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이 되어 갔다는 최치원의 좌절
신선이 되어 갔다는 최치원의 좌절
(이 웅 재 정리)
우리 나라에는 고래로 도교가 자랄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되어 있었다.
우리 민족의 시조신화인 단군신화에도 환인천제(桓因天帝)의 서자(庶子: 長子가 아니라는 뜻)인 환웅대왕(桓雄大王)이 인간 세상을 내려다 보고 가히 ‘홍익인간(弘益人間)’할 만하다 하여 태백산정(太白山頂)의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로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표현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삼국유사”의 기록은 환웅이, 곰이 여자로 새롭게 태어난 웅녀(熊女)와 결합하여 단군(檀君)을 낳게 되고, 그 단군은 고조선(古朝鮮)을 건국하여 1,908세까지 다스리다가 산신(山神)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도 신선설(神仙說)과 관련이 깊다. 중국 제실(帝室)의 딸 사소(娑蘇)가 처녀 잉태를 하게 되어(신라의 건국이 BC 57년이라 하니 마리아의 처녀 잉태보다도 먼저임) 의심을 받게 되자 신선술(神仙術)[우리 나라에서도 신선술은 자생적으로 존재했으며, 여기에 노장(老莊) 철학이 전래되어 습합(褶合)하고, 다시 그것이 종교화한 것이 도교(道敎)라 할 수 있겠다.]을 배워 우리 나라 진한(辰韓)으로 와서 혁거세를 낳았다고 하는 것이다. 나중 혁거세는 천선(天仙)이 되고 사소는 지선(地仙)이 되었다고도 한다.
눌지왕(訥祗王: 417~457 재위) 때의 박제상(朴堤上)과 그의 처 김(金)씨 사이에서 태어난 박문량(朴文良)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백결 선생(百結先生)인데, 그는 평소 영계기(榮啓期)를 사모했다고 한다. 영계기는 선교적(仙敎的) 성격이 강한 인물이다.
공자가 태산(泰山)을 지나다가 금(琴)을 타며 노래하는 영계기를 만나 물었다.
"무엇이 그렇게 즐겁소?"
영계기가 대답했다.
“천지간 만물 중에 사람이 가장 귀한데 나는 바로 그 사람으로 태어났소. 사람 중에서도 남자가 더 귀한데 나는 그 남자로 태어났소. 또한 강보에 싸인 채 죽는 사람도 많은데 나는 지금 90까지 살았소. 그러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소?” 이것이 바로 영계기의 인생 삼락(人生三樂)이다. [맹자(孟子)의 군자 삼락(君子三樂)인 ①양심상(良心上)의 즐거움(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 ②가족의 무고함(父母具存 兄弟無故), ③교육상의 즐거움(得天下英才而敎育之:득천하영재이교육지)와는 다르다.]
사선(四仙: 술랑<述郞>, 남랑<南郞>, 영랑<永郞>, 안상<安祥>)의 이야기나 김유신(金庾信)의 방술(方術), 그의 고손자 김암(金巖)이 당(唐)에 숙위(宿衛)로 들어가 [이를 서학(西學)이라 하는 바, 근세의 서학과는 다르다. 근세의 서학은 ‘서양의 학문’ 또는 ‘서양의 종교’ 곧 천주교(天主敎)를 가리키는 것으로 최제우(崔濟愚)의 동학(東學)과 상대되는 개념이다.] 둔갑술(遁甲術)을 배워 터득(攄得)했다는 기록도 있다.
고구려(高句麗)의 영류왕(榮留王) 7년(624)에는 당나라 고조(高祖)가 우리 나라에 도사(道士)를 파견하여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강론케 했다고 하고, 보장왕(寶藏王) 2년(643)에도 당으로부터 “도덕경”이 전래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신라 말의 최치원(崔致遠), 고려 전기의 서경 천도(西京遷都)를 주장하던 묘청(妙淸)의 난에 연루되어 김부식(金富軾)에게 죽음을 당하게 된 정지상(鄭知常), 조선 세조(世祖) 때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쓴 김시습(金時習), 천도(天桃)를 따왔다는 전설상의 인물 전우치(田禹治)도 도교적 인물이다. 80여 세에 죽은 윤군평(尹君平)은 시체가 가벼워 수의(壽衣)만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는데, 아마도 이는 ‘시해(尸解)’를 이룬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시해에 대해서는 끝부분에서 설명된다.] 허균(許筠)의 소설에 나오는 홍길동(洪吉童)도 둔갑술을 행했고, “토정비결(土亭秘訣)”의 토정 이지함(李之菡)이나 황진이(黃眞伊)를 몸달게 했던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그리고 15일 동안에 썼다고 하여 “순오지(旬五志)”란 제목을 붙인 글을 쓴 숙종(肅宗) 때의 홍만종(洪萬宗) 등도 모두 도교적 인물들이다.
