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국내)

두루뫼 다음으로 왕릉

거북이3 2008. 10. 17.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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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루뫼 다음으로 왕릉

                                             이   웅   재

 가끔 주객이 전도되는 일들이 벌어진다. 10월 7일의 나들이가 그렇다. 성남문화원 고전강독반에서 오래간만에 나들이를 했다. 목적지는 파주에 있는 두루뫼박물관. ‘키 작 야생화위로 가을 햇살이 살짝 스쳐지나가는 것이 보인다.’는 지송 님의 사진 설명은 그대로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시구로 남아있는가 하면, 물꽃나무 총무님이 카페에 올린 사진 설명대로 ‘옛날 우리 부모님들이 사용하며 생활했던 가구며 생활 용품들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너무 반갑고 새로웠다. ‘아주 어렸을 때 보았던 것들도 있어 잠시스쳐지나가는 추억에 젖어보기도 했다.’는, 총무님 말에 보태어, 내게는 대학시절 때 문우회 회원으로 지면이 있었던 관장님을 만나보니 더욱 그 옛 물건들에게서 오래 묵은 편안한 친근미가 느껴지고 있었다.

 기호대로 커피나 녹차 한 잔씩을 대접받으며 박제가 된 소에서부터 과거의 기억으로 되돌아가는 여행은 마냥 즐거웠다. 쟁기와 긁쟁이, 부리망…등등, 예전엔 몰랐는데 그런 물건들을 보는 순간, 그 이름마저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열심히 메모하는 학구파의 고강 회원님들, 온갖 탈 앞에 서 계신 모습들은 그대로 또 하나의 살아있는 탈이었고…. 아니, 저 사진은…. “작품이죠? 우 선생님은 뭘 그렇게 고민하시고 계실까요? 나라와 경제? 멋지십니다.” 총무님의 촌평이 그대로 생생한 현장 스케치였다.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점심시간이 훨씬 넘어서다 보니 모두들 허기진 뱃속을 채우잔다. 맛있는 집이라고 물어물어 찾아간 집은 휴업, 기대가 허물어지다 보니 배는 왜 더 고파오는지…. 말 그대로 초근목피의 6․ 25까지도 거뜬히 버텨 오신 분들이 초기(初飢)에 걸렸다고들 야단이시다.

 우리 회장님께서 그 지방 기름종이[油紙 →有志]에게서 명함까지 받아가지고 찾아간 집은 ‘임진강 매운탕’. 시장이 반찬이라, 그 집 음식을 천하의 진수성찬으로 평가를 내리고 곁들인 소주 기운에 얼큰해진 상태로 다음 행선지를 갑론을박하다 보니, 이미 지나온 자운서원(紫雲書院; 율곡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서원)은 탈락하고, 이정표에 보이는 경순왕릉으로 행선지를 정하고 달렸다.

 그런데 누구 하나 길을 아는 사람은 없었고, 그저 이정표만 보며 달리다 보니 우리의 가는 길을 군부대가 가로막는다. 우리는 아마도 부대 안쪽에 능이 있나보다 생각하고 그대로 전진하는데, 초병이 칼빈총을 들이대며 막는다. 낭패, 낭패였다. 차창 유리를 내리고 ‘경순왕릉’을 외쳐댔더니, 어린 초병, 왕릉은 조금 지나왔단다. 할 수 없이 차를 돌리는데, 초병이 다시 우리 차를 막는다. 돌아서 나가는데 뭐가 또 잘못됐지, 모두들 궁금증으로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데, 우리 기사님 왈, “담배 있음 몇 개비 달라는데요.” 뚱딴지같은 멘트를 발하는 것이었다.

 우리 정선생님께서 조금 전에 산 담배갑에서 성큼 대여섯 개비 빼어주고, 회장님은 우리가 먹다가 남은 떡도 몇 봉지 차창 밖으로 내어주니, 어린 초병들, 고맙단다. 그 소리를 듣는 차 안의 모든 늙다리 남녀들은 제 자식이나 되는 듯이 안쓰러운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며 일견 흐뭇한 표정들이다.

