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등정기 15) 동양의 그랜드캐년 금강대협곡의 아기자기한 경관
(백두산 등정기 15)
동양의 그랜드캐년 금강대협곡의 아기자기한 경관
이 웅 재
1,300계단을 되밟아 주차장에 이르니 갑자기 비바람이 휘몰아친다.
“천지를 보려면 3대에 걸쳐 덕을 쌓아야 한답니다. 어제도 그제도 못 보았답니다. 운이 좋으셨습니다.”
가이드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3대에 걸친 덕 때문에 보게 된 것인지, 운이 좋아 보게 된 것인지…. 그러나 그런 걸 따져서 무엇하겠는가? 버스가 있는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갑자기 시커먼 구름이 몰려오더니 비바람이 몰아친다. 정말로 순식간이었다. 꼭 토라진 처녀 마음 같아서 어째보는 방도가 없는 것이 이곳의 날씨가 아닌가 싶다. 버스를 타고 내려오다가 용암 계곡이 시작되는 곳에서 내렸다.
너비 1~2m, 깊이 70여 m, 용암이 땅속으로 흘러들어 생겨난 좁은 지하 통로 같은 것으로 위에서 내려다보니 아찔하다. 가끔 사슴 같은 동물이 빠지기도 한단다. 얼핏 보아서는 그저 평지처럼 보이는 곳, 거기 그토록 깊게 패인 골짜기가 있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때문이리라. 이곳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이 그들을 꺼내주기도 한단다. 그 좌측 옆으로 그보다 조금 더 넓은 골짜기가 있었다. 너비가 4~5쯤 되어 보인다. 옆쪽으로 ‘제자하(梯子河)’라는 나무로 된 표지판이 보인다. 그런데 이곳엔 저 아래 밑바닥까지 약간 굵은 나무둥치들로 얼기설기 엮어 놓았다. 일꾼이나 군인들의 식수를 퍼 올리기 위한 것이란다.
날씨는 다시 변하여 햇볕이 쨍쨍 내리쬔다. 어떻게 해서 토라진 처녀의 마음을 되돌려 놓은 것일까? 버스를 타고 다시 내려오다가, 제자하의 두 골짜기의 물이 땅속으로 흘러내려가서 함께 만나게 되는 곳이라는 ‘금강대협곡 (金剛大峽谷) ’을 보기 위하여 내렸더니, 어렵쇼? 처녀는 아직도 마음이 온전히 돌아서지 않았던가 보다. 제법 굵직한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한다. 마음을 고쳐먹으려다가 곰곰 따져보니 도저히 억울해서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이제는 주체할 수 없는 설움에 엉엉 울어댈 때의 그 마음 놓고 흐르는 눈물처럼 주르륵주르륵 내리고 있었다.
서둘러서 우의를 꺼내 입고 원시림 사이로 만들어 놓은 길을 15분 정도 들어가니, 용암이 흘러간 자국이 깊게 패이고, 가다가 멈춰선 용암들이 오랜 세월 동안 풍화되어 이루어진 천태만상의 기기묘묘한 경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골의 깊이 120m, 너비는 200m 내외의 V자 형의 급경사로 이루어진 협곡이 굽이굽이 이어진다. 계곡의 총길이는 약 60km, 협곡의 물은 천지에서 발원, 중국 쪽 송화강을 이룬단다. 그것은 신비, 바로 조물주의 신비스러운 작품, 동양의 그랜드캐년이었다. 비록 규모면으로는 미국의 그것을 따를 수 없겠지만, 아기자기한 그 모습은 결코 손색이 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몇 년 전, 장가계 원가계를 갔을 때도 그런 점을 느꼈었다. 사람들은 모두들 금강산보다도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지형이었기 때문에 그처럼 절경으로 보이는 것이지만, 한 번 보고 두 번 보면 벌써 그 느낌이 달라지는 아름다움이었다고 말이다. 보면 볼수록 아름다웠던 경치가 금강산의 풍경이었고, 보면 볼수록 신비롭고 아기자기한 것이 금강대협곡의 경관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구석이 아려 왔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이쪽저쪽이 바로 중국과 북한 측으로 갈라진 곳이라지 않는가? 도움닫기를 하다가 힘껏 건너뛰면 맞은 편 절벽 위에 우뚝 설 수 있을 것 같던 이 계곡이 그토록 우리의 가슴 속에까지 깊게 파인 구렁으로 인식이 되는 협곡일 줄이야! 덧붙여 마음을 쓰리게 하는 것이 또 하나 있었다. 금강대협곡의 입구 산문(山門), 거기에는 ‘장백대협곡(長白大峽谷)’이라는 편액이 떠억 걸려 있었다. 너무나도 선명한 그 글씨, 여기서도 나는 중국인들의 그 끈질긴 동북공정의 한 편린을 보았던 것이다.
나무로 만들어 놓은 산책로를 따라 계곡의 절경을 감상하며 여기저기의 경치를 디카에 담다 보니, 아뿔싸, 마지막 전망대 직전에서 디카는 ‘카드 Full’이란 메시지를 보낸다. 차에 가면 예비용으로 가지고 왔던 수동 카메라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때까지 찍어두고 싶은 몇몇 커트는 생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내 마음을 위로하려는 것일까? 하늘은 다시 말짱하게 개었다.
아쉬움을 한 움큼 뭉쳐 남겨둔 채, 대협곡을 떠나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기이하게 생긴 나무마다에 써 붙인 표지판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저런 나무 하나하나도 이제는 모두 관광자원으로 활용이 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잃어버린 내 지갑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느낌을 맛보았다.
찍지 못한 사진 중에 끝내 아쉬웠던 것은 산책로의 끝부분쯤에 있었던 ‘합환수(合文欠 樹)’ 였다. 여러 개의 나무가 서로 얽혀 있는 모습이었는데, 얼핏 보아서는 알기 힘들었으나 ‘합환수(合文欠 樹)’라는 그 표지판을 의식하면서 보았더니, 틀림없었다. ‘합환수(合文欠 樹)’였다. 여자는 허리를 굽힌 채 반쯤 엎드리고 남자가 그 뒤에서 성교를 하는 후배위(後背位) 체위 모습의 ‘나무들’이었다. 거기에다가 ‘합환수(合文欠 樹)’라고 이름 붙인 사람의 눈썰미가 대단하다 싶었다.
주차장에는 궁시렁궁시렁 계속 욕설을 해대며 지내는, 실성한 듯싶기도 한, 웬 할머니 한 분이 있었다. 치매(癡呆)인가? 그래서 일부러 버리고 간 것일까? 하지만 외국에서는 저렇게 버리고 갈 수가 없잖은가? 그 팀 전체가 문제가 될 테니 말이다. 아직 우리가 탈 버스 말고도 한 대의 버스가 더 세워져 있으니 아마도 그쪽 팀 사람이겠지, 억지로 합리화시키며 버스에 탑승했다. 사람들은 늘 그렇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