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쓰기

(수필 쓰기 16) 서두 쓰기

거북이3 2009. 3. 13. 17:29

    (수필 쓰기 16) 서두 쓰기

                                                            이  웅  재

 첫인상, 중요하다, 그거 정말로 중요하다. 오죽하면 “첫인상 5초의 법칙”이란 책까지 나왔을까? 누군가를 처음 만나서 첫 5초 동안 느낀 이미지가 평생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건 조금 과장된 얘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언턱거리가 있으니까 과장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니까 첫 5초 동안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첫인상’이 중요한 것만은 틀림이 없다.

 요즘 TV를 보다가 신경질 나는 일 중의 하나가 광고일 것이다. 한창 신나는 장면, 바야흐로 온 정신을 집중하는 순간에 얄밉게도 화면이 바뀌고 상품 광고가 나올 때는 느긋한 성질의 사람에게까지도 화를 치밀게 한다.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은 바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광고를 흔히들 ‘15초 예술’이라고들 한다. 15초 정도면 전달하고픈 정보는 모두 다 전달할 수 있다는 발상에서 나온 시간관념일 것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인상이란 이처럼 짧은 시간 내에 구축이 되는 것이요, 한 번 고정된 인상은 전통이나 관습처럼 쉽게 파괴되지 않는 것이다. 첫인상은 그만큼 중요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요새는 살집이 좀 붙다 보니까 훨씬 나아졌지만, 나는 그 ‘첫인상’ 때문에 많은 손해를 본 사람이다. 나에 대한 첫인상은 대체로 ‘지나치게 날카로워 보인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푸근한 맛이 없다’, ‘터놓고 지내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것인데, 그건 나 자신도 인정한다.    우선 내 눈썹이 날카롭게 보이는데다가, 요새는 달라졌지만 살집도 별로 없어(한때 ‘비 사이로 막가’였으니까) 도대체가 가까이 하고픈 생각이 나지 않는 인상임에 틀림없다. 갈비 중에서도 냉갈비, 오죽하면 젊었을 적의 내 희망이 ‘살 좀 푹 쪄 보는 일’이었을까? 60이 가까워질 때까지 일편단심 변함없이 55kg이었으니까…. 그런데 요새는 마누라에게서 “살 좀 빼요!” 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72kg에서 오락가락하고 있으니, 그렇지 않겠는가?

 살찌는 비결? 그거 의외로 간단하다. 그 첫 번째가 담배를 끊는 일이다. 담배 끊고 살 안  찌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꼭 살이 쪄야 되겠다는 사람이라면 담배부터 끊고 볼 일이다. 애시당초 담배를 피우지 않던 사람은? 별 걱정을 다 하는군…. 그러니까 여태 살이 안 찌는 거지. 그런 사람은 담배를 배워서 피우면 될 일이다. 아니, 그렇게 배웠다가 다시 끊으면 될 일이다. 걱정을랑 붙들어 매놓아도 된다. 그렇게 하면 틀림없이 살이 찌게 되어 있으니까….

 그 두 번째의 방법도 있다. 나처럼 매일같이 저녁 식사 후에 혼자서 자작(自酌)을 할 일이다. 알콜 자체도 열량이 높은데다가 ‘술 마실 때 안주 안 먹으면 삼대가 망한다.’는 금언(내가 만들어 놓은 말이지만) 하나쯤을 철석같이 지킨다면, 틀림없이 살이 찔 것이다. 그러고도 살이 안 찐다면 ‘내 손톱에 장을 지진다.’

 그 두 가지 처방으로도 부족하다면, 늘 태평스럽게 지내면 된다. 예전에 우리 마을에는 ‘되겠지 영감’이란 분이 사셨다. 그분은 당장 쌀이 떨어져도 마누라 바가지 소리에 대답한다는 소리가 “다 되겠지.”였다. 매사에 그렇게 ‘배 째라’식의 태평성대를 누리면 틀림없이 살이 찐다. 그러고도 살이 안 찐다면, 이번에는 ‘내 발톱에 장을 지지겠다.’

 얘기가 삼천포로 빠져들었다. 아니, 삼천포는 그 놈의 ‘삼천포로 빠졌다’라는 말 때문에 행정구역 명칭에서 퇴출해 버리고 말았으니, ‘얘기가 사천으로 빠져버렸다.’라고 해야 하나? 돌아가자. 원래의 문제로 돌아가자. 서두, 그거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언젠가의 내 체험 하나를 얘기해 보겠다. 우리나라 베스트셀러의 새로운 기원을 세운 작품인 김홍신의 “인간시장”을 작심하고 읽어보려고 책을 펴들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소설의 첫 문장을 읽고 그만 책을 덮어버리고 말았던 적이 있다.

