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등정기

(백두산 등정기 12) 백두산 가는 길은 힘겨웠다

거북이3 2007. 7. 28. 09:42
 

(백두산 등정기 12)

   백두산 가는 길은 힘겨웠다

                                                                                                     이   웅   재


 6월 21일. 목요일.

 오늘이야말로 백두산에 오르는 날이다. 아침에 날씨가 흐려서 걱정을 했더니, 통화시(通化市)에 산다는, 새로 온 현지 가이드가 말한다. 백두산의 날씨는 천변만화라서 지금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그래도 걱정은 가시질 않았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천지(天池)를 보려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데, 혹시라도 그 염원이 어긋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바삭바삭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도중에 날씨가 차츰 맑아지는 바람에 기분이 상당히 밝아졌다. 그때부터 비로서 주위의 사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 지방에는 탄광, 특히 석탄 탄광이 많단다. 버스가 달리고 있는 길 양옆으로도 군데군데 시커먼 석탄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것들이 자주 보였다. 여기저기 석탄가루가 날아다니기도 해서 공해도 심할 것으로 여겨졌다.

 이쪽 길에서도 들를 만한 화장실이 없어서 공서(公署;관공서)의 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우리나라로 따진다면 산림청과 같은 건물이었다. 넓은 주차장에 차량은 별로 없었다. 화장실은 수세식이기는 했으나 관리(管理)는 영 말이 아니어서 형편없었지만, 우리 처지에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못 되어서 그저 감지덕지하면서 고맙게 사용했다.

 이곳 길림성에서는 다른 성(省)과는 달리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에서도 수비참(收費站)이 많이 있었다. 그만큼 도로세라든가 관광사업에 의존하는 바가 큰 지자체인 모양이다. 백두산 관광은 6월 1일부터 9월 중순까지만 가능하단다. 그래서 이쪽은 호텔도 서너 달밖에 운영을 하지 못하고 일 년의 반 이상을 방치할 수밖에 없기에, 곰팡이가 피고 냄새가 나고 창문이 고장 나는 등 열악한 상태란다. 10일 정도 지나서 7월로 접어들면 백두산 입장요금도 대폭 오를 것이라고 했다. 그런 얘기를 들어서일까? 길가의 건물 따위를 보니 아직 베트남 같은 나라보다도 못 사는 듯싶었다.

 수비참에서 경찰이 검문을 한다. 아마도 뇌물을 바라고 그러는 모양인데 우리 차는 모든 서류를 완벽하게 구비하고 다니기 때문에 별일 없을 것이란다. 그렇지 못할 경우, 이 핑계 저 핑계로 돈을 뜯기게 된단다. 우리가 탄 차는 좁은 길에서 큰길로 접어들 때에 역주행을 해서 진입하기도 했는데, 무질서 중의 질서라고 그런 대로 별 문제 없이 운행하고 있었다. 가이드는 교통순경이 있으면 오히려 교통의 흐름에는 방해가 된다고 했지만, 아마도 그것은 아직도 차량의 운행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일 것이란 생각이었다.

 백산시(白山市)를 지나면서부터는 도로상태가 좋지 못했다. 원래 포장길이기는 했지만, 도로는 노후된데다가 과적차량이 많이 다녀서인지 군데군데 파손되기도 해서 계속 공사 중이었다. 왕복 2차선 도로에서 1차선을 막고 공사를 하다 보니 상대 쪽 차량이 지나가도록 기다렸다가 지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기다리면 될 것을 그 새를 못 참고 왕복 차량이 한꺼번에 진입을 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한 차선을 가지고 왕복차선으로 이용하는 것인데, 소형차들은 그런대로 지나갈 수가 있지만, 대형차량들끼리 교차를 하려면 여간만 힘이 드는 일이 아니다. 서로 부딪칠 듯 말 듯, 조금 후진했다가 나아가기도 하고, 옆쪽으로 최대한 비켜서고서는 더 이상 비켜설 자리가 없으니 맞은 편 차더러 알아서 가라고 오불관언이다. 어떻게 알아서 가나? 차를 줄였다가 펴는 재주도 없고…. 그렇다고 뒤로 계속 후진할 수도 없다. 이미 뒤쪽으로도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사람들도 이런 경험 자주 해 보아야 무작정 진입이 서로를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게 되리라.

 땜빵공사가 끝나는 지점에서 현지 가이드만 남겨둔 채, 우리의 젊은 가이드는 5시간쯤 후에 다시 만나자며 내렸다. 이제 본격적인 백두산 등반이 시작되려나 보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차츰 차량의 통행이 드물어진다. 그렇다면 이제까지의 차량들은 백두산과는 무관한 차량들이었던 모양이다. 한마디로 한국 사람들만이 이토록 ‘백두산, 백두산!’ 하는 모양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그걸 이용하여 돈만 벌면 되는 것이다. 당국의 동북공정이라는 것도 어쩌면 돈을 벌기 위한 수작은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말하자면 한국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려 열을 받게 해 놓고는,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백두산을 찾게 만들자는 의도 말이다. 어느 쪽이건 간에 우리로서는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럭저럭 백두산 서파(西坡)에 도착했다.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장백산(長白山)이라고 한다. 아니, 북한에서도 장백산이라고 한다. 내 어렸을 적 38선 이북의 철원에서 지낼 때의 일이다. 학교에만 가면 늘 노래를 불렀었다. “장백산 줄기줄기….” 소위 김일성 장군 노래였다. ‘장백산’이란 서파 산문을 보니 그 어렸을 적 기억이 아슴푸레 떠오른다. 그때는 김일성 장군이야말로 우리의 독립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바친 가장 훌륭한 독립운동가요 민족지도자로 알았다.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애국자가 될 수 있을까…. 그는 어린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세뇌교육이란 그토록 무서운 것이다. 어린이들의 머릿속은 백지처럼 새하얗다. 거기에 어떤 색칠을 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교육과 경험인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에게는 경험보다는 교육이 우선한다. 가르치고, 가르치고, 또 가르쳐 보아라. 그들은 그 가르침을 그대로 믿는다. 믿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얻은 신념과 상반되는 지식이 접수되면 그것을 밀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한때 남한에서 초등학생들에게 가르친 ‘북한 괴뢰들’은 모두가 뿔 달리고 빨간 혓바닥을 넬름거리는 괴물이었지 아니던가?

 장백산이란 이름을 보는 순간, 그 흔했던 반공포스터가 머릿속을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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