그러면, 이제 최치원(857~?)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자.
그는 자(字)를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라고 했다. 지금 부산(釜山)의 해운대(海雲臺)는 그가 노닐던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태종대(太宗臺)는 태종무렬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가 노닐던 곳이고.]
한국 한문학의 비조(鼻祖)라 일컬어지는 그는 ‘계림황엽 곡령청송(鷄林黃葉 鵠嶺靑松)’이라는 참위설(讖緯說: 오행설에 바탕을 둔 일종의 예언학)울 전파하기도 했다. [계림은 신라를, 곡령은 고려을 의미한다.]
“삼국사기” ‘열전(列傳)’에 의하면 그는 육두품(六頭品) 출신이었다. 12살에 서학(西學)을 하여(당시 서학은 상당히 유행이 되어, 840년 같은 날 귀국한 사람만도 105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신라의 문화는 이러한 유학생<숙위학생> 및 유학승 덕분에 발전하였다고 한다.), 18세에 당나라가 외국인에게 보이는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한다. 그러나, 820년~906년 사이에 빈공과에 급제한 사람이 58명이나 된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것이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빈공과는 중국(당)이 주변국을 무마하기 위해 실시하던 과거였기에 내실이 있던 제도라고 보기가 힘든 것이다.
어쨌든, 최치원은 급제 직후 2년간은 낙양(洛陽) 등지를 떠돌면서 서류 대필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등 가난한 생활을 계속하다가, 876년 현위 자리 하나를 얻었으나 그것도 사정이 여의치 못해 1년만에 사직을 하고, 다시 그 후 2년간은 끼니마저 걱정하는 극단적인 가난 속에 허우적거렸다. 할수없어 879년 회남절도사 고변(高騈)에게 애원의 편지를 올린 끝에 그의 식객(食客)으로 받아들여져 간신히 굶주림을 면하게 된다. 변방인의 한계였던 것이다.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고변을 따라 전쟁터를 이리저리 전전(轉轉)하면서 저 유명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쓴다. [황소가 그 격문을 보고 놀라 말에서 떨어졌다고도 한다.] 그 보상으로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使內供奉)에 임명되는데, 이는 정식 관직이라기보다 토벌군이 편성되었을 때 사기 앙양을 위해 내리는 표창과 같은 성격의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도 최치원은 고변의 개인 종사관, 개인 비서쯤으로만 취급될 뿐이다. 그나마 882년 고변이 파직되자, 최치원은 그 뒤 28세(885)에 귀국할 때까지 3년 동안은 어떻게 먹고 살았는지조차 기록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뛰어난 필력(筆力)을 가지고서도 이방인의 설움 속에 뜻을 펴지 못했던 그는 귀국 후 한때 득의(得意)의 삶을 사는 듯했다. 귀국 후 10여 년 동안은 한림학사(翰林學士) 등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했고, 894년에는 진성여왕(眞聖女王)에게 시무책(始務策) 10여 조(條)를 올려 아찬(阿湌)에 임명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엄격한 골품제(骨品制) 사회였던 신라에서는 그것이 6두품으로서 올를 수 있는 최고의 관직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힘든 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토황소격문” 등으로 문명(文名)이 알려진 그를, 고국에서 이미 성공하여 고관의 직에 오른 동년배들이 쉽게 받아주지를 않았던 것이다. 당에서는 이방인으로서의 한계 때문에, 그리고 고국 신라에서는 출신 성분의 한계로 인하여 그는 또다시 실의에 빠지게 된다. 천리마(千里馬)는 어느 때나 있지만, 백락(伯樂)은 늘 있지 아니하다는 말을 실감케 하는 일이다.
