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쓰기 15) [참고 도서 이용법(2) - 동국여지승람 등]
(수필 쓰기 15) [참고 도서 이용법(2) - 동국여지승람 등]
이 웅 재
다시 사회 초년생 시절을 떠올려본다.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이 한창 유행이었던 시절, 나는 섬마을에 버금가는 남해안의 어느 중소 도시에서 교편을 잡았었다. 친척도 친구도 없는 그곳, 더구나 혼자서 지내기를 좋아하던 나는, 가끔 항구 근처의 다방에서 한밤중까지 커피 잔을 앞에 놓고 깊은 명상에 잠기기를 즐기곤 했다. 그럴 때면 시간도 정지된 듯 무념의 상태로 빠져들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뚜우우~~~.’ 밤배 떠나가는 뱃고동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깨는 때가 허다했다.
‘뚜우우~~~.’
그 소리는 나로 하여금 서울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간절하게 만들어주곤 하였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이른바 향수(鄕愁)란 떨쳐버릴 수 없는 감정 가운데의 하나인 모양이다. 대한언론인회(大韓言論人會)에 의하면 우리나라 설 연휴 귀성 이동 인구가 3,000만여 명이라고 하니, 향수라는 감정이 얼마만큼 사람들을 강하게 휘어잡고 있는지를 알만하지 않은가? 그러나 향수란, Homesickness, 떠나온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마음, 곧 과거지향적인 감정이라서 마냥 귀하게 대접해줄 만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이어령에 의하면, 그와는 상대적인 자리에 놓이는 감정이 Nostalgia라고 한다. 고향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지내고 있으면서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Nostalgia라는 것이다. 산 너머로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저 산 너머에는 어떤 세상이 있을까 그리워하는 마음, 말하자면 동경(憧憬)이 그에 해당하는 감정일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만남을 예비하는 감정이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문물, 새로운 사람, 새로운 자연을 만나고싶어 하는 마음인 것이다. 그것은 따라서 미래지향적인 감정이요, 그런 면에서 향수보다 훨씬 긍정적인 마음의 상태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와 같은 마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여행을 떠나도록 하고 있는 성싶다.
『문학상징사전』(이승훈 편저, 고려원, 1966.)에 의하면, 비상, 헤엄치기, 달리기를 위시하여 꿈꾸기, 백일몽, 상상하기 등도 일종의 여행이라고 한다. 냇물을 건너는 행위는 삶의 한 국면에서 다른 국면으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단계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여행이란 무엇인가를 찾는 행위요, 따라서 참된 여행이 의미하는 것은 자아의 발전, 혹은 진보라고 하였다. 안데르센은 그의 자서전에서 “여행은 나에게 있어서 정신이 도로 젊어지는 샘”이라고 하였다.(이어령 편저, 세계문장대백과사전, 삼중당, 1971.)
글쟁이들에게는 여행이란 아주 좋은 글감을 구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어느 곳이든지 낯선 곳을 다녀오는 일이 생기면 반드시 그것을 글로 써서 남기는 버릇을 가져야 한다. 그런 습관은 우리의 관찰력을 키워주기도 하는 일이라서 2중, 3중으로 도움이 된다. 남다른 눈으로 보려고 노력하고, 남다른 생각으로 새로운 만남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며, 나만의 느낌으로 여행이 주는 맛을 음미해 보게 만드는 것이 바로 여행이 아니던가?
여행할 때 받았던 신선한 느낌, 가벼운 떨림, 그리고 무한한 호기심, 이러한 기억들은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야 한다. 기억이란 불완전하다. 따라서 정확한 기록을 위해서는 여행할 때에는 늘 볼펜과 메모지가 손에 들려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새싹이 움터 오르는 소리도 적을 수가 있고, 새들이 서로 화답하는 사랑의 언어도 채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시냇물 소리의 재잘거림에도 의미를 붙여보고, 둥둥 떠가는 뭉게구름의 허풍도 끼적여 두어야 한다.
