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낮과 밤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 낮은 밝음[光明]이 지배하고, 그 밤은 어둠[暗黑]이 지배한다. 사람들은 그 밝을 때 무엇인가 일을 하고, 어두울 때는 휴식을 취한다. 밝음은 빛이 있기 때문이다. 빛은 사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 준다. 빛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어둠이다. 어둠은 만물의 형체를 숨긴다. 어둠 속에서도 들어서 알 수 있고, 만져서 느낄 수 있고, 생각해서 파악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위험한 인식이 되기 쉽다. 바로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격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옛 할아버지들도「백문이 불여일견」라고 하지 않았는가?
장님과 귀머거리 중에 누가 더 불편할까를 생각해 보아도 그건 쉽게 판단되는 일이다. 듣지는 못해도 볼 수만 있다면, 상대방의 손짓, 발짓, 표정 등으로 대체적인 의사 소통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좀더 쉬운 예를 들어본다면 귀머거리는 혼자서도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수가 있다. 그러나 장님은 독립해서 움직이기가 힘든다. 최소한도 지팡이라도 있어야 문밖 출입이 可能해지는 것이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우선 보아야 그 대상에 대한 어떤 욕구가 생긴다. 들어서도, 만져서도 생길 수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세상 만사는 보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배가 고플 때, 진수 성찬이 눈 앞에 있어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진수 성찬이 냄새야 풍겨주겠지만, 소리를 내 주지는 않는 것이다. 또 냄새를 맡고 알았다고 치더라도, 그 방향, 거리 등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보는 쪽이 훨씬 빨리, 더욱 정확하게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보아라.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보아라. 본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는 세상을 올바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한 곳에만 머물러 있어, 보는 것이 많지 못할 때,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을 쓴다. 세상을 모른다는 것이다. 여러 곳을 두루 다니며 많은 것을 본 사람에게는 우리는 어느 의미로든 약간의 선망의 느낌을 갖는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니, 우선 보아야 가지고 싶은 생각도 나고, 좀더 좋은 것으로변화시켜보고 싶은 생각도 나는 것이다.
불(火)이 우리 인류의 문명 내지 문화를 발전시켰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것은 두 가지 효용성을 주었던 것이니, 그 하나는 열(熱)이요, 다른 하나는 빛(光)이었다. 그 열에 의해서도 문화 발전은 이룩되었지만, 그 빛에 의해서도 문화 발전이 성취되었다는 말이다.
원시 시대 사람들에겐 빛이 적었다. 자연적인 빛 이외에는 물건들을 비춰볼 만한 빛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차츰 차츰 인공적인 빛을 많이보유하게 됨에 따라 인류는 눈부신 발전을 해 왔다. 요사이는 밤새도록 전깃불을 켤 수 있게 되어, 밤에도 인류 복지를 위한 연구가 가능하게 되었다. 밝다는 것은 그만큼 유용한 것이다.
그러나 빛만 있으면 무엇하나? 눈이 있어야 보는 것이다. 눈도 눈나름, 잘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잘 볼 수 없는 눈이 있다. 세상은 편리해져서(물론 그것도 빛의 덕분이겠지만) 나쁜 눈을 가진 사람들은, 안경이라는 것을 사용함으로서 보다 더 잘 볼 수 있도록 되었다. 어리어리하면서 잘 못 보는 것보다, 자기 시력에 맞는 안경을 써서 좀더 확실하게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우리 나라의 개화기에 안경을 개화경(開化鏡)이라고 불렀었던 것도 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말이라 생각된다. 해서, 당시에는 너도 나도 그 개화경을 쓰는 것이 유행이 되었었다. 「좀 더 잘 본다.」,「좀더 많은 것을 본다.」, 따라서 「좀더 유식하다.」,「좀더 인생을 안다.」,「좀더 멋지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자기 눈에 맞지 않는 안경을 쓸 수는 없었다. 돗수도 없는 희멀건 안경을 쓴다는 것이, 어쩐지 제 속셈을 드러내는 것 같아 쑥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빛깔이 있는 안경, 즉 색안경이다. 요새는 썬‧그라스라고 하던가? 너무 강렬한 햇볕에 눈을 보호하고 바람 부는 날엔 먼지가 눈에 들어가질 않아서 좋단다. 그것은 또 자기의 눈의 움직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아도 되는, 편리한 점이 있어, 수사관들이 즐겨 썼다. 언젠가 자수한 남파 간첩의 강연회에서 남파 당시 버스를 탔더니, 색안경을 쓴 사람이 많아서 간이 뜨끔뜨끔했었다는 얘기를 듣고 웃은 적이 있었다. 이북에서 배우기를, 남한의 수사관들은 거의가 다 색안경을 썼으니, 색안경 쓴 사람을 주의하라고 배웠다는 것이다.
수사관들이 색안경을 많이 쓰다 보니까, 색안경은 어느 정도의 권세 의식 내지 권위 의식이 붙어버리게 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러지 않아도 눈에 좋다고 하여, 좋다는 게 좋아서 색안경을 찾던 판에, 권위 의식까지 곁들이게 되니, 일석이조(一石二鳥)라, 다투어 색안경을 쓰게 되었다. 심지어는 속이 시커먼 도씨(盜氏)들도 말이다. 하긴 그들에게야말로 꼭 필요한 물건인지도 모른다. 자신은 숨기고, 남의 것만 재빨리 보아서 공짜로 슬쩍하기엔 그 얼마나 편리한 물건이냐 말이다.
