉으로는 복종하는 체, 겉으로는 힘이 없는 체하며, 「그날」, 그 행복의 날만을 속으로 은근히 기다리면서, 끈기 있게, 끈기 있게 참아온 것이다.
이 「은근과 끈기」는, 해서 우리 민족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되어버렸고, 이러한 특성은, 신화 이후의 수많은 전설‧설화‧민담‧동요 들 속에서, 주옥같은 시가‧가사‧소설 작품들 속에서, 수없이 보아 온 바이며, 얼마든지 찾아 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국기를 보라. 우주의 근본 정신이며 하늘의 큰 뜻 태극을 주로 하여, 그것을 음양(陰陽)으로, 다시 8괘로 나누어 놓은 모습이 아닌가. 이는 바로 운명을 중시하는 동양 철학, 곧 역학(易学)을 응용하여 만든 것이다.
또, 우리의 国花를 보라. 봄부터 가을까지 피어선 지고, 지고는 또다시 피어나고 하는 끈기를 가지고 있지 아니한가, 그 빛깔을 보더라도,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추루하지도 않은, 문자 그대로의 은근한맛, 구수한 서민적인 멋을 지니지 않았는가.
집단적 사고 방식에 의하여 생겨진 신화, 그러니까 그 집단적 사고 방식이란 그 신화가 생겨날 당시의 사회가 요구하고 있는 사고 방식이었을 것이다.
곧 과거의 우리 통치자들은 민중이 선량하고 순수한 백성이기를 원했던 것이다, 君主를 神主처럼 모시고 떠받들기만을 원했던 것이다. 모나고 반항적인 기질을 바라지 않아서, 호랑이가 사람됨을 이르지 않았고, 순하고 忍従만을 美德으로 삼으라고 해서 곰으로 하여금 熊女됨을 말했던 것이리라. 곰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는 곰의 자손이다.」하는 일종의 自己暗示의 효과를 지니게 된 것이다. 실제로 어떤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내가 그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믿고, 또 믿고 하다보면, 정말로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되는 수가 있는 것이며, 이 런 것이 바로 자기암시인 것이다. 이러한 고마족의 자기암시는 당시의 통치자들이 바라고 있는 바이었지만, 실은 그덕분으로 우리는 오늘을 살고 있고, 내일을 바라볼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우리의 이 오천 년의 역사는 곰과같이 무디고, 어쩌면 곰과같이 어리석은 듯한 그 참을성 때문에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이다.
약삭빠른 西歐 文明은, 强力한 힘을 과시하고 있는 양극의 이데올로기는, 이제 世界를, 人類를 여차직하면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고갈지도 모르는 막다른 골목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이제 物質文明은 새로운 탈출구를 찾지 않으면 안 될 위기를 느끼게 되었고, 그래서 서구인들은 차츰 東洋의 歷史観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듯한 연약함을 가지고서도, 끈질기게 지켜온 그 오랜 역사 그 배후에는 반드시 변함없는 진리, 불멸의 믿음, 영원한 신화가 내재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낸 것이다.
―주민과 풍토에서 떨어진 신화는 다만 철학일 뿐, 신화는 아니다. 신화는 인간과 풍토가 시간과 공간이 빚어낸 영혼의 性感帶지.―(崔仁勳 「恢色人」)
우리 민족은 바로 우리의 풍토 속에서 그 영혼의 성감대인 신화를 지켜온 것이고, 이러한 신화는 우리의 생활 속에 파고 들어왔으니, 과학 문명이 그 존재를 희미하게 만든 우리의 巫俗을 포함한 民俗 文化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巫俗, 民俗 文化를 迷信이라고 타기할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야 한다. 迷信으로서가 아닌, 뜻, 뜻으로서의 그것을 이해하고, 그래서 그뜻을 널리 펴야 하는 것이다.
