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인물열전

경북 인물열전 (26) 남의 글 불태워 놓고 정작 그 대신할 글 쓰지 못해 통

거북이3 2008. 7. 5. 21:35
 

경북 인물열전 (26)

남의 글 불태워 놓고 정작 그 대신할 글 쓰지 못해 통곡했던 김황원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8. 慶尙道 星州牧 名宦 條]

                                                                 이   웅   재

                                                                

 학사 김황원(金黃元)이 하루는 대동강안(大同江岸)의 부벽루(浮碧樓)에 올랐다. 부벽루에서 바라다보는 대동강은 가슴을 확 트이게 했다. 공자(孔子)의 호연지기(浩然之氣)는 태산(泰山)에 올라서만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누를 한번 휘둘러보았다.    누에는 옛날과 이제 사람들이 써 놓은 많은 시들이 현판에 씌어 있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마음에 흡족하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현판을 무두 떼어 불태웠다. 가슴에 벅차오르는 환희를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시구(詩句)로 표현해 보리라 다짐하였다.


  長城一面溶溶水(긴 성 한 쪽으로는 넘실넘실 강물이 흐르고,)

  大野東頭點點山(큰 들 동쪽 끝에는 점점이 산이로세.)


 선경(先景)은 멋지게 묘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현판을 태운 연기 냄새가 다 사그라지도록 도통 후정(後情)이 이어지질 않는 것이었다. 종일토록 난간에 기대어 괴롭게 시상을 떠 올렸으나 허사였다. 해거름 무렵, 그는 결국 통곡을 하고 떠나갔다.

 서거정(徐巨正)의 『동인시화(東人詩話)』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예전에는 초등학교였던가 중학교의 교과서에 나온 이야기라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일화가 되어 버렸었다. 홍만종(洪萬宗)의 『시화총림(詩話叢林)』에 나오는 임경(任璟)이 찬(撰)한 『현호쇄담(玄湖瑣談)』을 보면 조선조의 대문장가인 서사가(徐四佳; 徐巨正)가 일찍이 이를 보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는데, 실제로 부벽루에 올라 그 경치를 읊으려 하고서야 김황원의 미완의 『부벽루』가 절창 중의 절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김황원, 본관은 광양(光陽), 광양김씨(光陽金氏)의 시조(始祖)로 광산김씨(光山 金氏)의 시조 김흥광(興光) 의 후손이며, 자는 천민(天民),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 · 한림학사(翰林學士) 등을 지냈다. 고시(古詩)로 이름을 떨쳤고, 청렴 강직하여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다. 문장이 '해동의 제일'이라 추앙받았고, 성품이 깨끗하고 굳세어 권세에 따르지 않았다.

 그는 거란의 사신이 왔을 때, 궁궐 안 잔치에서, “봉새는 윤발(綸綍 임금의 조서)을 입에 물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자라는 봉래산을 타고 바다를 건너왔네(有鳳含綸綍從天降,鼇駕蓬萊渡海來)."라는 글귀를 즉석에서 불러서, 거란 사신이 놀라고 감탄하여 그 시의 전편을 구하여 적어 갈 정도로 문장에 뛰어났다. 그러나 고문체에는 능하나, 당시에 유행하는 문체를 너무 도외시 하니, 재상 이자위(李子威)가 “이자가 오랫동안 문한의 자리에 있으면 반드시 후생을 그릇되게 할 것이다."고 하면서 위에 아뢰어 배척하였다. 후에 외직으로 경산부사(京山府使)가 되어서는, 백성들에게 은혜스러운 정사를 베풀었다.

 숙종이 연영전(延英殿)을 개설하고 황원을 불러 서적을 관리하게 하고서는, 책을 보다가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질문을 하는데, 그 이름을 부르지 않고 ‘선배’라고 부르곤 하였다.

 예종 때에는 요 나라에 사신으로 간 적이 있었는데, 도중에서 북쪽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게 된 것을 보았다. 이에 역마를 달려 상서하여 창고의 곡식을 풀어 구제하기를 청하였는데, 돌아올 때에는 백성들이 그를 보고, “이분이 우리를 살려 준 상공(相公)이다."라고 칭송하였다. 귀국 후 국자좨주(國子祭酒) ·추밀원첨서사(樞密院簽書事)를 역임했다.

 후에 여진이 요 나라를 침략하여 동쪽 지방의 여러 성을 모두 항복받았으나, 오직 내원(來遠)ㆍ포주(抱州) 두 성이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는데 식량이 다되었다. 물품을 가지고 값을 감하여 우리나라에서 곡식을 사 가려 하였는데, 국경 지방의 관리들이 만간인이 요 나라와 무역하는 것을 금하였다. 이에 황원이 상소하였다. “남의 재앙을 다행히 여기는 것은 인(仁)이 아니요, 이웃 나라를 노하게 하는 것 또한 의(義)가 아닙니다. 두 성(城)에 양곡을 팔고 겸하여 서로 무역하기를 허락하도록 하옵소서." 그러나 답이 없었다.

 한편 그는 성질이 검박하지 않았고, 음악과 여색을 좋아하기도 했다. 죽은 뒤에 예부낭중 김부식이 시호 주기를 청하였으나, 요직에 있는 자로서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 그 당시에는 무산되고 나중에야 시호를 받았다.

 그의 다른 일화 한 토막. 그는 선종(宣宗) 때에 부사가 되었는데, 아전이 살인 강도자를 잡아 왔는데, 황원이 한참 동안 그를 살펴 보더니 말하였다.

 “이자는 도적이 아니다.”

하면서, 빨리 석방하라고 하였다.

 판관 이사강(李思絳)이 극구 주장했다.

 “이 도적이 이미 모든 걸 시인하였으니 마땅히 그 죄를 다스려야 한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뒤에 다른 도적이 잡혔는데 문초하다 보니 그가 바로 살인한 자였다. 아전과 백성들이 그 신명(神明)함에 탄복하였다.


 부벽루(浮碧樓) 시에는 목은공(牧隱公)의 것도 있는데, 한 번 비교해 보자.


어제는 영명사를 지나, (昨過永明寺)

오늘 부벽루에 올랐네. (今登浮碧樓)

성은 비었는데 달은 한 조각이요, (城空月一片)

바위는 늙었는데 구름은 천추로다.(石老雲千秋)  <松溪漫錄 上>


                                 (08.7.5. 원고지 15매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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