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⑭ “심청전”의 모델 가난뱅이 여인 효녀 지은
경북 인물열전⑭
“심청전”의 모델 가난뱅이 여인 효녀 지은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1. 慶州府 孝子條]
이 웅 재
효종랑(孝宗郞)은 제3재상 서발한(舒發翰) 인경(仁慶)의 아들로 어려서의 이름은 화달(化達)이었다. 낭이 남산 포석정에서 한바탕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를 베풀고자 했다. 소문을 들은 문객들이 모두 황급히 달려왔다. 예나 지금이나 남이 내는 술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술꾼 두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자리에 빠질 사람이 아닌데…’ 생각하며 기다렸더니 뒤늦게 헐레벌떡 달려온다.
두 사람은 효종랑이 묻기도 전에 그 까닭을 말한다. 그 이야기가 나중에 ‘심청전’의 근원설화가 되었다. 물론 ‘심청전’이 이 설화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거타지 이야기라든가 개안(開眼) 설화, 인신공희(人身供犧) 설화 등이 두루두루 ‘심청전’의 탄생을 위해 여러 모로 기여했다. 하지만, 가장 주된 설화는 바로 이 효녀 지은 설화로 보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그러면 이제 지각한 두 술꾼들의 늦은 사유를 들어보자.
분황사(芬皇寺) 동쪽 마을에 한 여인이 살고 있었다. 이름은 지은(知恩), 한기부(韓岐部) 사람 연권(連權)의 딸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눈이 먼 어머니를 봉양하고 사느라고 이모지년(二毛之年; 32세)이 되도록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삼국사기 열전의 경우. 유사에서는 20세라고 함.) 시집도 가지 못했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아침저녁으로 어머니께 문안을 드리며 곁을 떠나지 않았으나, 집이 워낙 가난하여 품팔이를 하기도 하면서 봉양했다. 그러한 날이 오래 계속되어 고달픔을 이기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설상가상으로 흉년마저 들었다. 걸식해 먹고 살기도 어려운 처지, 할 수 없어 쌀 10여 섬(유사에서는 30섬)을 받기로 하고 부잣집의 종이 되었다. 온 종일 주인집에 가서 일을 하고 늦게서야 부랴부랴 돌아와서 밥을 지어 봉양하고는 새벽이면 다시 부잣집으로 일하러 가곤 하였다.
이렇게 3∼4일이 지나자 어머니가 딸을 불러 조용히 말했다.
“강비(糠粃; 겨와 쭉정이, 곧 거친 식사)를 먹던 지난날의 식사는 비록 거칠긴 하였으나 밥맛이 달고 마음이 편하더니, 요즘에는 쌀밥을 먹는데도 불구하고 밥맛이 좋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창자를 찌르는 듯하니, 어쩐 일이냐?”
지은이 할 수 없이 이실직고하였더니, 어머니가 말했다.
“나 때문에 너를 남의 종으로 만들었구나! 차라리 내가 일찍 죽는 것이 낫겠다.”
하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이에 딸도 함께 울어 그 슬픔이 길가는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지나가다가 이를 본 효종랑의 두 문객이 물었다.
“어째서 그토록 슬피 우는 것이오?”
지은은 일의 전말을 소상히 말하면서 더욱 서럽게 우는 것이었다.
“저는 이제껏 다만 어머니의 구복(口腹)의 봉양만을 하고 있었을 뿐, 색난(色難; 자식이 부모의 얼굴빛을 보고 그 뜻에 맞게 봉양하기는 어려움을 이르는 말)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연유로 이렇게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구경하느라고 늦었다는 말을 들은 효종랑은 부모에게 청하여 집의 곡식 100섬과 옷가지를 실어다 주었다. 또 종으로 산 주인에게 보상하고 양인으로 만들어 주니 그의 낭도 수천 명도 각각 곡식 한 섬씩을 내어 도와주었다. 진성여왕이 이 소식을 듣고 조(租) 500섬과 집 한 채를 내리고 정역(征役)의 구실도 면제시켜 주고 담당 관청에 명하여 군사를 보내어 교대로 집을 지키게 하고 그 마을을 표하여 ‘효양방(孝養坊)’이라 하였다. 후에 그 집을 희사해서 절을 삼고 양존사(兩尊寺)라 했다고 한다.
한편 왕은 효종랑을 두고 말하였다.
“그는 비록 어린 나이이지만 노성(老成)한 어른처럼 보인다.”
하고 곧 자기의 오빠인 헌강왕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니, 효로써 가난을 벗어나 눈 먼 어머니를 잘 봉양할 수 있게 된 것은 효녀 지은뿐만 아니라, 그것을 아름답게 여겼던 효종랑도 함께 복을 받게 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요즘 전남 곡성군에서는 매년 심청 축제를 열고 있다. 이 고을 관음사에서 전해오는 설화가 심청전과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곡성군은 최근 관음사 입구에 심청공원도 조성했다.
옹진군도 심청전의 인당수가 바로 옹진군 내에 있다며 관련 사업을 벌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경주부에는 효불효교(孝不孝橋)의 전설도 있어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신라 때에 아들 7형제를 둔 과부가 있었는데, 그가 사통(私通)하는 남자가 물의 남쪽에 있었으므로 그의 아들들이 잠들기를 엿보아서 가곤 하였다. 아들들이 서로 말했다.
“어머니가 밤에 물을 건너다니니 자식된 자의 마음이 편안할 수 있는가?”
드디어 그들은 어머니를 위해 돌다리를 놓아드렸다. 사연을 알게 된 어머니가 부끄럽게 여겨 행실을 고쳤다고 하며 그때의 사람들이 그 다리를 효불효교라 불렀다 한다. 효를 행한다면서 불효를 저지른 일은 아닐까 싶어 마음이 착잡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07.6.24. 원고지 15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