「밥을 먹고 그 자리에 누우면 황소가 된다.」「밤중에 방을 쓸면 재수가 없다.」「초저녁에 등불을 켜면 눈이 큰 며느리가 들어온다.」
이러한 옛 노인들의 미신적 요소가 다분한 禁忌의 말들을 들어보아도, 매우 재미 있는 점들이 많음을 느낄 수가 있다. 밥을 먹고 그 자리에 눕는다는 것은, 식사를 하자마자 아무런 운동도 없이 잠자리에 든다함을 이른 것이니, 그렇게 하면 소화가 잘 될 된 것이므로 일만 고되게 하다가 죽어가는 황소가 된다고하여, 밥을 먹은 다음에는 약간의 운동을 하여야 된다는 것을 神話에 의해 표현한 것이며, 밤중에 방을 쓸면 때로는 귀중한 물건이라도 어두워서 그냥 쓰레기로 처리되어 버리는 경우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니, 그러지 말라는 얘기이고, 초저녁부터 등불을 켜서 기름을 낭비하는 생활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눈이 큰 며느리가 들어온다고 겁을 주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民俗 文化를 찾아내어 그 뜻을 풀이해 볼시대가 온 것이다. 흥부처럼 착한 사람의, 형수에게서 밥주걱으로 따귀를 얻어 맞고서도, 집에 와서 아내에게 말할때에는 그 형님과형수를 욕하지 않은 그 마음씨는, 이제마땅히 보상받아야 될 때가 온 것이다. 스님의 말을 믿고 인당수로 팔려간 심 청은, 용왕의 환대를 받고 다시 인세로 나와 일국의 왕후가 되었을뿐 아니라, 그미의 소원이던 부친의 눈을 뜨게 만들지 않았는가. 이런 것들은 이제 소설 속의 얘기로 남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洪 吉童은 서자였다. 그는 一世를 뒤흔들 능력을 배웠으면서도 나랏님과 벼슬아치들을 각성하게 한 후에는 새로운 理想国을 건설하기 위해 해외로 떠났던 것이다. 그에게는 政権이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침략적 戦爭을 부인한다는 우리 大韓民國은 지구상에서 영원히 그 존재를 과시해 나갈 것이다. 西歐人들이 스스로 서구의 몰락을 예언하고 차츰 東洋 각국에게도 그 관심의 시선을 돌리는 것은, 당연하고도 당연한 일이다. 이제 현대 사회에서는 서자라도 능력에 따라 대우를 받게 되어 있다. 사회 불신을 조장하는 얄팍한 꾀와 무지막지한 폭력과 금력과 권력은 오래가지 못한다. 묵묵히 제 할 일만 하고 있는 노력가만이 현대 사회에서는 용납되어진다. 민주시민은 겸손하다. 민주시민은 과욕하지 않고 自足의 妙를 즐길 줄 안다. 환웅 대왕과 웅녀의 자손은 경솔한 행동을 커다란 수치로 생각한다. 끈기 있게 참아 가면서 밝은 내일을 굳게 믿을 줄을 안다. 모나지 않은 순하디 순한, 착하디 착한 마음씨는 영광의 발전을 가져 오고야 할 것이다.「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은 바보요,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은 현명한 자다.」 화를 내는 일은 「禍」를 불러들이는 것이지만, 화를 내지 않는 일은 「華」(榮華)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내 이가 있느냐?」「없습니다.」
「내 혀가 있느냐?」「있읍니다.」
孔子가 가르친 意表的 가르침. 모난것은 쉬이 닳아 없어지지만, 부드러운 性品은 오래오래 살아 남는다는 이러한 隱喩的 가르침은 그대로 우리의 민족성속에 물배어 있는 특성이 아니겠는가.
Orient의 빛이여, 東方의 등불이여! 이제 너의 빛으로 새로운 人類 歷史를 비춰주는 새 世紀를 創造하여라.

※2020.7.16.입력. 원고지 24매.
