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17) 애틋한 사랑의 주인공, 설씨녀와 가실
경북 인물열전 (17)
애틋한 사랑의 주인공, 설씨녀와 가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1. 慶州府 烈女條]
이 웅 재
신라 26대 진평왕 때 설씨녀(薛氏女)라는 여인이 살았다. 서라벌의 율리(栗里) 평민 집안의 여자였다. 집은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집안이었다. 하지만 용모가 단정할 뿐만 아니라 무척 아름다워서 보는 사람마다 그녀에게 흠뻑 빠지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뜻과 행실이 대쪽처럼 발라서 누구도 감히 가까이 하지는 못하였다.
헌데, 그 아버지가 나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정곡(正谷)으로 방추(防秋)1)하는 군사로 소집이 되었다. 설씨는 늙고 병들고 쇠약한 아버지를 차마 멀리 보낼 수가 없었으나 여자의 몸으로서는 아버지 대신 갈 수도 없었으므로 스스로 근심과 고민 속에 쌓여 있었다.
한편 사량부(沙梁部; 경주)에 가실(嘉實)이라는 소년이 있었는데, 비록 집이 대단히 가난했고 볼품이 없었으나 뜻을 키움이 곧은 남자였다. 그는 일찍이 설씨를 좋아하였지만, 감히 말을 하지 못하고 지냈었다. 그런데 설씨의 아버지가 늙은 나이에 종군하게 되어서 그녀가 걱정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용기를 내어 설씨에게 청하여 말하였다.
“저는 비록 나약한 사람이지만 일찍이 뜻과 기개를 자부하였습니다. 원컨대 불초한 몸이지만 아버님의 병역(兵役)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이에 설씨가 매우 기뻐하여 집안으로 들어가서 아버지에게 이를 고하니, 아버지가 가실을 불러 말하였다.
“듣건대 그대가 이 늙은이의 병역을 대신하여 주겠다 하니 기쁘면서도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네! 해서 내 보답할 바를 생각하여 보니, 가진 것도 별로 없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내 딸이라, 비록 어리석고 가난하기는 하지만 모든 사내들이 그애를 흠모하고 있는 실정이니, 그런대로 그대의 아내를 삼으면 어떨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말을 들은 가실이 입이 두 발 반이나 찢어져, 재배하고 답했다.
“감히 바랄 수는 없었어도 그것은 저의 커다란 소원이었습니다.”
이에 가실이 물러가 혼인할 날을 청하니 설씨가 말하였다.
“혼인이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인데 갑작스럽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제가 이미 낭군께 마음을 허락하였으니, 죽어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그대가 수자리에 나갔다가 교대하여 돌아온 후에 날을 잡아 성례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거울을 꺼내어 반을 갈라서 각각 한 조각씩 나누어 가지고 말하였다.
“이것을 신표(信標)로 삼아 뒷날에 합쳐보기로 합시다!”
이에 가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말 한 필을 설씨에게 맡기면서 말하였다.
“이는 천하에 드문 양마(良馬)이니 후에 반드시 그 쓰임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내가 떠나면 이를 기를 사람이 없습니다. 청컨대 이를 맡아서 기르도록 하십시오!”
드디어 작별을 하고 떠났다. 그런데 하필이면 국가에서 변고가 생겨, 가실과 교대해 줄 다른 사람을 뽑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가실은 예정했던 기간의 두 배나 되는 6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를 못하고 말았다. 이에 설씨녀의 아버지는 딸에게 단호하게 잘라 말하였다.
“처음에 가실은 3년으로 기약을 하였는데 이미 그 날짜가 넘었는데도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지 않느냐? 이제는 아무래도 다른 집으로 시집을 가야 하겠다.”
그 말을 들은 설씨가 말했다.
“지난날 처음에는 아버지를 편안히 하여 드리기 위해서 억지로 가실과 약혼을 하였습니다. 가실은 이를 믿었기 때문에 군대에 나가 오랜 동안 종군하며 굶주림과 추위에 심한 고생을 하였습니다. 더구나 적지에 가까운 곳에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시도 손에서 무기를 놓지 못했고, 마치 호랑이 입 앞에 있는 것 같아서 늘 호랑이에게 씹혀 먹히지 않을까 걱정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다 보니 이제는 그가 제 마음 속에 남편으로서 뚜렷하게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신의를 버리고 말한 바를 지키지 않는다면 어찌 그것이 사람의 도리, 인정이라 하겠습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문제에서만은 감히 아버지의 명을 좇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아버지께서는 두 번 다시 그런 말을 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나 그 아버지는 늙고 늙어 나이는 90세에 이르렀고, 그 딸 또한 과년하게 되었는데도 그 배필을 얻지 못한 형편이라, 나중에라도 배우자가 없을까 염려하여 억지로라도 시집을 보내려고 동네 사람과 몰래 혼인을 약속하고 잔칫날을 정하였다. 결혼날이 되어 그 사람을 끌어들였는데, 설씨녀는 이를 거절하여 몰래 도망을 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낌새를 알아챈 다른 사람들의 감시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그녀는 가실이 남겨두고 간 말이 있는 마구간에 가서 울면서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인생이란 언제나 연극적인 것이다. 바로 그때 가실이 교대되어 온 것이다. 형상은 해골처럼 야위었고 옷은 남루하기 그지없어 집안사람들은 물론 설씨녀마저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가실은 그녀의 앞에 나아가 전에 신표로 나누어 가지고 있던 깨진 거울 한 쪽을 던졌다. 순간, 설씨가 이를 주워들었고 드디어는 기쁨에 넘쳐 소리를 내어 흐느껴 울었다. 드디어 아버지와 집안사람들도 함께 기뻐하여 어쩔 줄 몰랐다. 그리고는 다른 날을 가려서 서로 만나 결혼을 하고 백년해로를 하였다.
요즘 신 아무개와 변 아무개의 스캔들로 나라 전체가 들썩이고 있다. 그녀는 35세가 되었는데도 싱글, 그건 의도적인 듯이 느껴진다. 그런 그녀의 앞에서 굳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사내는 과연 몇이나 될까? 해서 신 아무개의 ‘부적절한 처신’을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해서 이 글을 소개하기로 했다.
1) 방추 (防秋); 예전에, 북방 이민족을 막음. 옛날 중국에서 가을철이 되면 북방의 이민족이 침입하였던 일에서 유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