이름난 명소를 다녀왔을 경우에는, 과거에 그곳을 찾았던 유명인들이 남긴 글귀나 시구, 또는 그곳과 관련된 여러 가지의 일화 등도 함께 소개해 주면 좋을 것이다. 그럴 때 꼭 필요한 책이 바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人文地理書)로서, 1530년(중종 25)에 완성된 책으로, 목판본 55권 25책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은 건치연혁을 비롯하여 풍속, 형승, 산천, 궁실, 누정(樓亭), 역원(驛院), 사묘(社廟), 고적, 명환(名宦), 인물, 효자, 열녀 등으로 그 이용 가치가 대단한 책이다. 일례로 통천군 누정의 총석정 조와 아울러 내 경우 동국여지승람에서 자료를 얻어서 경북신문에 연재하였던 글 하나를 보인다.
♣【누정】 총석정(叢石亭) 고을 북쪽 18리에 있다. 수십 개의 돌기둥이 바다 가운데 모여 섰는데 모두가 육면(六面)이며 형상이 옥을 깎은 것 같은 것이 무릇 네 곳이다. 정자가 바닷가에 있어 총석(叢石)에 임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민간에서들 전하기를, “신라 때의 술랑(述郞)ㆍ남랑(南郞)ㆍ영랑(永郞)ㆍ안상(安祥)의 네 신선이 이곳에서 놀며 구경하였기 때문에 이름하여 사선봉(四仙峯)이라 한다.” 하였다.
○ 안축(安軸)의 기문에, “정자가 통주(通州)의 북쪽 20리쯤에 있는데 가로지른 봉우리가 뾰족하게 바다에 나온 것이 이것이다. 봉우리에 달린 벼랑에 있는 돌들이 즐비하게 서서 모난 기둥 같은데 돌의 둘레가 사방 각각 한 자쯤은 되며 높이는 5, 6길은 된다. 방정하고 곧고 평탄한 것이 먹줄 쳐서 깎아 세운 것 같으며 대소의 차이가 없다. 또 언덕에서 10여 척은 떨어진 곳에 돌 네 덩이가 물 가운데 떨어져 서 있는데 사선봉(四仙峯)이라 한다.…(하략)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구구하게 봉생(鳳笙)에 비길 것 없이, 기괴한 그 형상 정말 이름하기 어렵네. 처음엔 한(漢) 나라 기둥이 공중을 버티고 선 것인가 했더니, 다시 진(秦) 나라 다리가 바다에 걸친가 하네. 새기고 깎아낸 귀신의 공이 너무도 재주를 부린 것이, 보호 유지하는 신의 힘이 가만히 정기를 모았네. 물결소리 어지럽게 부서져 북소리인 양 시끄러우니, 못 속의 용이 꿈에 몇 번이나 놀랐나.”…(하략)
○ 신천(辛蕆)의 시에, “포기포기 푸르게 선 사선봉(四仙峯)은 개서 좋고 비 와도 기이하며, 담담하고 짙은 것 모두 좋아 삼면장천(三面長天)에 흰 물결이 닿았고, 일변낙조(一邊落照)엔 푸른 산이 중첩하구나. 백로들 강가의 여귀꽃에 서성거리고, 원숭이와 학은 바위 한 쪽에서 푸른 소나무 어루만지네.” …(하략)
○ 이달충(李達衷)의 시에, “어둠을 더듬어 새벽에 군옥봉(群玉峯 신선 있는 산)에 오르니, 바다의 태양이 오르려 하여 구름 비단 짙구나. 산호 늙은 나무에 가지잎 떨어지고, 지주(砥柱 ;마치 돌기둥처럼 생겨서 혼탁한 물 가운데 있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 놀란 물결에 연기 이슬 겹겹이네. 세월은 현산(峴山) 머리 빗돌에 모호하고, 풍상은 아미산(蛾嵋山) 소나무에 뚜렷하구나. 창랑수(滄浪水; 屈原의 漁父辭에 나오는 강) 맑으면 갓끈 씻는단 말을 말며, 찬란한 데 나서 때를 만나지 못하였다 노래하지 말게나.”…(하략)
○ 이곡(李穀)의 시에, “바닷가 어느 곳에 푸른 봉이 없으랴만, 여기 와서야 짙은 티끌 인연 모두 다 씻는다. 기이한 바위 높게 섰는데 옥을 묶은 듯 나란히 서 있고, 옛 비(碑)가 부서져 떨어졌는데 이끼 봉(封)한 것이 겹겹이네. 꿇어서 신 받드는 일이야 어찌 황석공(黃石公
