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등정기

(백두산 등정기 7) 밤중에 일어나본 적이 있나요?

거북이3 2007. 7. 23. 17:15
 

(백두산 등정기 7)

    밤중에 일어나본 적이 있나요?

                                                                                                    이   웅   재


 안평하교(安平河?)를 지나는데 다리를 수리중이라서 다리 아래쪽으로 하천을 가로질러 일방통행으로 건너가야 했다. 우리나라 60년대식 도로보수 현장이었다. 덜커덩거리는 버스 안에서 가이드는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 애쓰고 있었다.

 “통일은 아마도 한 30년은 더 지나야 할 겁니다. 최소한 김정일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죽고 난 다음이라야지요.”

 글쎄? 한 세대가 지난다고 통일이 될 수 있을까? 전에는 김일성이 죽은 후라야 통일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하여튼 6?25를 직접 겪은 세대는 지난 다음에나 가능할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부모형제를 죽인 철천지원수인데, 그 사람들이 살아 있으면서 통일이 이루어질 수야 없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한 30년, 옳을 것도 같다.

 “요새 북한의 젊은이들 중에는 개방파가 상당히 많아요.”

 하지만 중국과 같은 개방이 이루어지려면 한 5년 정도는 더 지나야 할 것이란다. 그러나 겉으로는 개방을 주장하지 못한다고 했다. 술에 취해서야 더러 얘기를 하고 있지만…. 요새는 김정일의 건강도 좋지 않은 편이니까 의외로 개방이나 통일이 빨리 찾아올 가능성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란다. 희망사항이란 항상 쉽게 말하여지는 법이다.

 시골 지방도(地方道) 변의 집 외벽에는 하나같이 ‘壽’ 자나 ‘福’ 자가 붙어 있었다. 춘절 전에 써 붙인다는 것인데, 말하자면 입춘방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면 되겠다. 아니, 그런데 입춘방처럼 집집마다 개별적으로 써 붙인 것은 아닌 모양이다. 글씨 크기나 모양이 한결같이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입춘방과 같은 것까지도 이제는 사서 붙이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만큼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 보편화되어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때로는 그 ‘福’ 자를 거꾸로 붙여놓은 집도 있었다. 돈이 마구 쏟아져 들어오라는 뜻이란다.

 소수민족 중에서는 조선족의 문화수준이 가장 높았다고 할 수가 있었는데, 이제는 외국에 나가서 벌어와서 돈도 많고 하다 보니까 2세들이 문제라고 했다. 공부는 뒷전이고 PC게임이나 노는 데에만 집착한다는 것이다.

 밤중에 일어나본 적이 있다는 젊은 남자 100명에게 설문조사를 했단다.

 “왜 일어났었죠?”

 15명은 소변을 보려고 일어났고, 10명은 목이 말라 물 마시러 일어났고, 그리고 75명의 대답이 엉뚱했다.

 “집에 가려고요.”

 한 마디로 아가씨문화가 발달했다는 것이다. 90년대까지만 해도 남녀가 함께 호텔이나 여관에 투숙하려고 하면 부부증이 있어야 했단다. 그렇지 못하면 증명서에 ‘好色漢(호색한)’이라는 도장을 꽝 찍어줬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집에 가려고’ 하는 대답이 75%나 된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남다여소(男多女少)인데 요즈음 조선족 여자들의 실태를 보면 참으로 근심스럽단다. 1/6은 한국으로 가고, 1/6은 한족(漢族)에게 시집가고, 또 1/6은 술집으로 간다는 것이다. 결국은 1/2이 빠져나가는 셈인데 그나마 같은 조선족과 결혼하면 대개는 5년 미만에 갈라선다고 했다. 남편이 무능력하게 보일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에서의 유혹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족 남자와 한족 여자가 결혼하는 수도 있지만, 그 역시 마찬가지. 이 경우에는 남자 쪽에서 이혼을 원하는 실정이다. 게으르고 더럽다고 해서. 그런데 조선족 여자와 한족 남자가 결혼하면 잘 산단다. 한녀와는 정반대로 깨끗하고 부지런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이제는 조선족 남자들이 결혼할 상대가 없어서 걱정이란다.

 한 동안 비포장도로를 달리다 보니 때로는 소 떼가 도로를 가로막기도 하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런 모습은 고속도로가 아닌 곳에서는 물론 포장도로에서도 흔한 일이었다. 어디 소 떼뿐인가? 오리나 염소 떼들도 곧잘 마주치곤 했다. 그런 모습은 압록강 건너편 북한 쪽 산이 조각조각 이어붙인 이불보를 보듯이 거의 다랭이논이나 밭으로 개간된 모습과도 마찬가지로 언뜻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비포장이 끝나는 곳에는 ‘洗車加水(세차가수)’라는 간판도 보인다. 그만큼 상술이 발달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두어 시간 달렸을까? 역시 ‘손 씻을 곳(洗手?)’이 필요하여 찾고 찾아서 간 곳이 소학교였다. 1자 건물 하나로 되어있는 그 학교는 정문에 학교 이름조차 없었다. 따라서 이곳의 손 씻을 곳은 당연히 ‘측소(?所)’였다. 건물과는 반대쪽에 위치한 그곳은 깊이가 한 2m쯤 되고 냄새가 아주 강렬하여 무척이나 인상적인 측소였다. 갑자기 많은 사람들, 그것도 외국인들이 들이닥치자 교실 안의 수많은 눈망울들이 일제히 창 밖으로 쏠린다. 그래서였을까? 조금 지나자 ‘학교종이 땡땡땡’식의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이제는 눈망울들이 아니고 아예 꼬맹이들이 우르르 운동장으로 몰려나오고 있었다. 모처럼 구경거리가 된 ‘외국인들’은 부랴부랴 볼일들을 정리하고 운동장을 빠져 나오느라고 분주했다.

 이번의 가이드는 쇼핑을 하지 않는 가이드였다. 우리는 만 원씩 걷어서 물과 과일, 간식 등을 알아서 대주도록 부탁을 했고, 그래서 각 지방마다의 특산 과일을 마음껏 먹을 수가 있었는데, 여기서도 또 ‘손을 씻었으니’ 새로운 과일을 맛보게 되었다. 계속 다른 과일을 먹다 보니 과일 이름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다만, 사과와 함께 양귀비가 즐겨 먹었다는 과일이라는 것만 밝혀둔다.

 먹는 데에는 만주족을 따라갈 민족이 별로 없다고 한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음식을 실컷 먹고 싶으면 만주족과 함께 가서 주문하면 좋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아도 느글느글한 중국 음식을 ‘실컷’ 먹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음식은 남겨야지만 푸짐하게 먹었다고 한다는 그네들은 음식 쓰레기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소식장수(小食長壽)’라는 점을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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