요사이엔 눈이 나빠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단다. 국민 학교에서부터 입시지옥에서 허덕여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젠 중학교 무시험 진학이 실시되었지만 그러니까, 눈이 나쁘다는 건 유식하다는 거와 비슷한 말이라는 개념이 생겨버린 것이다.)
어쩌다 누구와 약속이라도 있어서 다방에 앉아서, 늦게 오는 그 「누구」를 기다리느라 출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문을 쓱 밀치고 들어서는 「안경」-기대가 어그러진 데서부터 「화딱지」란 놈이 생산되는데, 이건 어쩌자구 또 자꾸만 다방 안을 두리번두리번거리며 서성이는가 말이다.
그것도 아주 으젓한 「체」하면서 말이다.
시력이 나빠서 쓰는 건 좋다. 우리「체」병은 고치자. 우리의 민족은 여태까지 그 「체」병 때문에 후진국이란 이름을 듣고 있지 않은가?
모르면서도 아는 체, 알면서도 모르는 체, 없으면서도 있는 체, 있으면서도 없는 체……그 허구많은 「체」들. 양반은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도 걸식은 하지 않는다던가?
그러나 양반도 먹어야 산다. 「수염이 대자라도 먹어야 산다.」느니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도 있쟎은가? 오죽하면 「양반」이란 지위를 팔아 먹은 사람이 있었을까? 물론 소설 속의 주인공이지만 말이다. 연암 박 지원의 「양반전」을 보면, 「체」병에 망한 얘기가 나오는데 무언가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배고파 지낼 수 없게 된 양반이 하는 수 없이 그 「체」병을 팔아 먹는다.
돈 많은 부자놈은 그 「체」병을 사서 이제는 자기도 양반이라고 좋아한다. 그때 군수가 작성하는 양반증서를 잠깐만 훑어 보자.
「오늘부턴 앞서 하던 야비한 일들일랑 깨끗이 버리고 옛 사람 아름다운 일을 본받아 뜻을 고상하게 먹어야 할 것이다. 뿐 아니라, 언제나 밤이 오경만 되면 일어나서 성냥을 그어 등불을 켜고, 정신을 가다듬어 눈으로 코 끝을 슬며시 내려다보며, 두 발굽을 한데다가 모아 볼기를 괴고 앉아서 동래박의(東萊博義-宋 呂祖謙의 著)처럼 어려운 글을 서슴치 않고 외되, 마치 얼음 위에 박 밀 듯 하고, 아무리 배고프고 살 시리더라도 이것을 잘 참되, 자기 입에선 아예 “가난타”는 말일랑 내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아래 윗니를 마주 부딪치어 똑똑 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뒷통수를 퉁겨 코똥을 키잉하고 뀐다. 가는 기침이 날 때마다 가래침을 지근지근 씹어 넘기고, 털감투를 쓸 때면 소맷자락으로 그를 털어서 티끌 물결을 북신 일으키고, 세수할 떼엔 주먹의 때를 비비지 말 것이며……(중략)……밥먹을 때엔 맨 상투꼴로 앉지 말 것이며, 먹기가 시작되자 국물을 맨 먼저 마시어 버리지 말 것이며, 혹시 마시더라도 훌쩍훌쩍하는 흘림 소리를 내지 말 것이며, 생파를 씹어서 암내를 풍기지 말 것이며, 막걸리를 마신 뒤엔 수염을 쭈욱 빨지 말것이며, 담배를 탤 적엔 볼이 오목 파이도록 연기를 빨아들이지 말 것이요, 뿐만 아니라……(하략)」(李家源 「李朝 漢文 八說選」에서)
인용문이 너무 길어졌지만, 「체」병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안경이나 쓰고 어리어리한체한대서 으젓해지는 건 아니다. 필요도 없는 안경을 쓰고(필요해서 쓰는 사람에게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공연스레 벗었다 썼다 하면서(이쯤되면 벌써 안 써도 되는 안경이다), 자꾸만 안경알만 닦는 것은 이해가 안 간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틈 나는 대로 자기의 마음이나 닦는 편이 훨씬 유익한 일일 것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이다. 권위라든가 권력이라는 건 남이 인정해 주거나 남이 만들어 준 것이라야지 제가 인정을 받으려 한다거나 제가 스스로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제멋대로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제멋대로 보거나 생각하지 말고 좀더 겸허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서 한 방울의 땀과 눈물이라도 정성껏 흘릴 줄 아는 인간이 되어야 하겠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 했다. 눈에 안경을 쓰듯 마음에 안경을 쓰지는 말자. 눈에는 돗수에 맞는 안경을 써서 보다 사물을 정확하게 볼 수도 있지만, 마음에는 어떤 색의 안경도 필요하지가 않다. 우리 모두가 있는 그대로, 가장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나갈 때, 세상은 가장 아름다와질 것이다.
※2020.11.25.입력. 원고지 24매.
※그 동안 잘못된 표현, 표기, 띄어쓰기 등을 일일이 밑줄을 그어 원문과 대조하면서 바로잡아 보았지만, 너무 번거로워서 필자도 그렇겠거니와 보는 이도 피곤하겠기에, 얼핏 잘못된 표기라 생각되는 곳에는 밑줄만 그어 놓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