; 漢나라 장량 張良[子房]에게 “天下三略”을 전수하여 천하를 통일하게 한 전설 상의 인물)을 섬김같이 하랴, 비결을 잡아야만 정말 적송자(赤松子; 신농씨 때에, 비를 다스렸다는 신선)를 오게 한다네. 노동(盧仝; 당나라 때 시인)은 부질없이 봉래산으로 가려한 것이, 이태백(李太白)은 잘못 요대(瑤臺; 구슬을 흩어 박아서 아름답게 꾸민 臺閣)에서 만나려 하네.” …(하략)
○ 정준(鄭悛)의 시에, “하늘과 땅이 만들어질 때에 돌이 봉우리 되니, 어둡고 희미하며 멀고 가까운 곳에 연기 안개 짙으네. 하늘이 천 척(千尺)으로 나직하니 붉은 벼랑이 섰고, 바람이 일어나니 일만 이랑 푸른 물결이 겹겹하구나. 이끼 낀 용[莓龍]이 깎여 떨어지니 풀 속의 비석이요, 생학(笙鶴; 생황소리에 춤추는 학)이 바윗가의 소나무에 나부끼네.”…(하략)
『신증』 성현(成俔)의 시에, “부용을 옥으로 깎아, 기이한 봉우리 만들어 만 길이나 높이 선 곳에 구름 아지랑이 짙네, 긴 바람이 물결을 몰아 눈꽃이 치솟는데, 하늘을 흔드는 은집이 겹겹이 밀려오네. 푸른 벼랑 뚝 끊겼으니 그 아래 한량없이 깊고, 외로운 정자 얼른얼른 높은 소나무 의지했네. 봉래와 약수(弱水; 부력이 너무 약해서 심지어 새의 깃털도 가라앉는다는 강)가 까마득 멀기도 한데, 안기(安期)와 연문(羨門 옛날 선인)을 만날 것도 같네. ” …(하략)
○ 채수(蔡壽)의 시에, “금자라 머리에 부용봉(芙蓉峯)을 이었는데, 괴이한 돌 깎아내고 안개구름 짙으네. 망망(茫茫)한 네 신선은 물을 곳이 없고, 묘묘(渺渺)한 약수(弱水)는 2천 겹이나 되네. 다만 보이는 것, 천 년이나 글자 닳은 동강난 비석이 있고, 또한 만 년이나 되어도 자라지 않는 외로운 소나무 있네.”…(하략)
♣경북 인물열전①
백결선생(百結先生)의 아버지 박제상(朴堤上)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1. 慶州府 人物條]
이 웅 재
여기저기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눌지왕(訥祗王; 417-457 재위)이 여러 신하들과 나라 안의 호협(豪俠)들을 불러서 친히 베푼 어연(御宴)이었다.
술잔이 세 순배가 돌았다. 요즈음 식으로 말하자면 무엇을 위하는지는 모르지만, ‘위하여’를 비롯하여, ‘나가자(나라와 가정과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9988234’(아흔아홉 살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틀만 앓고 사흘째 죽기를…)를 건배사로 합창하고 흥이 무르익을 즈음이 되었다. 쿵짝 쿵짝 쿵짜작 쿵짝, 풍악도 울려나오기 시작했다.
“보위에 오르신 지 10년차에 이르게 된 것(”삼국사기“에서는 재위 2년으로 되어 있음)을 경하하옵니다.”
그런데, 당사자 눌지왕은 조금도 즐거운 기색이 아니었다. 즐겁기는커녕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마저 맺혀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갑자기 얼어붙었다. 눌지왕이 입을 열었다.
“전에 아버님(實聖王을 가리킴)께서 백성을 염려하신 까닭으로 사랑하는 아들(눌지왕의 동생)을 왜국에 보냈다가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고, 내가 또 즉위한 이래로 이웃나라의 군사가 매우 강성하여 전쟁이 그칠 사이 없었는데 고구려만이 화친을 맺자는 말이 있어서 그 말을 믿고 친동생을 보냈는데 고구려도 역시 억류해 두고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두 아우를 데려올 꾀를 낼 수 있는 사람으로 누가 있습니까?”
백관(百官)이 아뢰었다.
“오직 삽라군(歃羅郡) 태수 제상(堤上)이 있을 뿐입니다!”
왕이 그를 불러들였다. 어명을 받아 행하겠다는 제상(삼국유사에서는 金堤上, 삼국사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朴堤上)의 말에 왕은 가상히 여겨 술잔을 나누어 마시고 손을 잡아 작별해 보냈다.
