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쓰기 11) [해학, 골계, 풍자]
(수필 쓰기 11) [해학, 골계, 풍자]
이 웅 재
나는 ‘재미없는 수필, 이대로 두어도 괜찮은가?’에서, 퓨전적 장르라고 할 수 있는 수필에 재갈을 물리려 하지 말자고 했다. 수필을 수필 되게, 수필답게 만들어주기 위해서 사실성을 바탕으로 한 허구성도 허용하자고 했다. 그래야 재미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이 ‘해학(諧謔;humour)’일 것이다.
이태준(李泰俊)도 “문장강화(文章講話)”에서, “수필이란…솔직하기 때문에 논문보다 오히려 찌름이 빠르고 날카롭고, 형식에 잡히지 아니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시경(詩境)이나 가벼운 경구, 유머가 적나(赤裸)하게 나타나 버린다.” (이태준 저. 장영우 주해. 아버지가 읽은 문장강화. 깊은샘. ’97. p.190.)고 했다.
그런가 하면 피천득(皮千得)도 ‘수필’이라는 수필 작품에서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그 무늬는 읽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한다.”(피천득. 수필)고 했는데, 그 ‘무늬’에 해당하는 것이 ‘해학’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본래 유머는 중세 및 르네상스 시대의 생리학 용어였다고 한다. 개개인의 기질과 관계되는 체액(요즈음의 호르몬 같은 것)을 뜻한 것으로서 그것이 과다하면 그 사람의 기질의 한 가지가 비정상적으로 발달하여 괴팍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질의 사람을 청중의 웃음을 자아내기 위한 희극에 의도적으로 등장시킨 극작가는 17c 초 영국의 벤 존슨. 괴팍한 기질이 불쾌하다든가 병적이라기보다는 ‘우습고 재미있는 것’이라는 통념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8c 산문문학이 발달하면서부터 유머란 말이 유행되었다. 유머는 유희본능과 관계가 있다. 유희가 아닌 사실 그대로라면 기괴할 뿐 웃고 즐길 수는 없다. 유머는 청중의 기대를 깨뜨릴 때에 성립된다. 단지 기대만 깨뜨리지 않고 동시에 기대하지 않았던 어떤 ‘흥미나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고 한다.
유머는 위트(wit; 機智)와 대조를 이루는 한 쌍으로 붙어 다니는 말이다. 위트는 본래 사람의 다섯 감각을 뜻하던 말로서 차차 두뇌의 기능을 뜻하는 말로 바뀌었고, 르네상스 시대에는 정신능력, 특히 타고난 우수한 두뇌를 뜻했다. 17c에 이르러 위트는 ‘재빠른 두뇌작용’, 식별력, 언어표현능력을 뜻하게 되었고, 18c에 와서 우스운 말의 일종으로 간주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유머는 성격적, 기질적인 것이고, 반면에 위트는 지적인 것이라 할 수가 있다. 따라서 유머는 태도, 동작, 표정, 말씨 등에 광범위하게 나타나지만, 위트는 언어적 표현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 유머는 동료 인간에 대하여 ‘선의’를 가지고 그 약점, 실수, 부족을 같이 즐겁게 시인하는 공감적인 태도이며, 위트는 서로 다른 사물에서 남이 보지 못하는 유사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경구나 격언 같은 압축되고 정리된 말’로서 능숙히 표현하는 지적 능력이다. 따라서 위트는 날카로우나 유머는 부드럽고, 위트는 주관적이고 유머는 객관적이라고 한다. (이상은, 李商燮. 해학과 기지. 文學批評用語辭典. 民音社. ’76. pp.290-292을 정리한 것임.)
청록파 시인 조지훈(趙芝薰)의 해학(諧謔) 이야기를 보자.
조지훈은 4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짧은 생애임에도 주옥같은 시를 많이 남겼다. 그런데 그는 시작품도 훌륭했지만 유머로서도 세상 사람들의 화제꺼리였다.
아호(雅號) 지훈(芝薰)의 유래에 대해 스스로 밝힌 내용이다.