 “하느님, 개새끼!” 글쎄, 하도 오래 전 얘기라서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그 소설의 첫 문장이었다. 그것을 읽은 나는 그 소설을 더 읽어보고픈 생각이 싹 가셨던 것이다. 나는 기독교를 열렬하게 믿는 신자가 아니다. 미션스쿨을 다녔었고, 미션스쿨에서 교편을 잡았었고 하다 보니까, 기독교적인 분위기에는 상당히 익숙해진 편이지만, 그걸 내 신앙으로까지는 받아들이지 않고 지내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느님, 개새끼!”를 읽게 된 순간, 그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싸악 달아나 버리는 것은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 책을 읽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서두’ 때문이었던 것이다.

 서두는 모든 독자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켜 주어야 한다. 서두는 모든 독자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켜 주어야 한다. 흥미 없는 TV 연속극은 누구에게도 채널 선택을 받지 못하고 만다. 흥미 없는 신문기사는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다. 흥미 없는 문학작품은 그저 인쇄된 종잇조각일 뿐이다. 그런 경우에는 ‘인쇄된 종이는 백지보다 싸다.’는 소리를 당연하고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비운을 맞아야만 한다.

 첫 문장에서 관심을 끌지 못하면, 첫 대문에서 흥미를 유발시키지 못하면, 그 글은 아무리 좋고 훌륭한 내용의 글이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에게서 외면당한다. 읽혀지지 않는 글을 쓰고 싶은가? 그렇다면 서두 쓰기에 고심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 글은 자기 혼자만의 글이라는 점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읽혀지는 글을 쓰고 싶으면 첫 문장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한 사람의 독자밖에 요구하지 않는 ‘연애편지’에서도 그 서두는 가공할 만한 위력을 발휘하지 않는가? 한 번이라도 연애편지를 써본 사람이라면, 그 첫 문장을 절대로 되는 대로 써버리지는 않았다는 점을 기억할 것이다.

 요새는 원고지에 직접 글을 쓰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오늘날처럼 컴퓨터가 대중화되기 이전의 시절에는 ‘서두’를 쓰느라고 돈 꽤나 들기도 했다. 이렇게 써 보고 저렇게 표현해 보아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 정말로 답답하다. 내가 글쟁이가 맞나? 하는 생각까지도 뼛속을 파고든다. 그러다 보니 애꿎은 원고지만 찢겨나가는 것이다. 원고지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로 환장할 노릇일 수밖에 없다. 부욱! 찢어서는 그걸 또 우악스럽게 꾸깃꾸깃 뭉개버리는 것이 아닌가? 파지(破紙), 파지…. 방바닥 그득히 파지가 쌓이곤 했다. 작가는 그럴 때 ‘글 쓰는 일이 고통’이란 걸 깨닫는다. 하지만, 웃는 사람도 있다. 그건 말하나마나 문방구 가게 주인, 원고지가 품절이 되는 때문이다.

 서두란 이와 같은 측면에서만 중요한 게 아니다. 서두란 바로 그 글의 방향타 노릇도 하여 주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다. 방향을 정한다든가 목표를 설정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부산을 가겠다고 하면서 목포행 열차를 탄다면 어떻게 될까? 활쏘기를 연습하면서, 표적 없이 아무데나 허공에다 대고 화살을 날려버려서는 표적을 적중시킬 수 있는 실력이 붙을 수가 없을 것이다. 방향만 제대로 잡히면, 가끔은 느림보 거북이도 건방진 토끼를 따라잡을 수도 있다. 방향이 잘못 잡히면 재바르고 재재바른 꾀보 토끼도 거북이에게 뒤처지는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서두 쓰기, 중요하다, 그거 정말로 중요하다. 첫 문장이 마음에 맞으면 그 다음 이어지는 문장들은 저절로 술술 풀려나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서 그렇게 막힘없이 쓰인 글이라면 읽는 사람에게도 자연스럽게 읽혀질 것임은 당연한 일, 작자에게도 독자에게도 친근하게 다가오고 다가가는 글이라면 그건 명문장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처음의 시작,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시작이 반’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면 구체적으로 서두는 어떻게 써야 할까? 강석호는 서두 쓰기의 요령을 터득하기 위하여 기존 작품의 유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면서 다음과 같은 유형을 들었다.