*桓雄 大王, 檀君 王儉, 檀君 神話를 띄어 쓴 것은 당시의 관습적인 표기 방법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살펴 본다’를 띄어 쓴 것도 같은 성격으로 생각된다.‘마늘(蒜)스무’와 ‘백일동안’을 붙여 쓴 것은 편집자의 잘못임이 틀림없고, ‘고마」’에서 앞쪽의 작은 인용부호 ‘「’이 빠진 것이나, ‘말에서 부터’를 띄어 쓴 것은 분명 편집자에게로 책임을 돌려야 할 것이요, ‘語意’란 ‘語義’로 써야 할 것인 바, 필자의 誤記임에 틀림없다.
‘납득되어지는’의 2중 피동은 젊었을 적 필자의 잘못된 버릇이었던 듯싶다.
‘곰처럼 순하디순하게’뒤에는 반점(,)이 찍혀야 할 것인 바, 편집자의 실수로 빠진 듯하다. ‘하늘의 아들의 자손으로서의’에서 ‘의’가 중복되어 매끄럽지 못한 표현이 되었는데, 이는 분명 필자의 잘못이다.
‘굴 속’을 한 단어로 취급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로 알고 있다. ‘3.7일’에 가운뎃점을 사용하지 못한 것은 편집자의 편의성 때문이겠으나, 요즈음에는 허용되는 표기이기도 하다.
‘근본 정신’을 띄어 쓴 것은 당시의 표기를 따랐던 때문으로 보인다.
‘은근한맛’을 붙여 쓴 것은 아무래도 편집자의 실수로 보이고, ‘사고 방식’을 띄어 쓴 것은 당시의 관습적인 표기로 생각된다.‘것이다,’뒤에는 온점(.)을 찍어야 할 것인데, 반점(,)이 되었다. 이것은 말하나마나 편집자의 실수다.
‘이 런’이 띄어 써져 있음은 말하나마나 편집자의 잘못이리라.
‘그덕분’이나 ‘곰과같이’가 붙여진 것도 같다.
‘몰고갈지도’를 붙여 쓴 것은 글쎄, 누구의 잘못인지 잘 모르겠다.
‘오랜 역사’뒤와 ‘인간과 풍토가’뒤에는 반점(,)이 찍혀야 할 것인데, 아마도 편집자가 무심코 넘어간 듯하다.
‘그뜻을’을 띄어 쓰지 아니한 것도 편집자에게로 책임을 돌린다.
‘재미 있는’을 띄어 쓴 것은 당시의 표기를 따랐던 것이 아닐까 싶다.
‘된다고하여’나‘볼시대가’를 붙여 쓴 것은 편집자가 잘못한 때문으로 보이고,‘얻어 맞고서도’를 띄어 쓴 것은 반대로 필자가 잘못 쓴 때문으로 보인다.‘말할때에는’과 ‘형님과형수를’, ‘이제마땅히’가 붙여진 것은 다시 편집자에게로 책임을 돌려야 할 것이다. ‘심 청’과 ‘洪 吉童’을 띄어 쓴 것은 당시의 표기를 따른 때문이요, ‘되었을뿐’과 ‘안되는’을 붙인 것은 편집자의 잘못이다.
‘나랏님’은 ‘나라님’이라야 할 것을 습관상 어감이 왠지 다가오지 않아 필자가 그렇게 쓴 것이요,
‘용납되어진다’의 2중 피동은 역시 필자의 잘못된 버릇이다.
‘순하디 순한’과 ‘착하디 착한’은 붙여 써 주는 것이 옳을 것인 바, 필자의 잘못으로 띄어 쓴 것이다.
「있읍니다.」를 「있습니다.」로 쓰지 않은 것은 글을 쓸 당시의 표기법을 따른 까닭이다.
‘모난것’을 붙여 쓴 것은 편집자의 실수요,‘살아 남는다’를 띄어 쓴 것은 필자의 오기로 보이고, ‘민족성속에’와 ‘물배어’를 붙여 쓴 것은 편집자에게로 책임이 전가되는 표기이다.

※ 밑줄 친 부분에 대한 설명도 함께 볼 수 있도록 2단으로 배열한 것은 첨부 파일을 이용하면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