“내 호가 처음에는 ‘지타(芝陀)’였지. 마침 여학교 훈장(경기여고)으로 갔는데, 내 호를 말했더니 학생들이 얼굴을 붉히더군.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니 ‘지타’라는 아호가 뜻이야 아주 고상하지만 성과 합성하니까 발음이 ‘조지타’가 되는데…걔네들이 내 호에서 다른 무엇(?)을 연상했나 봐. 그래서 할 수 없이 "지훈" 으로 고쳤어.”
다음은 해학이라기보다는 위트에 가까운 우스개이다.
하루는 학생들에게 한자의 파자(破字)에 대해 질문하였다.
"달밤에 개가 징검다리를 건너는 글자는?"
"그럴 ‘연(然)’자입니다."
"나무 위에서 ‘또 또 또’ 나팔 부는 글자는?"
"뽕나무 ‘상(桑)’자입니다."
"그럼, 사람이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글자는?"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자네도 참, 그렇게 쉬운 글자도 모르다니.
그건 말이야. 한글 '스' 자라네."
(cafe.daum.net/ds-48. 이덕수 약손경락. 08.11.21 02:33)
다시 해학과 위트를 구분해 보자.
다음은 ‘어느 어린아이의 기도’이다.
“하느님,
왜 한 번도
텔레비전에 안 나오세요?”
(http://blog.daum.net/ilkkim5132)
“연말이 되니, ‘외상값’이 마마 돋듯 한다.” (김상헌. 그믐날. 전게서. 아버지가 읽은 문장강화. p.198.)
그런데 해학과 서로 혼란스러운 것에 골계(滑稽;comic)와 풍자(諷刺; satire)가 있어 주의를 요한다. 한용환은 기지(wit), 풍자(satire), 해학(humour), 반어(irany)의 상위 범주로 설정하여 주로 ‘숭고’(학자에 따라서는 ‘비장’)와 대립하는 미적 범주로 이해한다고 했다. 그는 “한국사상대계 1”에서 조동일은 한국 문학 작품을 비장, 골계, 숭고, 우아 등 네 가지 미적 범주로 설정하고, ‘있어야 할 것’과 ‘있는 것’이 융합되지 않은 채 대립하는 속에서 골계가 발생한다고 했다면서, 골계에는 ‘사나운 골계(풍자)’와 ‘부드러운 골계(해학)’이 있다고 하였다.(한용환. 소설학사전. 고려원. '92. pp.37-39.의 정리)
이러한 논의들을 종합하여 해학, 골계, 풍자를 구분하여 본다면,
*해학; 웃음
*골계; 웃음+ 비판성(弱)
*풍자; 웃음+ 비판성(强)
로 정리할 수 있을 듯싶다. 이렇게 놓고 보면, 비판성이 있다는 면에서 골계와 풍자가 친연성(親緣性)이 있는 듯이 생각되지만, 골계의 비판성은 아주 약하기 때문에 얼핏 없는 듯이도 느껴져 오히려 해학과 골계는 서로 넘나들며 사용되기도 하는 실정이다. 김유정의 작품들은 지금까지는 주로 해학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해 왔으나, 근래에 이르러서는 골계적인 작품으로 이해하는 것 등이 이를 말해준다. 작품 배경이 찢어지게 가난한 농촌이고, 그것은 일제의 가혹한 수탈정책 때문이라는 것을 은근히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골계에 해당하는 ‘지독한 거짓말’이라는 글을 한번 보자.
어느 날, 스님이 시골길을 걷다보니 저 건너편에 세 사람의 농부가 밭둑에 앉아서 무어라 시끄럽게 떠들고 있기에 스님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가까이 다가가자,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스님께 말을 건넸다.
"스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사실은 지금 이 길에서 돈 백 냥을 주웠는데, 제일 지독한 거짓말을 하는 자에게 이 돈 백 냥을 몽땅 주려고 하던 참입니다. 그러니, 스님께서 심판관이 좀 되어 주십시오."
그러자, 스님은 위엄을 갖추며 대답하기를, "나무아미타불, 그건 좋지 못한 일입니다. 거짓말을 하다니 될 말인가요?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세상에 태어나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소."