  ①주제나 제목의 해석으로 시작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피천득의 ‘수필’

     ‘딸깍발이’란 것은 ‘남산골 샌님’의 별명이다. -이희승의 ‘딸깍발이’

  ②어떤 상태를 설명하는 서두

    어수룩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나이 50가량 되는 중노인 한 사람이 기차칸에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가 변소에      갔다 온 틈에 그 자리를 남에게 빼앗겨 버렸다. -김소운의 ‘차중견문’

     우리 동네 입구에 나이 마흔댓 되어 보이는 여인이 사과를 팔고 있었다. -강석호의 ‘사과장수 아줌마’

  ③격언이나 속담 또는 학설의 제시로 시작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함은 인생의 수명은 100년도 가지 못하나 예술의 수명은 영구히 가는 것을 말한      다. -문일평의 ‘예술의 성격’

  ④계절의 감각이나 서정적 분위기 강조

    북쪽 하늘에서 기러기가 울고 온다. 가을이 온다. 밤이 되어도 반딧불이 날지 않고 은하수가 점점 하늘          한복판으로 흘러내린다. -김동리의 ‘바위’

  ⑤ ‘나는’ ‘우리는’에서 시작

    나는 그믐달을 좋아한다. -나도향의 ‘그믐달’

  ⑥대화로 시작하는 서두

    “아빠, 우리 이사 가요.”

     “어디로?” -정진권의 ‘멀고 높고, 그 관악산’

  ⑦역설로 시작한다.

     꽃동네에는 꽃이 없었다. -이웅재의 ‘꽃동네’

                 (강석호, 수필쓰기의 포인트, 교음사, 2004, pp.94-98.)


 이런 방법 이외에도 글의 첫머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방법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요, 자신의 체험을 독특하게 그려낼 수도 있겠다. 첫 장면이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바닷가에서 수영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영화가 결말 부분에서는 가슴 아픈 이별로 막을 내리는 것은 물의 상징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어떠한 방식의 서두를 쓰던 간에 남과의 차별성을 두어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여러 종류의 문학 장르 가운데에서 가장 개성적인 성격의 글인 수필에서 나름대로의 개성을 살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벌써 수필이기를 포기하는 일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한편, 바람직하지 못한 서두 쓰기란 어떠한 것들일까? 이철호는 말한 서두 쓰기에서의 삼가야 할 점 몇 가지와, 나 자신의 체험을 적은 글 하나를 참고로 첨기한다.


  만일 이 서두가 신선미가 없이 진부하거나 너무나 평범한 내용, 관심이나 흥미를 끌지 못하는 내용, 작가 자신의 주장을 너무 강조하거나 강요하는 듯한 내용, 교훈적이거나 훈시를 하는 내용, 무슨 뜻인지조차 모를 정도의 불분명한 내용, 지식의 나열이나 자기 과시, 구태의연한 설명, 저속한 표현, 꼭 필요하지도 않은 외래어나 외국어의 남용, 모방이나 불필요한 인용 따위로 시작된다면 독자들은 이내 흥미를 잃거나 거부감, 불쾌감, 반발심 등을 느끼며 실망감도 갖게 될 것이다.

  (이철호, 수필 창작의 이론과 실기, 정은출판, 2005, pp.132-133.)


♣ 주력(酒歷)이라고나 해야 할까? 세 살 때부터 술을 마셨으니 내 '주력'은 꽤나 오래 된 셈이다.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의 무애(无涯)는 열 살 때부터 술과 가까워졌다고 한다. 열한 살 때는 벌써 동네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면서 그 속수(束脩)조로 술 한 병씩을 받아 마셨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수주(樹洲) 선생은 5~6세 때 술맛을 보기 시작했다던가?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아마도 시렁)에 있는 술독을 취(取)하려고 책상 궤짝 할 것 없이 포개어 놓고 기어오르다가 그만 꽈다당! 넘어졌다는 것이다. 놀라서 달려온 그 어머니께서 잘못하다간 귀한 아들 잡겠다고 표주박 하나 가득 술을 담아 주는 바람에 소원 성취를 했노란다. 도주(盜酒)가 급주(給酒)로 바뀌어 꽤나 오랜 ‘주력’을 소유했노라고 “명정40년(酩酊四十年)”에서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까짓것, 내게는 한낱 콧방귀로 흘려보낼 ‘주력’이 아닐까 한다.

