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등정기 10) 동방의 피라미드 장수왕릉
(백두산 등정기 10)
동방의 피라미드 장수왕릉
이 웅 재
다시 시내로 들어왔다. 옛 궁내성 자리이다. 1930년대의 국내성은 잘 다듬은 네모꼴의 돌로 쌓은 4각형 모양의 석축으로 된 성(城)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데, 지금은 억지로 찾아보아야 성이 있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국내성은 이제 6층짜리 아파트들로 바뀌어 있었다. 어떻게 이처럼 역사적 현장을 깡그리 인멸시켜 버릴 수가 있을까? 여기저기 씌어져 있는 ‘보호문물 전승문명(保护文物 传承文明)’이라는 표어가 부끄러웠다.
가이드가 말한다.
“국내성 모습을 되새겨 보시려면 수원 화성을 가서 보세요.”
거리의 간판 중에는 ‘집안예술단(集安艺术団)’이라는 것도 보였는데, 이제는 저처럼 간체자를 사용하고 있으니, 어느 정도 한자를 아는 사람들도 한참을 들여다보아야만 그 뜻을 비슷하게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 사람들에게는 예전의 한자는 외국어로 변해버린 셈이 된 것이다. 그래서 요즈음엔 고문(古文)을 배우려는 사람들은 한국을 찾아온다고 하지 않던가?
휴지통은 ‘果皮箱’ 또는 ‘果売箱’이라고 했다. 과일이나 과자 껍질 등속을 버리는 것쯤으로 치부하고 있는 모양이다. 국내성 자리를 둘러보노라니 한 곳엔 예전의 배수구였던 곳이 있었다. 지금 남아 있는 외형으로만 보아도 상당히 과학적인 설계가 되어 있는 소중한 문화재로 여겨졌다.
오른쪽 강변으로는 ‘격강상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적 산수풍광(隔江相望 朝鮮民主主义 人民共和囯的 山水風光)’이라거나 ‘청철벽록적압록강(淸澈碧綠的鴨綠江)’이라는 압록강 표석들이 보인다. ‘강 건너 마주 바라다보이는 곳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산수풍경입니다.’라거나 ‘맑고 깨끗하며 푸르고 푸른 압록강’이라는 뜻이겠다. 시가지 경관 조성을 위하여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표석들은 ‘2003年 7月 1日 立’이라고 그 건립일자를 적어 놓은 것으로 보아, 우리의 국내성 모습은 지금도 계속 훼손되어 가고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여경(女警) 일단이 행군하는 모습이 보인다.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교통경찰이며 이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라고 했다. 가끔 TV 에서 북한의 거리를 소개할 때 볼 수 있었던 여군 복장의 딱딱한 표정의 교통경찰을 본 적은 있었지만, 청색 계통의 유니폼을 입은 이곳의 여경들은 그러한 거리감이 느껴지기보다는 상당히 산뜻해 보이는 것이 친근스럽게 여겨졌다.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장수왕릉(長壽王陵)을 보러 갔다. 표석에는 장군총(將軍坟)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예전엔 누구의 무덤인지 몰라서 장군총(將軍坟)이라고 불리던 능이다.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는데, 능에 준하지만 그 주인공이 확실치 않을 때엔 ‘총(塚)’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외의 무덤은 ‘묘(墓)’라고 부르고, 능 혹은 묘라 단정하기 힘든 것은 뭉뚱그려 ‘분(墳)’이라고 하는 것이다. 장수왕릉으로 밝혀진 지금도 장군총이라는 표석은 여전한데 중국인들은 만주벌판을 휘저었던 장수왕릉으로 인정한다는 것이 왠지 달갑지 않아서는 아닐까?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이 능은 5m가 넘는 장방형 화강암 1,100여 개로 이루어져 있단다. 이 돌들은 집안에서 8km 떨어진 고대 채석장에서 겨울에 얼음을 얼려 미끄러지게 하여 운송한 것이라고 했다. 무덤 사방에는 15톤 이상 되는, 사람 키의 두 배가 훨씬 넘는 큰 돌을 한 면에 3개씩 기대어 세워놓았는데, 뒷면의 하나가 깨어져 지금은 11개가 남아 있다. 가이드의 설명은 ‘기단 돌이 밀려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그러한 설명은 아무래도 미심쩍었다. 그것은 실질적인 보호석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어떤 상징성을 띄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그 이상은 짐작할 수가 없었다.
7층으로 된 방단적석묘인 장수왕릉 중 5층의 한가운데엔 널방(墓室)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다. 석실 안 석관의 머리 방향은 고구려의 본원이라 여겨지는 백두산 천지 (白頭山 天池)를 향하고 있고, 석관의 네 귀는 각각 동서남북을 가리킨다고 한다. 석관은 둘이었다. 왕과 왕비가 함께 묻힌 것이다.
석관을 덮은 개석(蓋石) 위로는 동전과 지전이 널려 있었다. 사진은 찍지 못하게 하면서 돈은 던져 놓아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1000원짜리 신권도 여러 장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세상이 참으로 좁아졌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돌과 돌 사이에는 홈이 패어 있었고, 입구 쪽은 낮았는데 이들은 모두 배수(排水)를 원활히 하기 위한 것인 듯이 보였다.
장군총의 높이는 12.4m, 5층 높이의 아파트와 맞먹는단다. 무덤의 가장 상단의 돌 윗면에는 난간의 기둥구멍이라고 생각되는 구멍들이 파여 있어서 그 안쪽으로 사당이 있어서 하늘 또는 주몽에게 제사를 지냈을 것으로 여겼었는데, 무덤 동쪽에 초대형 제단이 발견됨으로써 그러한 생각은 수정되어, 아마도 불탑이나 비석이 서있었을 것으로 추단하고 있다고 했다.
주변에는 이집트 피라미드의 스핑크스처럼 이 장군총을 지켜주는 배총(陪塚)이 있었다. 배총은 거대한 고인돌 모습이었다. 현재는 하나만 남아 있으나, 과거에는 장군총 네 군데 모서리 에 각각 하나씩 있었다고 한다. 개석(蓋石)의 아래쪽에는 홈이 패어 있었는데, 이 역시 빗물이 흘러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구실을 하고 있지 않았나 싶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일반적인 고인돌과 다른 점은 홈을 파서 입구를 막았던 돌이 있었다는 점이다.
장수왕릉을 관광하고 돌아나오는 길 양 옆으로는 파아란 클로버가 잔디 대신 주욱 깔려 있어서 그 위에 벌렁 드러누워 옛날 장수왕이 지녔던 무한한 영토 확장의 꿈을 가슴 가득히 느껴 보았으면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