스님의 말을 들은 세 사람은 입을 모아서 "어이구, 손들었다. 스님, 이 돈은 모두 스님 것입니다." 하며 돈 자루를 내밀자. 이를 받아든 스님은 관세음보살을 연호하며 유유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http://www.ps50.com/doc1/gojun.d01.htm)
그러면 풍자란 어떤 것인가? 이상섭에 의하면, 풍자란 원시시대에는 주문의 하나였다고 한다. 즉 적에 대한 저주의 한 형태로서 효과적인 말에 의하여 적을 우습게 만들어 버리는 방법이었다. 풍자하는 사람은 풍자의 대상보다 우월한 태도를 유지하는데, 도덕적 우월성이 가장 흔한 형태이지만, 그 외에도 지능, 판단력, 사상의 우월성도 풍자를 뒷받침한다면서 향가 ‘처용가’ 같은 작품이 그에 해당한다고 했다. 풍자가가 공격의 대상을 너무나 심각하고도 힘센 자로 느끼면, 그의 풍자에는 위기감이 떠돌 수가 있다. 대재난을 예고하는 “묵시록”, 조지 오웰의 “1984”가 이에 해당한다.
한편, 풍자가 우월한 입장에 있는 여유만만한 태도를 견지하지 못하고 적에 맞서서 일대일로 싸울 때에는 ‘욕설’이 되고, 대상에 대한 극도의 반감으로 위축되면 ‘냉소’가 된다고 한다. (한용환. 소설학사전. 고려원. '92. pp.280-282.의 정리)
이러한 점을 참작한다면,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5언고시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는 풍자성을 잘 드러내주는 훌륭한 작품으로 그 문학사적 의의도 지대하다 할 것이다.
神策究天文 (신책구천문) 그대의 신기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妙算窮地理 (묘산궁지리) 오묘한 계획은 땅의 이치를 다했노라.
戰勝功旣高 (전승공기고) 전쟁에 이겨서 그 공 이미 높으니,
知足願云止 (지족원운지) 족한 줄 알았거든 이제 그만두자 하기를 바라노라.
기승(起承)구에서 상대방을 한껏 치켜 주었다. 그리고 전결(轉結)구에서 반전의 일격을 가한다. 소위 말하는 억양법(抑揚法; 슬쩍 치켜 주었다가 뚝 떨어뜨린다든가, 또는 그 반대의 수법을 사용하는 수사법)을 사용하여 상대방을 한껏 조롱한 것이다. 읽는 사람은 마음이 시원하다. 풍자란 이렇게 독자의 마음을 시원스럽게 만들어 주는 수법이니, 해학이나 골계, 또는 기지(機智) 못지않게 청중 또는 독자를 흡인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 마치 일본과의 축구경기에서 파죽지세로 일본을 공략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다주는 것이 풍자의 힘, 풍자의 효능이다.
박승봉(朴勝鳳)의 ‘월남 이상재 선생 행장’을 한번 살펴보자.
조선 주둔군 사령관 우쓰노미야(宇都宮)가 감기 때문에 불편하다고 말하자, 이상재 선생이 말했다.
“아니, 감기는 대포로 못 고치시오?”
(http://blog.daum.net/ilkkim5132)
다음과 같은 풍자도 있다.
“이 처녀가 정절의 법도를 깰 것인지,
또는 어떤 약한 사기그릇에 금이 갈 것인지,
명예를 더럽힐 것인지,
새 비단옷을 더럽힐 것인지,
기도 올리기를 잊을 것인지,
또는 무도회에 참석 못할 것인지.”
여기서는 정절을 잃는 것이, 장식품에 금이 가는 것이나, 옷을 더럽히는 것 등과 그 중요성에서 아무 구별도 하지 않고 같은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이다.