제상은 곧바로 변복을 하고 고구려에 들어가서 보해(寶海, 삼국사기에서는 卜好)와 함께 도망해 왔다. 고구려왕이 이를 알고 수십 명으로써 뒤쫓게 했으나 그동안 보해가 은혜를 베풀었던 까닭으로 군사들이 모두 화살촉을 빼고 쏘았던 때문에 무사히 살아 돌아올 수가 있었다.
왕은 보해를 만나게 되자 한편으로는 즐거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왜국에 볼모로 잡혀가 있는 셋째 미해(美海, 삼국사기에서는 未斯欣)를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다.
제상은 이를 보고 재배하고 하직한 후 집에도 들르지 아니하고 왜국으로 갔다. 그는 신라왕이 제 부형을 죽인 까닭에 도망 온 것이라며 왜왕을 속이고, 늘 미해를 모시고 해변에서 놀다가 물고기와 새를 잡아 바치니, 왜왕이 기뻐하며 의심치 않았다. 새벽안개가 자욱이 낀 날 제상은 미해에게 말했다.
“도망가십시오.”
“같이 가자.”
“그러면 왜인이 금방 알고 뒤쫓을 것입니다.”
백방으로 설득하여 보낸 후, 노한 왜왕이,
“왜국의 신하라 한다면 중록(重祿)을 내리겠다.”
고 회유하였지만, 단호히 거절했다.
“차라리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왜왕이 노하여 제상의 종아리 가죽을 벗기고(‘종아리 걷어!’란 말이 엄하게 벌을 주겠다는 말로 사용되게 된 연유는 아닐는지?), 갈대를 베고 그 위를 걷게 하면서(지금 갈대 위에 혈흔이 있는 것은 제상의 피라고 한다) 왜의 신하라 자복키를 강요했으나, 제상은 번번이 “신라의 신하”라면서 그 뜻을 굽히지 않자, 종내에는 목도(木島)란 곳에서 불태워 죽였다.
…(중략)
대개 박제상의 얘기는 여기서 종결된다. 그러나 그 다음의 얘기를 좀더 천착해 보자. 차주환(車柱環) 씨에 의하면(韓國의 道敎思想. 同和出版公社. ’84. p.15) 영해박씨(寧海朴氏) 문중의 주장으로는 박제상의 처는 김씨요, 그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이 박문량(朴文良)이라 한단다. (중앙일보. ’82.12.18. 姓氏의 고향 45 참조) 그리고 그 박문량이 바로 백결선생(百結先生)이라는 것이다. 삼국사기 열전을 보면, 백결선생은 경주 낭산(狼山) 아래서 살았는데, 집이 극빈(極貧)하여 옷을 백(百) 곳이나 기워[結] 마치 메추라기가 달린 것 같았으므로 동리(東里)의 백결선생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그는 인생삼락(人生三樂, 列子 天瑞篇 참조)을 얘기한 영계기(榮啓期)의 사람됨을 흠모하여 항상 거문고를 가지고 다니면서 희로비환(喜怒悲歡)과 불평스러운 일을 거문고를 타서 풀어내곤 했다고 한다.
그가 어느 해 세모에 이웃집에서는 떡방아를 찧는데 그렇지 못함을 한탄하는 아내의 탄식을 듣고,
“대저 죽고사는 것은 운명에 따르고[生死有命]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다[富貴在天].… 어찌하여 상심하는가? 내 그대를 위하여 떡 방아 찧는 소리를 내어 위로하겠노라[作杵聲以慰之].“
하며 거문고를 탔는데, 이것이 세상에 전하여져 대악(碓樂)이라 하였단다. ‘作杵聲’ 운운으로 보아 “덜커덩 방아나 찧어…”로 시작되는 고려 속악 상저가(相杵歌)가 혹 대악의 고려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여하튼 삼국사기 열전에 드물게 아비[朴堤上]와 아들[百結先生]이 함께 등재된 경우라서 경북 인물열전의 서두로써 장식해 보았다.
♣이 이외에도 “대동야승”과 같은 책에서도 좋은 글감들을 많이 얻을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인터넷 상에서 한국고전번역원에 들어가 무료로 이용할 수가 있다.(09.3.7.원고지 37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