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인물열전

경북 인물열전 (24) 너무 잘나서 적이 많았던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거북이3 2008. 5. 7. 00:54
경북 인물열전 (24)
너무 잘나서 적이 많았던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金富軾)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1. 慶州府 人物 條]
이 웅 재
김부식(1075-1151)의 자는 입지(立之), 호는 뇌천(雷川), 시호는 문열(文烈), 본관은 경주이다. 체격이 아주 장대하였으며 얼굴빛은 검고 눈은 불거졌다. 신라 무열왕계의 후예로 증조부 위영(魏英)은 신라 말 태조에게 귀속해 경주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주장(州長)으로 있었다.
그의 가문이 개경의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 근(覲) 때부터였다. 아버지가 국자좨주좌간의대부(國子祭酒左諫議大夫)라는 중앙관서의 중견에까지 오르기는 했으나 경주 출신인 그의 가문으로서는 개경의 명문 족벌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그의 나이 14세 무렵 돌아가셨다. 그들 가문이 빛을 보게 된 것은 편모슬하에서 자란 4형제(富弼, 富佾, 富軾, 富轍[후에 富儀로 개명];부식과 부철은 송나라의 대문호인 소식 형제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가 줄줄이 과거에 급제한 때문이었다. 음서(蔭敍; 공신이나 전˙현직 고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던 일)가 아닌, 당당한 과거 시험을 거쳐 4형제가 함께 등과한 경우는 전무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문재까지 뛰어나서 병마판관을 지낸 부필을 제외한 3형제는 당시 관직 중에서 가장 명예스러운 한림직을 맡기까지 하였다.
김부식은 숙종 때에 급제하여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으며 우사간(右司諫)을 지냈다. 그는 예종이, 사망한 자신의 숙부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비문을 당시의 명신 윤관(尹瓘)에게 의뢰하여 지은 것을, 별로 좋지 않다고 제자들의 입을 통하여 인종의 귀에 들어가게 함으로써, 새로운 비문을 짓기도 하여 재승덕박(才勝德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인종이 즉위하자, 이자겸(李資謙)은 국구(國舅 인종의 외조부)이므로 표(表)를 올려도 신(臣)이라 칭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논이 한창일 때, 홀로 반대하여, 임금으로부터 “옳은 말이다” 하는 조서를 받기도 하였다.
인종 초년에는 박승중(朴昇中)․ 정극영(鄭克永)과 함께 『예종실록』을 편찬하였다. 박승중이 이자겸에게 잘 보이려고, 임금께 이자겸에게 교방악(敎坊樂)을 내리고 이자겸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명명하고자 청할 때에는 그 불가함을 역설하여 관철시키기도 하는 등 권력에도 굴하지 않는 강직함을 보였다.
인종 4년(1126) 이자겸의 난으로 개경의 궁궐이 불에 타버리자, 묘청(妙淸) 일파는 풍수설을 내세워 천도를 주장하면서 술수를 부렸다. 곧, 대동강 속에 기름을 넣은 떡을 가라앉혀 두고 왕을 모시고 뱃놀이를 하였다. 배어나온 기름이 강물 위에서 반짝거리자, “대동강에 서기(瑞氣)가 서렸다는 증거”라고 했는데, 곧 그 잔꾀가 드러나게 되자, 묘청은 1135년(인종 13) 1월 조광(趙匡)․ 유참(柳旵) 등과 함께 난을 일으켜 서경을 수도로 대위국(大爲國) 설립을 선포하였다.
이에 원수(元帥)로서 출정하게 된 김부식은 먼저 개경에 있던 묘청의 동조세력인 정지상(鄭知常)·김안(金安)·백수한(白壽翰) 등의 목을 베었다.
그 후 의종 초년에는 『인종실록』의 편찬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며, 평소 그의 건의에 비협조적이었던 추밀원 부사 한유충(韓惟忠)을 좌천시켰던 바, 인종이 그의 건의를 들어주지 않고, 그와 함께 그의 정적이었던 윤언이(尹彦頤)가 중앙정계로 복귀할 전망이 보이자 정치적 보복을 염려해 세 번이나 사직 상소를 올려 왕의 허락을 받았다. 그 후 왕이 보내준 8인의 젊은 관료의 도움으로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그는 「진삼국사표(進三國史表)」에서 말했다.
“지금의 학사대부는 오경 제자의 책과 중국사에는 널리 통하면서도 우리나라 역사에 대하여는 그 시말을 알지 못하니 유감이다.”
얼핏 주체성을 표출한 자주정신이나 민족주의를 강조한 말로 여겨진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는 대국에 죄를 지었으니 멸망함이 마땅하다."
"신라가 당나라의 연호를 쓴 것은 잘한 일이다."
등의 표현, 그리고 왕의 죽음을 ‘붕(崩)’이 아니고, ‘훙(薨)’을 썼다든가, 발해(渤海)에 대한 기록을 누락시켰다든가 하는 점 등을 보면 사대주의, 모화사상이 두드러진 사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도 의심이 된다. 이런 점이 그에 대한 평가가 상반되게 나타나는 소이이기도 하다.
그는 중국 송나라에서 사신으로 왔던 노윤적(路允迪)의 부사 서긍(徐兢)이 『고려도경 高麗圖經』을 지으면서, 그를 ‘박학강식(博學强識)해 글을 잘 짓는 등 능히 그보다 위에 설 사람이 없다’고 평함으로써 중국에서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한 그에게도 열등의식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 둘 있었는데. 학문으로는 당시의 명관 윤관(尹瓘)의 아들 윤언이요 문장으로는 정지상이었다.
어느 날 예종은 사망한 자신의 숙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비문을 윤관에게 의뢰했던 바, 김부식은 그 비문을 혹평하고 대신 그 비문을 지은 적이 있었다. 그 후 김부식의 주역 강의 때에 그 질의를 윤언이가 맡게 되었는데, 부식은 답변이 궁하여 비지땀을 흘렸다고 한다.
한편, 정지상과의 관계를『낙옹비설(櫟翁稗說)』후집2를 통해서 살펴보자.
지상의 시구(詩句) 하나를 부식이 너무 좋아하여 자기 시로 삼으려 하였으나, 들어 주지 않아서, 그를 묘청의 난에 연루시켜 죽였다고 한다. 나중에 김부식이 꿈속에서,
버들 빛은 일천 실이 푸르고 / 柳色千絲綠
복사꽃은 일만 점이 붉구나. / 桃花萬點紅
하는 시를 짓고 스스로 만족하였더니, 갑자기 공중에서 정지상 귀신이 부식의 뺨을 치면서,
“일천 실인지, 일만 점인지 누가 세어 보았느냐, 왜,
버들 빛은 실실이 푸르고 / 柳色絲絲綠
복사꽃은 점점이 붉구나. / 桃花點點紅
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고 김부식을 꾸짖었다고 한다.
부식은 지상을 죽였고. 죽은 지상이 부식을 우롱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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