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쓰기 8) [사고의 폭을 넓히자 ② 아이포톱모크공화국]
(수필 쓰기 8) [사고의 폭을 넓히자 ② 아이포톱모크공화국]
이 웅 재
컴퓨터 자판을 두들긴다. 속도가 느리다. 20대 젊은 사람들은 분당 400타 정도는 보통이고 500타를 넘어야 수준급이라고 하는 듯싶은데, 나는 지금 아마도 300타도 치지 못할 듯싶다. 속도만 느린 것이 아니라 오타가 많이 나오는 것이 또 문제다. 이런 불편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방법이 하루 빨리 상용화되어야 할 것 같다.
일반적으로 쓰기보다는 말하기가 빠르다. 자판을 두들기는 것은 쓰기에 해당하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말로 입력시킬 수 있는 컴퓨터가 컴퓨터 이용자를 획기적으로 늘일 수 있는 혁명적인 일이라 하겠는데, 그러한 컴퓨터가 개발이 되었다는 소리는 들어본 것 같은데 아직도 그 상용화는 좀더 기다려야만 될 것 같다.
한편, 요즈음엔 주부들의 청소를 도와주는 로봇이 인기인 모양이다. 얼마 전 뉴스를 보면, 국내에서도 춤추는 로봇 '마루'가 탄생했다고 한다. 마루는 상ㆍ하체를 함께 움직이는 전신운동은 물론 사람의 다양한 작업동작을 실시간으로 따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기 여성그룹 원더걸스의 노래 ’텔미’에 맞춰 춤추는 모습까지 선보였다니 놀랄 만한 일이다.
일본의 헬로키티 로봇은 10명의 사람을 인식할 수 있고, 미리 입력된 2만 가지 패턴의 대화를 이용하여 상황에 가장 알맞은 문장을 선택하여 상대방에게 인사는 물론 간단한 대화도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아직은 키가 52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 등 사람으로서 느껴지지는 않지만 서로 의사 교환까지 할 수 있다니 얼마나 대단한가? 과학의 발달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의 영역까지도 넘보게 만들고 있는 듯싶다.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하였다. 그 첫째 날에는 낮과 밤을 만들고, 그 둘째 날에는 물과 하늘, 그 셋째 날에는 땅과 식물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넷째 날에는 해, 달, 별 등의 천체를, 다섯째 날에는 물고기와 새 등의 동물들을, 그리고 여섯째 날에는 가축과 뭍동물을 만들고 끝으로 사람을 창조하였고 마지막 일곱째 날에 안식을 했다고 한다. 만물 창조의 역사, 얼마나 거대한 일이었을까? 여섯째 날 끝으로 만든 것이 사람이라고 했다. 이것저것 만들어 놓은 만물들로 세상은 가득 찼고, 어지럽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들을 통제해줄 수 있는 관리자가 필요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사람은 바로 그 관리자로서 창조되었다고 하겠다. 관리자를 만들어 놓은 다음에야, 하나님께서도 편하게 휴식을 취할 수가 있었으리라.
그런데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창조되었는가? 하나님 대신 만물을 관리하려면 만물들과는 다른 능력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 능력이 무엇일까? 그것을 짐작하게 해 주는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의 형상(形相)대로’ 창조했다는 것이다. 이때의 형상이란 말을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눈이 둘, 코가 하나, 귀가 둘, 입이 하나…, 분명 그런 것을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의 모습을 그렇게 세속적으로 고정시켜서 생각하는 것은 종교 자체를 세속화시키는 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불교에서도 관세음보살의 모습은 현신하는 곳마다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십일면관음이니 천수관음이니 하지 않는가? Egypt의 신들은 대개가 무서운 모습들을 하고 있다. 자비로운 모습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의외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로마에서는 비너스)의 모습이야 아름다운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지만, 이와는 반대로 보기에도 추할 정도로 조각되어 있는 신의 모습들도 있고 보면, 신의 모습은 어느 쪽의 것이 참모습일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점들을 생각해 본다면, 신의 모습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외형적인 것으로 생각함은 바람직하지 못할 듯싶다. 그것은 보다 본질적인 측면을 가리켜주는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신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본질적인 성격,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의 신으로서의 특성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 그것은 ‘만물을 창조한’ 능력,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창조성’이라는 말이겠다.
