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21) 고려 초기 국가체제정비 개혁방안을 제시했던 최승로
경북 인물열전 (21)
고려 초기 국가체제정비 개혁방안을 제시했던 최승로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1. 慶州府 人物條]
이 웅 재
고려 초기의 국가체제정비 개혁안을 제시한 최승로(崔承老 ; 927 ~ 989)는 신라말 경주에서 태어나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할 때(태조 18년; 935년) 아버지를 따라 고려로 왔다. 본관은 경주(慶州), 아버지는 원보(元甫)라는 벼슬을 지냈던 6두품인 은함(殷含)이다. 늙도록 아들이 없자 하늘에 기도를 올린 끝에 최승로를 낳았다고 한다.
늦둥이라 애지중지하면서 키웠을 터인데도 그는 마마보이가 되지는 않았다. 타고난 성정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다. 나이 열두 살 때(태조 21년; 938년)에는, 태조가 그 소문을 듣고 대궐로 불러들여 『논어』를 읽어보도록 했는데, 그는 막힘없이 줄줄 암송함으로써 뭇 사람들을 놀라게 했단다. 이에 태조는 그를 가상히 여겨 소금을 졸이는 가마인 염분(塩盆)을 상으로 주고, 왕이 내리는 글을 맡아 보던 기관인 원봉성(元鳳省)의 학생이 되게 했다. 뿐만 아니라 안장 얹은 말을 하사하였으며, 정례(定例)로 녹봉 20석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로부터 그에게 문병(文柄)을 맡겼다.
그는 광종 대에는 중용되지 못했으나 경종 대를 거쳐 성종이 왕위에 오르면서(981년)부터 승승장구하게 된다. 성종은 즉위하면서 유교 통치를 위한 포부를 밝히고 이듬해에는 정 5품 이상의 모든 관료에게 시무와 관련한 상소를 올릴 것을 명한다. 이때 종2품으로 있던 최승로는 '시무책 28조'라는 장문의 글을 올린다. 이것이 성종에게 채택됨으로써 고려 사회는 새로운 개혁을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연유로 해서 최승로는 문하시중(門下侍中; 요즘의 수상 또는 국무총리에 해당함)의 직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는 신라 시대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6두품은 성골, 진골 다음의, 두품 중에서는 가장 높은 성분이기는 했지만, 17관등 중 제6관등인 아찬(阿湌)까지밖에는 올라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말년에는 여러 차례 벼슬을 그만두기를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을 정도였다. 시호는 문정(文貞), 성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요즈음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쏟아 내놓는 개혁성 정책들을 대하다 보니 최승로의 개혁적 시무책을 한번 살펴보고 싶어서 고려 인물열전의 첫머리를 최승로로 잡아 보았다.
그 시무책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뉜다. 처음은 상소문을 올리게 된 배경이요, 두 번째는 태조에서 경종 때까지 5조(五朝)의 치적에 대한 평가이고, 마지막 부분이 바로 성종에게 건의한 28조에 이르는 시무책(時務策)이다. 당시는 고려가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라서 아직 나라의 기틀이 온전히 잡히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최승로의 이 시무책 28조는 고려가 나라의 기초를 다지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하게 된 중요한 시정(施政)의 방책이라 할 것이다.
상소문을 올리게 된 배경에서는, 당의 사관 오긍(吳兢)이『정관정요(貞觀政要)』를 편찬하여 당 현종에게 올린 일을 상기시키며 자신의 상소문도 같은 맥락에서 보아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다음 오조(五朝)의 치적평(治績評)을 보면, 태조에게서는 넓은 도량과 포용력과 혜종의 왕족 간의 우애, 정종의 경우에는 사직을 보전하려는 충정을, 그리고 광종이 엄격하게 지켰던 공평무사함을 높이 평가했고, 경종에게서는 그 현명한 판단력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각왕들의 잘못된 점도 거론하면서 그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안 된다고 경계하기도 하였다.
최승로는 한편 이상적인 군주의 상을 태조에게서 찾았다. 태조는 심원한 계책, 타인에 대한 포섭력, 인재를 등용하고 회유하는 역량, 그리고 예양심(禮讓心)과 넓은 도량을 두루 갖춘 군주라고 높이 평가하면서, 성종에게 그러한 태조의 재덕(才德)을 겸비하기를 요망했다. 군주는 신하들을 예로써 잘 대접하고 공경하는 한편, 참언을 멀리하고 사악한 자는 주저 없이 제거할 수 있는 넓은 포섭력과 깊은 통찰력을 가져야 하며, 동시에 유교적 가치관을 실현할 수 있는 정치를 베풀어야 한다고 했다. 왕권이 지나치게 강대해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직언하였다. 왕권과 신권(臣權) 중 어느 한쪽으로 권력이 집중되어 독주하게 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특히 광종과 같은 전제주의적인 군주를 적극 반대하였고, 아울러 권신에 의해 정권이 독점되는 것도 맹렬히 비판하였다. 정치형태로서는 중앙집권체제를 강조하여 지방에 상주하는 외관(外官)을 파견할 것과 지방의 호족세력을 억제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하였다.
가장 중요한 시무책은 원래 28조였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22개조뿐이다. 내용은 크게 6부분으로 나뉜다. 북방의 중요한 곳에 요새를 설치하고 그 지역 토박이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여 경군(京軍)의 수고를 덜 것 등을 주장하는 군제(軍制)의 개편 및 국방력의 강화, 과다한 불교행사의 중지 및 우상 철폐와 승려의 궁중출입을 금하도록 하고 반면 유교적 왕도정치의 시행, 왕으로서의 올바른 처신, 사무역 금지 등의 경제문제와 중국에 보내는 사신의 숫자를 줄일 것과 같은 외교문제, 12목 설치와 지방 균등화, 엄격한 신분제도의 확립 등의 주장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지방행정조직의 정비와 중앙관제의 개편 및 국립대학격인 국자감의 설치 및 각 지방에 학교를 설립하고 전국 12목에 경학박사를 파견하는 등 교육제도의 개혁은 지금도 본받아야 할 시책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지방 토호(土豪)들의 횡포로 인한 세공(歲貢) 수납의 폐해를 시정토록 12목(牧)을 설치하고, 목사(牧使)를 상주시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도록 한 것은 당시로서는 꼭 필요한 정책이었다고도 할 수가 있겠다.
귀족관료들의 권위와 특권을 강하게 옹호하는 등 엄격한 신분관을 주장한 점, 광종 때 실시했던, 본래 양민이었던 노비는 신분 조사 후 다시 양민으로 만들어주는 일종의 노비해방법인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의 중단을 강력하게 내세운 점 등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바람직하지 못한 시무책이라 보이기도 한다.
언제, 어디에서나 시행착오는 있게 마련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