어쨌든, 이미 후3국의 쟁패가 시작된 그 시기에 그로서는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없는 신라에 충성할 이유도 찾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고려(高麗)를 택할 용단도 내리지 못한 채,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은거하게 되는 것이다. 그 이후의 행적은 묘연하다. 다만, 신선이 되었다는 말로 몰년(沒年)도 알 수 없는 채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의 만년(晩年)의 실의를 읽을 수 있게 해 주는 글로서는 고등 학교 문학 및 한문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추야우중(秋夜雨中)’이 있어 소개한다.
秋風唯苦吟: 추풍유고음 … 가을 바람에 괴로이 읊나니
世路少知音: 세로소지음 … 세상에 나를 알이 없구나.
窓外三更雨: 창외삼경우 … 창 밖엔 한밤중 비가 내리고
燈前萬里心: 등전만리심 … 등불 앞에는 만리를 달리는 마음이로구나.
이 시는 중국에서 고국을 그리며 읊은 시라고 가르쳐주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이 아니고 고국에 돌아온 후의 작품임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가 쓴 글로서는 “토황소격문”을 필두로 우리 나라 최초의 문집인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난랑비서(鸞郞碑序)’,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 “가야보인법(伽倻步引法)” 등이 있다.
그의 문재(文才)는 서거정(徐居正)이 쓴 우리 나라 한문학의 집대성(集大成)이라 할 수 있는 “동문선(東文選)”에 신라인의 작품이 총 192편인데, 그 중 그의 글이 146편이라는 것만 보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최치원에 대한 평가는 고려조 제일의 문호 이규보(李奎報)를 거쳐, 조선조의 김종직(金宗直), 주세붕(周世鵬), 서유구(徐有渠) 등에 의하여 칭송 일변도로 이루어져 왔다.
“향악잡영오수”는 우리 나라 가면극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소중하고, ‘난랑비서’는 화랑의 사상적 배경이 유불선 3교라는 점을 밝혀준 글이라서 보배롭다.
“향악잡영오수”는 오기(五伎, 五技)를 7언시로 읊은 것으로, 그 대강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금환(金丸) … 농환(弄丸)의 손재주, 곡예(曲藝).
월전(月顚) … 난쟁이들이 술잔을 돌리며 부르던 노래, 연극적.
대면(大面) … 황금 탈놀이.
속독(束毒) … 남색(藍色) 탈놀이.
산예(狻猊) … 사자무(獅子舞).
그리고 “삼국사기”에 실려져 있는‘난랑비서’의 전문(全文)은 아래와 같다.
국유현묘지도 왈풍류 설교지원 비상선사 실내포함삼교 접화군생 차여입즉효어가 출즉충어국
노사구지지야 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주주사지종야 제악막작 제선봉행 독건태자지화야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마지막으로 그의 “가야보인법”을 보자.
이는 ‘시해(尸解)’의 방법을 적은 책이라 하는데, 시해의 밥법에 대해서는 그의 외숙(外叔) 현준(玄俊)이 입당(入唐)하여 그 법을 배웠고, 최치원도 당 유학(儒學) 때 배웠으나 귀국 후 잊어버렸던 것을 외숙에게서 다시 배워 저술했다고 한다. ‘시해(尸解)’한 완전한 신선이 되는 방법이라 하겠다. ‘보인(步引)’이란 “보사유인(步捨游引)”의 줄인 말로,
보(步) … 혼백(魂魄)이 걸어나감.
사(捨) … 시신(屍身)을 버려 둠.
유(游) … 천지간을 자유자재로 오유(遨遊)함.
인(引) … 5백 년 후 지상의 시신을 끌어 올려다가 혼백과 합침.
을 의미한다.
온전한 신선이 되려면 최소한도 5백 년이 걸려야만 하는 것일까?
신선 좀 되어볼까 했더니, 포기해야만 하겠다.
<참고 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문선
동국이상국집
국문학사(김동욱, 일신사, '84.)
국문학통사(조동일, 지식산업사, '82.)
한국의 도교사상(차주환, 동화출판공사, '84.)
도가사상의 연구(이강수, 고대 민족문화연구소, '85.)
한국사의 세계인 ③ 최치원(이인화, 2001. 1. 17. 조선일보 19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