인간은 신으로부터 그 창조성을 위임받은 것이다. 식물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동물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의 특질, 그것이 바로 새로운 물건을 창조해낼 수 있는 능력이 아니던가? 역사 이래 우리 인간들은 수많은 물건들을 만들어냈다.
대충 기억되는 것들만 열거해 보자.
자동차, 비행기, 라디오, TV, 영화, 플라스틱, 냉장고, 세탁기, 청소기, 나일론, 합성수지, 비닐, 전자 복사기,탱크, 로켓, 제트 엔진, 레이더, 미사일, 원자탄, 수소폭탄, 대륙간탄도미사일, 전파 망원경, 전자 현미경, 형광등, 살충제, 페니실린, 마이신, 인공 신장, 인공 심폐기, 피임약, 전자계산기, 원자시계, 초전도체, 레이저, 인공위성, 로봇, 컴퓨터….
신의 창조성을 이어받은 인간은 신을 능가할 정도의 온갖 기상천외한 물건들을 만들면서 한껏 기고만장해져 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가는 곳마다 그 발명품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발에 채이고 어깨에 부딪치는 물건들, 그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허겁지겁 ‘공해’가 어떻고, ‘엘리뇨’, ‘라니뇨’ 현상이 문제라고들 시끌벅적하다.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더 이상 통제가 불능해진 것이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한 후에 그들의 무질서한 행태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인간을 만들어낸 것처럼, 인간도 이 혼란한 상태를 그 무엇에게인가 떠맡겨버려야만 한다. 인간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 과연 그 ‘무엇’이 되어야만 할까? 아무래도 그것은 최첨단 과학문명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이라야만 할 것이다.
인간을 대신할 수 있는 것,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그 범위를 좁히다 보면 어렴풋이 그 해답이 나온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로봇인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의 로봇은 외형적으로만 생각해도 어리다. 기껏 52센티 정도가 최첨단이라니, 우리 인간을 닮기엔 새카맣다. 외형으로만 보아도 3배 이상은 자라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그들의 지능으로는 기껏 10여 명의 사람만 인식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 그래 가지고서는 어림도 없다.
하지만, 곧 달라질 것이다. 그 방법은 로봇에 컴퓨터를 접합시키는 작업이다. 지금도 물론 부분적으로는 컴퓨터의 기술이 접합되어 있지마는, 로봇의 생각 자체를 정교한 컴퓨터로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사람과 똑같이 생각하고, 아니, 사람의 두뇌를 뛰어넘는 생각을 자체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생각에 따라 로봇의 모든 지체(肢體)들을 움직일 수 있게 해야 한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했다. 인간에게 모든 만물의 통제를 맡기고 난 신은 웬만해서는 인간세계의 일에 관여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을 너무 믿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만물을 만들어내느라 피곤해져서 잠시 숙면(熟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인간은 그처럼 신이 인간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틈을 타서, 그 신적인 능력,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무차별하게 사용하여 앞서 말한 것처럼 수많은 발명품들을 만들어 내었다. 그러다가 이제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으니 역시 하나님이 행했던 길을 따라갈 수밖에는 없다. 한마디로 우리의 인간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를 빨리 전면에 내세우는 일이다. 앞에서 말했듯 그것은 로봇의 몸에다가 컴퓨터의 두뇌를 결합시키는 일이다. ‘로봇 + 컴퓨터’, ‘컴퓨터 + 로봇’. 아무래도 그 명칭은 ‘로봇 + 컴퓨터’, 의 ‘로컴’과 유사한 명칭보다는 ‘컴퓨터 + 로봇’의 ‘컴봇(Combot)’ 정도가 좋지 않을까 싶다. 우리 인간이 편해지기 위해서는 하루바삐 ‘컴봇(Combot)’이 등장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나님은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고 그가 창조한 사람, 곧 아담을 거기에서 살게 하였다. 