 무엇 하나 떳떳하게 내세울 건덕지가 없는 처지이다 보니, 별 걸 다 끄집어내어 회자(膾炙)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요사이는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안 나는데요’라든가, 한 술 더 떠서 뻔한 거짓말을 하면서도 ‘절대 그런 일 없습니다’ 하고 오리발을 내미는 시대가 아니던가? 그런 세태에 휩쓸리지 아니하고, 사실은 사실로서 진술한다는 것 자체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이것이 감히 내 ‘주력’을 공개하는 소이이다.

지금은 그 생사조차도 알 수 없는 외삼촌 한 분이 계셨다. 그분은 당시 해군이었단다. 휴가를 나와서 모처럼 우리 집을 인사차 방문했더란다. 어머니께서 손수 술상을 차려다 준 데까지는 좋았다. 나이 지긋한 진짜 술꾼들이야 혼자서 자작(自酌)하는 맛도 별미라지만, 한창 팔팔한 나이에 무척이나 따분했던 모양이다. 그러던 때에 “쌈춘, 쌈춘” 하고 앞에서 알짱거리는 조카 놈이 귀여웠던가 싶었다.

 “아가! 이리 와 이거 한 잔 마셔라.”

 사실 주전부리 감이 귀했던 시절, 외삼촌에게만 한 상 떠억 차려 준 걸 보고 어떻게 하면 저걸 얻어먹나, 딴에는 무척 노심초사하고 있었던 터인데, 이게 웬 떡이냐 싶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외삼촌은 설득의 명수였다.

 “이걸 마시면 기운이 세어진단다. 너 나하고 씨름 한 번 해 볼까?”

 그리고는 다짜고짜 나를 번쩍 들어 패대기치는 것이었다.

 “봐라, 너 이걸 안 마셔서 기운이 없구나.”

 그는 실실 웃음을 흘리며 내게 한 잔을 권했다. 아주 점잖게 그걸 받아서 한 모금 꿀꺽! 했더니, 시큼털털한 것이 맛이 아주 요상했다. 저절로 오만상이 찡그러졌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거기서 물러설 외삼촌이 아니었다.

 “약이란 다 쓴 법이 아니더냐? 그래도 기운 나게 하는 데는 이게 최고란다.”

 그는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한의사였기에 나도 그쯤은 익히 알고 있는 터. 그래서 알고 있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끄덕해 주었다.

 “자, 우리 다시 씨름 해 보자.”

 이번에는 조금 힘들게 나를 이기는 체했다.

 “한 잔 하더니 기운이 많이 세어졌는 걸….”

 그리고는 내게 다시 술잔을 권했다. 일배일배부일배라 했던가? 우리의 씨름은 차츰 내쪽이 유리해졌고, 그에 비례해서 나는 점점 술에 취해 갔다.

 “우리, 씨름할까?”

 나는 신이 났다. 이젠 내가 승자가 되어 있었다. 그 커다란 덩치를 쓰러뜨릴 때의 쾌감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을 듯싶었다. 씨름을 여러 번 했더니 그런가?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까짓 것, 대수랴 싶었다. 드디어 오줌이 마려웠다.

 “쌈춘, 나 쉬 하고 올게.”

 자, 승자답게 걷자. 보무도 당당하게 걷자.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꺼억! 어, 취한다!”

 문지방을 넘어섰다 싶었는데, 그 이후로는 기억이 없다. 승자로서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정말 열심히 기억을 더듬었으나 감감했다.

 나중에 들은 소리. 나는 문지방을 넘으면서 툇돌 위에 그대로 고꾸라졌다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내 체면이 반감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기절했다는 것이다. 체면의 2/3가 손상되었다. 그런데 사흘 동안을 깨어나지 않더라는 것이다. 체면은 완전히 무화(無化)되어 버렸다.

 애 잡았다고 난리가 났었고, 외삼촌은 그 이후 우리 집에 발길을 들여놓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 싸지, 내 체면을 완전히 망가뜨린 장본인인데….

 그 이후로 나는 당분간(?) 술을 끊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당분간’이었다. 세 살 적 버릇인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었으랴?

 지금은 생사조차 모르는 외삼촌, 그분이 보고 싶다. 한 번 만나서 정식 대작이라도 해 보고프지만, 그 놈의 6․25가 외삼촌과의 대작의 기회를 앗아가 버리고 만 것이다. 그 귀중한 기회를….

 그분은 어디엔가 살아 계실까?

                  (이웅재, 술 이야기 1. 세 살 때 술버릇 언제까지 갈까?, 수필문학, 02.10월호, pp.158-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