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23) 젊었을 적부터 동료들이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못했던
경북 인물열전 (23)
젊었을 적부터 동료들이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못했던 이제현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1. 慶州府 人物條]
이 웅 재
15세에 성균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또 병과에도 뽑혔던 이제현(李齊賢:1287-1367)은 ‘아직 학문이 부족하다’면서, 문을 닫아걸고 공맹? 사마천? 한유 등을 파고들어 문장을 짓는 데 이미 노숙한 기상이 있었다. 용재총화 권1에서도 그의 글을 ‘노건(老健)하다’고 평하고 있다. 그런 면모 때문에 동료들도 감히 그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익재(益齋)라는 호로 불렀다.
자는 중사(仲思), 초명은 지공(之公)이며 정승 전(?)의 아들이다. 충선왕이 연저(燕邸)(고려 국왕은 원나라 황실과 혼인하여 사위가 아니면 외손이 되므로 북경[燕京]에 저택이 있어서 한동안 거기서 지냈었다.)에 있을 때 궁원(宮苑)에 만권당(萬卷堂)을 지어놓고, “이곳 선비들은 모두 천하의 일류들인데, 내 부중(府中)에는 그런 사람이 없으니 수치다.” 하면서, 제현을 불러들였다. 그리하여 요수(姚燧)ㆍ염복(閻復)ㆍ원명선(元明善)ㆍ조맹부(趙孟?) 등과 교유하게 되어 그의 학문은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벼슬이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옮겨지고 서촉(西蜀)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는 가는 곳마다 그가 읊은 시가 인구에 회자되었다. 때문에 갑자기 선부전서(選部典書; 銓曹 [인사 담당], 兵曹, 儀曹 [의례, 교육, 과거 등을 관장]를 합쳐 설치한 관아의 우두머리)로 승진되었고, 충선왕이 강남에 강향사(降香使; 불사에 향을 내려주는 사신)로 갈 때에도 따라갔다. 왕은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 흥이 일 때마다, ‘이런 곳에 이생이 없을 수가 없다.’ 면서 제현을 찾았다.
충선왕이 일찍이 제현에게 물었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문물이 중국과 비슷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공부하는 자들이 모두 중들을 따라서 글을 배우고 있으니 무슨 까닭인가?”
“…불행하게도 의종 말년에 무인들의 변(1170년의 정중부의 난을 말함)이 일어나서…(문인들 중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숨어서… 평생을 지냈습니다. 나중에 문치(文治)를 회복했지만, 배우고자 해도 배울 곳이 없으므로, 할 수 없이 이들 중에게 배우게 된 것입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왕명의 출납과 궁궐의 경호 및 군사 기밀 따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밀직사에 속한 종이품)와 단성익찬공신(端誠翊?功臣)의 호를 내리고, 상으로 밭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뒤에 다시 원 나라에 갔을 때, 원 나라가 우리나라를 한 성(省)으로 만들려 하였다. 이에 제현이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서 그 논의를 중지시켰다. 충선왕이 토번(吐藩;티베트)으로 귀양가게 되었을 때에는 제현이 최성지(崔誠之)와 함께 원 나라의 낭중(郞中)과 승상(丞相) 배주(拜住)에게 글을 올려, 얼마 뒤에 황제가 타사마(朶思麻;지금의 감숙성 임요[甘肅省 臨?] 부근) 지방으로 양이(量移;먼 지방으로 귀양 등을 간 사람을 가까운 지방으로 옮김)하게 만들었다.
환국한 뒤, 소인들이 그를 시기하자 자취를 감추고, “낙옹비설(?翁稗說; ‘?’자는 ‘樂’음으로 읽기로 한다. 재목감이 못 되면서도 베어지지 않을 수만 있다면 나무로서는 즐거워할 일이므로 ‘낙’음을 따른 것…. ‘稗’ 또한 ‘卑’로 읽기로 한다. 그 뜻을 살펴보건대 피[稗]는 벼[禾] 가운데서도 낮은 것이다.[서문])”을 지었다.
공민왕이 즉위하여서는 제현을 섭정승(攝政丞)으로 명하여 정동성(征東省)의 일을 권단(權斷;일을 임시로 맡아서 처리하는 일)하게 하였다.
세 번이나 사양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 조일신(趙日新)이 일을 꾸며 모든 고관들을 죽였으나 제현은 벼슬을 내놓고 지냈기에 화를 면하기도 하는 등 선견지명이 있었다. 일신이 주륙당하자 다시 기용되어 우정승이 되었다가 부원군 지공거(知貢擧; 과거 시험관)로서 이색(李穡) 등 인재를 뽑았다. 그 후 벼슬이 문하시중 계림부원군(門下侍中鷄林府院君)에 이르러 치사(致仕)하고 자기 집에서 국사(國史)를 편찬하였다. 뒤에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익재난고(益齋亂藁)”10권이 있는데, 그 권4 ‘소악부(小樂府)’에는 ‘오관산(五冠山)’ 등 가사가 전하지 않는 고려가요 11수가 한역되어 있어, 매우 소중한 자료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의 시론은 전고(典故)를 원용하여 사용하는 이인로의 용사(用事)와 이규보에서 시작되어 최자로 이어지는 창의적인 시작법이랄 수 있는 신의(新意)를 아우르는 용사, 신의 조화론에 바탕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용재총화 권3에 나오는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오랫동안 원 나라에 머물고 있던 충선왕이 귀국하게 되자 그곳 정인(情人)이 쫓아오므로, 연꽃 한 송이를 꺾어 이별의 정표로 주었다. 그러고도 익재를 시켜 가 보게 하니 여자는 며칠 동안 먹지도 못해 말도 잘 하지 못했다. 익재가 돌아와서 아뢰었다.
“여자는 술집으로 들어갔답니다.…”
임금이 크게 뉘우치며 땅에 침을 뱉었다. 다음해 경수절(慶壽節; 왕의 생일)에 익재가 임금께 술잔을 올리고는 엎드려 ‘죽을 죄를 지었다.’며, 그때의 일을 말하니, 임금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경이 나를 사랑하여 일부러 다른 말을 하였으니, 참으로 충성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