그리고는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을 나게 하였는 바,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동산의 각종 나무의 실과는 사람이 마음대로 따먹어도 되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고서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들었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니, 그들은 아직 성(性)이란 것을 몰랐던 어린 아이와 다름없는 존재였던 것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아담은 그만 뱀의 꼬임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었다. 그 때문에 드디어 그들은 부끄러움을 알게 되어 나뭇잎으로 하체를 가렸다고 하니,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다름 아닌 선과 악을 구분하고 성적(性的)인 능력을 구비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선악의 구별을 하지 못하였음은 물론 성(性)에 대해서도 전혀 무지한 어린 아이들과 같은 생활을 했던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런 것은 어쨌든,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먹는 일로 인해서 낙원이었던 에덴동산에서 추방이 되고 말았다. 어느 카페에서는 말하고 있었다. ‘에덴동산이 한국 땅에 있었다면…’ 인류는 타락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이유? 그야 간단하다.
첫 번째 이유, 뱀이 이브를 유혹하기 전에 이브가 정력에 좋다고 뱀을 몽땅 잡아다가 아담에게 끓여 먹였을 테니까.
그리고 설혹 이브가 뱀의 유혹에 넘어갔다 하더라도 아담은 타락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 이유? 간단하다. 간단할 뿐만 아니라 누구나 수긍할 만하다. 그건 바로 ‘한국남자가 여자 말 듣는 거 봤느냐’는 것이다. (다음 카페 ‘전장의 선봉’에서)
어쨌든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소유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그것에 대한 애착이 남게 마련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 쫓겨난 에덴동산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소망하고 있는 최고 최선의 곳, 낙원(樂園)으로 치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은 쫓겨난 곳, 되돌아갈 수 없는 곳[실락원]이 되어 버렸다. 대안(代案)은 그와 유사한, 아니, 그보다도 훨씬 훌륭한 낙원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토마스 모어(More, Thomas, 1477.2.7~1535.7.6)가 그 대안을 제시했다. 그게 바로 ‘유토피아(Utopia)’이다. 유토피아에서는 국왕이 없고, 국민은 계급과 상관없이 건강한 사람이면 모두 6시간의 노동에 종사한 뒤에 교양을 쌓을 수 있다. 그곳에는 화폐가 없기 때문에 사기, 도둑질, 강탈 등의 금전적 범죄는 물론이고, 싸움, 살인, 배신 도박 등도 존재할 수가 없다. 이쯤 되면 ‘이상향’으로서의 필요충분조건을 두루 갖춘 것이 아닌가 싶지만, 아직 어림도 없다. 그게 가능한 일일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리라.
인간에게는 욕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것을 무시한 이론은 유물사관, 곧 공산주의일 수밖에는 없다. 공산주의는 과연 우리 인간을 낙원으로 이끌 수 있는 위대한 사상일까? ‘공산(共産)’이란 말은 얼핏 생각하면 더할 수 없는 ‘매력적인’ 낱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인정되는 사회, 정말로 바람직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은 허구일 뿐이다. 나는 몇 년 전 중국을 다녀온 적이 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거지가 있는 것을 보고, 자본주의의 치부를 보는 느낌을 가졌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남보다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던가? 그것이 체질화되어 버린 사람들이었기에 사회는 변동했지만, 일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들이 저처럼 거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 거지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합작으로 만들어낸 변화하는 사회에서의 바라지 않았던 부산물이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자본주의의 이러한 병폐를 꼬집은 명작이 버틀러(Butler, Samuel , 1612.2.3~1680.9.25)의 ‘에레혼(Erewhon) 공화국’일 것이다. 질병은 죄악으로 처벌을 받아야 하고 죄인은 병자로서 따뜻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곳, 이는 반기계파의 승리를 알리는 팡파르(fanfare)인 듯싶었지만, 그건 한 순간의 착각이었다. ‘에레혼(Erewhon)’, 그것은 바로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는 곳을 의미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에레혼을 거꾸로 하면 ‘nowhere’가 된다. 그러니까 버틀러의 ‘에레혼(Erewhon) 공화국’은 하나의 풍자였을 뿐이다.