 경순왕릉으로 갈라져 들어가는 길 입구에 조그마한 구멍가게가 있기에 차를 잠깐 세우고 소주 한 병과 초콜릿 서너 봉지를 샀다. 안주 감으로 할 것이 별로 없어서였다. 왕릉에 도착하니 경외(境外)에 호화로운 제단이 보인다. 고려 태조 왕건의 딸이며 경순왕비인 낙랑공주(樂浪公主)의 아들 대안군(大安君)의 제단이란다. 무덤은 찾을 수가 없어 이처럼 제단만 조성해 놓았다는 것이다. 나중에 본 경순왕릉보다도 호화롭지 싶었다. 아마도 그 후손들이 제대로 번창한 모양이다. 얼마 전에 고려 제일의 문사였던 이규보의 묘소를 돌아보고 느꼈던 쓸쓸한 심회가 여기서 다시 느껴진다.

 경순왕은 나라를 패망하게 한 군주가 아니다. 그는 서라벌[경주] 이외의 지방에는 왕권이 미치지 못하는 당시 상황에서 뭇 사람들의 생명을 소중히 지키려는 뜻에서 왕건에게 손국(遜國)을 한 것이었다. 자신의 권력만 탐하는 군주이었다면 그와 같은 결단은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그의 무덤 앞에서 술 한 잔을 올렸다. 안주는 비록 초콜릿이었지만…. 아마도 나 때문에 초콜릿 맛을 보게 된 경순왕께서는 고맙다고 하실지도 모르겠다.

 경순왕은 첫 부인인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에게서는 흔히 마의태자로 불리는 일(鎰; 부안김씨의 시조), 황(湟; 경주김씨의 시조), 명종(鳴鍾; 경주김씨 永芬公派의 시조)의 세 아들과 딸 하나(德周공주)를 두었고, 둘째 부인인 낙랑공주와의 사이에서는 은열(殷說; 경주김씨 은열공파의 시조. 바로 이곳 화려한 제단의 주인공인 대안군), 석(錫; 의성김씨의 시조), 건(鍵; 강릉김씨의 시조), 선(鐥; 언양김씨의 시조), 추(錘; 삼척김씨의 시조)와 2녀, 그리고 낙랑공주의 금강산 입산 후 순흥안씨(順興安氏)를 맞아서는 아홉 번째 아들 덕지(德摯; 울산김씨의 시조)를 얻었던 바, 그들 대부분이 김씨 분파의 각 시조가 되었던 것이니, 진실로 대단한 인물이라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정자각도 혼유석(魂遊石)도 없는 능묘, 나는 거기에 술을 따르고 4배를 했다. 석양(石羊)이2, 망주석이 2, 그리고 장명등(長明燈) 1, 그것이 전부인 초라한 왕릉에서 나는 경순왕의 고뇌를 함께 느꼈고, 그래서 경순왕에게 따라주고 남은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내려오다 보니 정선생님께서 담배를 피우신다. 아, 담배도 함께 놓아 드릴 걸…, 잠깐 후회가 앞선다. 그래, 그렇지, 담배는 임진왜란 전후에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으니, 그 맛을 경순왕이 알 리는 없지.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따라준 소주도 신라 당시엔 없었고 안주감인 초콜릿도 영판 낯선 물건들이었겠지만, 그래, 그렇지, 그런 걸 내가 아니었더라면 언제 맛볼 수가 있었을꼬? 왕릉에서 내려오는 길에서는 계속하여 경순왕의 고맙다는 말을 듣느라 걸음이 느려지고 있었다.

 경순왕, 아마도 오늘 밤, 그 소주맛과 초콜릿맛을 다시 맛보고 싶어서 내 꿈속에 우아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을는지…. 아무래도 오늘밤엔 침대 시트를 한번쯤 깨끗하게 단장하고 자야할까 보다.

                  (글만으로는 16매 정도. 08.10.16.)











두루뫼 박물관에서

경순왕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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