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백두산등정기 1) ‘애신각라 황태급(愛新覺羅 皇太木及)’
(속․ 백두산등정기 1)
‘애신각라 황태급(愛新覺羅 皇太木及)’
이 웅 재
평소에 그렇게 가 보고 싶었던 백두산이었다. 그래서 만사 제쳐 놓고 그야말로 설레는 가슴 부둥켜안고 숙연한 심정으로 올랐었다. 그런데 일주일쯤 지나고 나서 또 갈 일이 생긴 것이다. 대학의 교친회 주관의 백두산 등정이 있었던 것이다. 세상일이란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항상 그렇게 짝지어 찾아오는 모양이다. 첫 번째의 그 설렘은 훨씬 완화되었지만, 마음이 진정되지 않고 들뜨기는 별 차이가 없었다. 첫 번째보다는 민족적인 관점이 좀더 강화된 것 정도가 다르다고나 할까? 대상은 항상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 중요할 터인데, 나도 한국인임에는 틀림이 없는 모양이었다.
6월 30일. 토요일이다.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엔 심양(瀋陽)으로 갔다. 13:50에 도착. 20분 연착이다. CZ682기. 중국 비행기인 것이다. 처음부터 중국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인 듯싶다. 심양의 옛 이름은 봉천(奉天), 우리의 독립투사들이 활동하던 주무대였던 곳이다. 콧날이 저절로 시큰해진다.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 이런 데서 쉽게 증명이 된다. 청나라 태조가 요양(遼陽)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성경(盛京)이라 불렀던 곳이기도 하다. 요새는 ‘瀋陽’이라는 번체자를 쓰지 않고 간체자로 ‘沈阳’이라고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심양은 인구 800만 명으로 중국에서 5위에 드는 도시다.
첫째는 중경(重慶),인구가 무려 3,400만이다. 그 절반쯤에 해당하는 1,600만 명의 상해(上海)가 다음이고, 북경(北京)이 1,400만 명, 천진(天津)이 1,100만 명이다. 인구 1,000만 명 이상인 이 네 개의 도시가 중국의 특대도시(직할시)이다. 인구 100만~500만까지는 소도시, 500만~1,000만까지가 대도시, 그리고 인구 1,000만 이상이 특대도시이다. 심양은 아직 특대도시는 되지 못하였으나, 거기에 바싹 쫓아가고 있는 대도시인 것이다. 까르푸만 6개, 신세계도 3점포가 들어와 있는 등 소비자를 위한 외국자본도 많이 들어와 있는 도시이다.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북릉(北陵)을 보기 위해 시내로 들어섰다. 왼쪽으로 LG 공장의 간판이 보인다. 반가웠다. 외국에 나올 때마다 이렇게 우리나라 기업들의 이름을 대하면 저절로 여독(旅毒)이 풀리곤 하였다. 래미안아파트도 보인다. ‘잔여세대 분양’이라는 한글 광고문이 눈에 들어온다.
심양시는 혼하(渾河)에 의해 남북으로 갈라진다. 혼하는 환인(桓因)의 혼강(渾江)과는 구별해야 할 별개의 강이다. 한편, 우리나라 서울과는 달리 여기는 혼하의 북쪽인 강북이 중심가이다. 북릉대가(北陵大街)를 지나면서 보니 이곳엔 교통경찰도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08년의 올림픽을 치르고 나면 중국을 대표하는 상표의 하나인 ‘무질서’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북릉의 원래 이름은 소릉(昭陵)인데 심양시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통칭 북릉으로 불린다. 청나라 2대 황제인 태종과 그 황후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1643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8년에 걸쳐 완성한 능이다. 워낙 넓은 땅덩어리를 가지고 있는 나라라서 그럴까, 약 450만㎡의 넓이에 조성된 능묘이다. 요즘은 그 전체를 공원으로 지정하여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하면서 즐긴다니 부럽기 그지없다. 정문을 들어서니 능묘에 이르기까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참도(參道)가 이어진다.
날씨는 무덥고 이슬비마저 뿌리는데 널찍한 능원의 잘 조성된 숲이 그나마 청량감을 불러준다. 왼쪽으론 숲 사이로 인공호수가 시원스레 드러나 보이기도 했다. 노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공원을 관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기도 했는데, 그들은 가벼운 형량을 받은 죄수들이란다. 좀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우리의 이순신 장군을 닮은 동상이 하나 서 있다. 청나라 제2대 황제 ‘애신각라 황태급(愛新覺羅 皇太木及)’의 동상이었다. 그 조금 못 미친 곳에는 ‘하마비(下馬碑)’도 있었다. 청나라의 12황제 능은 모두가 생전에 조성된 것들이다. 그런데 이 2대 황제만은 장소만 정해 주었을 뿐이란다. 문제는 황태급의 성이다. 어째서 ‘애신각라 (愛新覺羅)’인가? 한 글자씩 건너 뛰어 보자. ‘애각신라(愛覺新羅)’-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말자’ -그런 의미가 아닌가?
금나라도 후금도 모두 나라이름에 금(金)을 넣었다. ‘금(金)’은 ‘김(金)’이기도 한 것, 신라의 ‘김(金)’씨의 뒤를 잇는다는 뜻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청(淸)’으로 바꾼 것은 ‘명(明)’나라의 ‘밝음’, 곧 ‘열(熱)’에는 ‘금(金)’이 녹을 수도 있기에 바꾸었다는 것인데, 글쎄, 믿어야 할지, 무시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지를 않는다. 심정적으로는 ‘애각신라’의 변형인 ‘애신각라’가 우리들의 마음속을 파고들었고, 그래서 다시 한번 그 황태급의 동상을 우러러보았다.
능묘로 들어가는 길 양 옆으로는 6쌍의 동물 석상들이 도열해 있었다. 말하자면 능의 수호신들일 것인데, 사자, 해태, 목 짧은 기린(평안을 상징한단다), 말, 낙타, 코끼리였다. 그 중에서도 말은 기마민족이었던 청나라를 대표하는 것, 오른쪽 것은 천리마, 왼쪽 것은 500리 마였다. 대백(大白)과 소백(小白)으로도 불린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제각(祭閣)이 있는데, 제단이 있는 곳의 앞에는 비취옥으로 된 무릎 꿇는 곳이 있고, 그 앞쪽은 흔히 보기 어려운 금돌이 놓여 있다. 능묘가 있는 곳의 지하 궁전은 불을 태워서 진공으로 만들어 놓았다는데, 지금은 막아 놓아서 벽으로 되어 있고, 좌측의 반달 모양으로 생긴 월아성(月牙城)에 올라보니, 능은 경주에 있는 신라시대의 능보다 작은데, 봉분에는 풀이 전혀 없었다. 평소 바람 때문에 흙이 자꾸 날아가서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시멘트를 발라 놓았었다는데 그것도 이젠 풍화되어 허연 흙으로만 보인다. 특이한 것은 봉분의 꼭대기에는 커다란 나무 하나가 둥그런 모습으로 자라고 있어서 마치 능묘 전체가 솥뚜껑을 엎어놓은 듯한 점이었다.
첫 관광지가 이렇듯 민족적 자각을 일깨워주고 있는 곳이라서 나름대로 감회가 새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