한편, 풍자의 목적을 상기해 보자. Dryden은 그것을 ‘악(惡)의 교정(矯正)’(“풍자시론”에서) 이라 했고, Defoe는 ‘풍자의 목적은 개심(改心)시킴에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풍자는 일종의 ‘거울’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진리의 방패’라고도 한다. 따라서 풍자는 ‘우행(愚行)의 폭로와 사악(邪惡)의 징벌(懲罰)’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인간이 지향하는 모든 것’을 주제로 삼는다. 하지만, 여기서 제외되는 두 가지가 있다. ‘풍자는 항의하려는 본능에서 생긴 것’이므로, 초월적인 상태를 자아낼 수 있는 것, 예컨대, ‘사랑이나 죽음’은 너무나 엄숙한 것이어서, 풍자가 미칠 수 없는 범위에 해당한다고 한다. 현대의 입장에서 볼 때, ‘사랑과 죽음’이라고 해서 풍자할 수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만큼 이 문제에 대한 경우에만은 매우 조심스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고도 하겠다. 과거에는 여기에 더하여서 ‘순수한 종교’에 대해서도 풍자는 금기로 여겨졌다고 한다. (Arthur Pollard. 宋洛憲 역. 諷刺[Satire]. p.5-28.의 정리)
이제 마지막으로 irony(반어)와 paradox(역설)에 대해서 알아보자.
아이러니(irony)는 에이론(eiron)이라는 그리스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고대 그리스 희극에 으레 등장하던 붙박이 인물의 하나였다. 그는 겉보기에는 약하고 세력도 없지마는 꾀보여서 역시 희극의 붙박이 인물인 알라존(alazon)이라는 힘센 허풍쟁이를 골려주곤 한다. 겉보기에는 특별한 데가 없지만 속으로는 대단한 힘을 발휘하는 인물 에이론의 뜻이 아이러니라는 추상명사에 살아남아 있다. 즉 아이러니는 겉으로 나타난 말과 실질적인 의미 사이에 괴리가 생긴 결과라는 것이다.
북천이 맑다커늘 우장 없이 길을 가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임제(林悌)의 이 시조에 나오는 ‘찬비’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그 뒤에 오는 ‘얼어 잘까’의 의미도 두 가지의 판이한(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게 되어 아이러니를 성립시킨다. ‘찬비’는 겉으로는 그냥 차가운 비로서 그것을 맞으면 얼어서 춥게 자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한우(寒雨)’라는 기생을 가리키는 말로서 그와 얼어 잔다는 것은 어울려 잠자리를 같이한다는 전혀 엉뚱한 뜻이 되는 것으로, 이것이 곧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반어(영어로는 fun)라는 것이다.
패러디(parody)는 보다 문학적 내지 언어유희적 아이러니의 한 형식이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에 대하여 ‘콧대가 높다 하되 얼굴 속에 콧대로다, 꺾고 또 꺾으면…’ 식으로 장난을 치면, 한국 시조에 대한 교양이 있는 사람은 금방 그 아이러니를 알아차린다고 했다. (李商燮. 아이러니. 전게서. pp.188-191을 정리한 것임.)
결국 패러디란 아이러니의 한 형식으로, 모방의 형식으로서 희화적인 효과를 드러내는 표현 방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역설(逆說; paradox)은 겉으로 보기에는 명백히 모순되고 부조리한 듯하지마는 표면적 논리를 떠나 자세히 생각하면 근거가 확실하든가 진실된 진술 또는 정황을 가리킨다. ‘무신론자처럼 신의 존재에 대하여 관심이 큰 사람은 없다.’는 말에 우리는 처음에는 그 명백한 비논리성에 당혹을 느끼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근본적으로 옳은 말이라는 수긍을 하게 되는데, 이런 것이 바로 역설이라는 것이다. ‘죄가 많은 곳에 또한 하느님의 은혜가 많다.’는 예수의 역설을 기초로 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더 받기 위해서는 죄를 더 많이 지어야겠다는 역설이 생겨났다. 신비종교의 진술들, 이를테면 참선하는 사람의 명상의 제목, ‘도(道)를 도라 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는 도교의 잠언 등은 모두 역설들이다.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는 한용운의 역설은 이별을 이별이 아닐 수 있는 높은 경지에 대한 직관의 표현이라고 했다. ‘찬란한 슬픔의 봄’이나 ‘슬플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처럼 사람의 정서의 단절적 상황을 드러내는 역설도 있다고 했다. (李商燮. 역설. 전게서. pp.204-205를 정리한 것임.)
말하자면, ‘모순 형용’을 역설의 일종으로 본 것이다.
수필에서는 그 흥미나 재미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그 근본적인 표현 기법으로서 이러한 해학이나 기지, 골계와 풍자, 그 하위의 표현 형식이라 할 수 있는 아이러니, 그 아이러니의 일종인 패러디, 그리고 역설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