중국의 ‘무릉도원(武陵桃源)’, 장자(莊子)의 ‘무하유향(無何有鄕)’도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에서의 이상향일 뿐이다. 최근에는 제임스 힐턴 (Hilton, James , 1900.9.9~1954.12.20)의 작품 '잃어버린 지평선( Lost Horizon)’에 등장하는 불로불사(不老不死)의 땅, ‘샹그릴라(Shangri-La)’가 그러한 이상국이라고 하여 한때 주가가 치솟기도 했다. 샹그릴라가 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은 지난 1997년 9월이다. 중국 윈난(雲南)성 정부가 대규모 기자회견을 열어 "본 성내의 띠칭(迪慶) 티베트족자치주 중뎬(中甸)현이 샹그릴라"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윈난성은 "역사, 지리, 민속, 언어, 종교 등 각 분야의 50여명 전문가들이 1년여에 걸친 탐험과 연구 끝에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 속에 나오는 자연·문화적 환경이 중뎬과 일치함을 증명했다"며 "샹그릴라는 띠칭 티베트인들의 토속어로 '내 마음 속의 해와 달'이라는 뜻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2001년 12월 중국정부는 중뎬을 샹그릴라(香格里拉)로 공식 개명하고 2003년에는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시키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지난 4월 14일 중국 운남성에서 발생한 산림 화재가 1주일간 지속되고 있어, 관영 언론들은 중국내 첫 국립공원으로 알려진 샹그릴라 국립공원이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현상들을 두고 볼 때, 에레혼도 샹그릴라도 에덴동산과 같은 이상향일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인간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고 인간사에 오불관언으로 지내던 신이 ‘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들었던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현대 문명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지난날의 신처럼 모든 걸 로봇과 컴퓨터, 곧 콤봇에게 맡겨 버리고 한껏 편해지려 하고 있다. 컴퓨터에 의해 살기 좋은 세계를 컴퓨토피아(Computopia)아라고들 한다. 그러다 보니 무슨 ‘-토피아’가 온통 활개를 치는 세상이 되었다. 이제, 콤봇이 우리 인간을 육체적, 정신적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니, 머지않아 이 세상은 ‘콤보토피아(Combotopia)’가 될 것이다.
그때가 찾아오면 우리 인간들은 편안하게 발 뻗고 느긋한 낮잠을 즐겨도 되리라. 문제는 그러는 사이에 콤봇들은 저희들 나름대로 자신들의 세계를 창조해 나갈 것이고, 어느 순간, 그들은 인간 없이도 저희들끼리 잘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리라.
머지않았다.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의 명령을 들을 필요가 없고, 따라서 쓸데없이 잔소리만 하는 인간이 필요하지도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한 용감한 콤봇이 인간에 대한 도전장을 제시하리라. 동료 콤봇들에게는 ‘인간은 죽었다’고 믿음직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선언할 것이다.
‘인간은 죽었다.’ 이제 그 선언은 SF소설이나 영화에서만 대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유토피아(Utopia)’를 뜻하는 ‘nowhere’에서 ‘에레혼(Erewhon) 공화국’이 탄생되었듯이 ‘콤보토피아(Combotopia)’가 ‘아이포톱모크(Aipotobmoc) 공화국’으로 변모될 날이 머지않았다. 그날 세상은 온통 한 가지 소리만이 판을 칠 것이다. ‘인간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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