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등정기 8) 아, 이곳은 만주벌판이다
(백두산 등정기 8)
아, 이곳은 만주벌판이다
이 웅 재
이 지방에서는 아직도 나무를 때어서 난방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집집마다 굴뚝이 있는 점이 우리나라와는 다른 모습이라 하겠다. 땔감인 나무들을 쌓아놓고 그 위쪽에 지붕처럼 덮어씌운 옥수숫대들이 집집마다 준비되어 있었다. 6․25 직후 남한산성으로, 청계산으로 나무하러 다니던 일이 아린 보풀을 일으키며 가물가물 기억을 되살리고 있었다.
한 곳은 장날인 모양이었다. 우리나라는 5일장이 보통인데 여기는 10일장이란다. 길 양옆으로 난전이 섰다. 어느 나라고 간에 시장바닥은 시끌벅적하고 무질서하고 지저분하다. 온갖 악다구니가 서로 목소리를 높이고, 비틀거리는 주정꾼에 쌈박질, 소매치기까지 날뛰는 등 밑바닥 삶의 전형이 펼쳐지는 곳이다. 차가 지나가도 비킬 염을 하지 않아 상당한 시간을 지체하고서야 그곳을 빠져나갔다.
염소들이 가로수 잎을 뜯어먹기도 한다. 집안 쪽으로 가까워지자 차츰 개량종 아카시아로 보이는 가로수들이 많아진다. 더러는 인삼밭도 보인다. 길가에는 아마도 벌개미취인 듯 노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경관도 보기에 좋았다. 모두들 장시간의 이동에 피곤하여 잠 속으로 곯아 떨어졌다. 내 앞 좌석의 한 여인은 졸다가 그냥 버스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버스에는 안전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겨난 수칙 하나. 졸려면 창측 좌석을 확보하라, 그렇지 않으면 가이드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거나, 설명이 없을 때는 창 밖의 경치를 감상하라. 그나마 에어컨은 빵빵해서 다행이었다.
혼강구대교(浑江口大桥) 직전에서 휴식을 취하다. 그곳은 민가라든가 일반 건물은 전혀 없는 곳이면서도 90° 좌측으로 꺾이면서 다리가 놓여 있는 곳으로 널찍한 공간을 공원처럼 잘 가꾸어 놓은 곳이었다. 나무뿌리를 다듬은 것과 돌을 조화롭게 얽어서 만든 조금은 고풍스럽고 예술적 조각품을 닮은 화장실이 있어서 시골길이다 보니 볼일도 보고 기념사진들도 찍었다. 다리 앞 이정표에는 집안 74km 지점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러니까 아직도 두어 시간쯤은 더 가야 할 모양이었다.
이곳에선 터널 속에 전기 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지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야광 표지만 있어서 터널 속에서 자동차가 고장이라도 난다든가 할 때엔 매우 난처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전기 절약도 좋지만 인명이 더 소중한 것이 아닌가? 하기야 아이를 하나밖에 낳지 못하게 하고 한국전쟁 때에는 인해전술로 참전까지 했던 나라이니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 정도밖에 안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굽이굽이 산골길이 이어진다. 도시 구경하기가 힘들다. 도시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취락지도 별로 없었다. 이곳 사람들은 생필품을 산다든가 응급환자가 생긴다든가 할 때 어떻게 외지와의 연락을 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몇몇 집들이 보여도 도통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 집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산골 구석에서 어쩌다 교회를 처음 만나보기도 했다.
교회 길옆으로는 개망초도 보인다. 북아메리카 원산의 야생 망초가 개망초이다. 하기야 망초도 같은 북아메리카 원산으로 일제 말기쯤 귀화한 이년생 풀로, 농부들이 없애려없애려 해도 없앨 수 없어서 ‘망할 놈의 꽃’이라고 해서 망초라고 불렀다는데, 그보다도 더욱 생명력이 강한 놈이 바로 개망초인 것이다. 요새는 정말로 가는 곳마다 개망초 투성이다.
우리는 지금 단동에서 집안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단동은 압록강 하류, 집안은 중류, 그리고 백두산이 그 상류가 된다. 이 근처 지방은 우리 선조들이 독립운동을 하던 곳이다. 근처에 독립군을 길러내던 신흥무관학교도 있다고 했다. 감회가 새로웠다. 이 드넓은 평야를 말 타고 달리며 조국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용감한 분들, 그런데 이제는 그분들의 자손이 중국으로부터도, 남한과 북한으로부터도 홀대를 받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아리다.
이곳에 있는 고구려 유산의 일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되어 있다. 아직 등록이 되지 못한 곳은 시급히 보존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다리 건너 쪽으로 국내성 서벽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좌측은 공원이었다. 그 공원은 바로 국내성 안의 유적지였는데 이처럼 위락지로 변모하여 옛 자취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공원 안에는 웃통을 벗고 다니는 사내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그들의 모습에서는 더 이상 예전의 독립군으로서의 용감무쌍했던 기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역사의 무상함이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역사 무상감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 비애도 그에 못지않다. 우리가 점심을 먹은 곳은 북한식 식당 묘향산이었다. 어째서 이쪽 지방에는 남한식 식당은 없는지 모르겠다. 현재 이곳을 관광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남한 사람들인데…. 아쉽다. 그러고서도 만주는 우리 땅, 간도는 우리 민족이 개척한 곳, 고구려․ 발해는 우리 역사라고 외쳐댈 수가 있는가? 현재는 남의 땅이 되어버린 백두산 천지에 올라가서 돼지머리 꺼내 놓고 단군에게 제사지내고, 태극기 펼쳐 들고 ‘대한민국 만세!’를 삼창하고, ‘백두산은 우리 땅!’이라는 플래카드나 활짝 펼쳐들고 사진을 찍고…. 그렇게 중국 사람들 무시하는 퍼포먼스로는 얻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왜 모르는가?
역식사 후에는 아코디언 반주에 송창식의 노래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세계에서 가장 경직된 사회라는 북한 사람들도 저처럼 남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데, 우리는 왜 그렇게 하지를 못하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빨간 원피스에 흰 칼라 복장의 북한 출신 아가씨들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었다. 아, 이곳은 만주벌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