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요즘 눈귀 뜰 새 없이 바빠…
나, 요즘 눈귀 뜰 새 없이 바빠…
이 웅 재
우리는 가끔 주위에서 팔불출을 만난다. 자랑, 자랑, 자랑에서 시작해서 자랑으로 끝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너도 나도 ‘저런 팔불출!’ 하고 손가락질을 한다. 팔불출이란 1. 제 자랑 2. 마누라 자랑 3. 자식 자랑 4. 아비(선조) 자랑 5. 형제 자랑 6. 선배 자랑 7. 고향 자랑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 ‘팔불출’에 해당하는 사항이 일곱밖에 안 된다는 것 자체가 말하자면 ‘팔불출’답게 덜 떨어진 구석이 있는 말이라서 팔불출은 더욱 팔불출이 되는 것이지만, 팔불출이 되건 말건 팔불출 노릇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런, 저런, 저러니까 팔불출이지!’ 하고 혀들을 끌끌 차면서 한쪽으로는 웃음을 참지 못하여 킥킥! 거리기가 일쑤이다.
그런데 그건 일종의 보상심리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웬일일까? 사실은 나 자신이 팔불출이 되고 싶은데, 체면상 그러질 못하고 남 팔불출된 사람을 보면서 ‘내가 못한 걸 너는 해냈구나!’ 하는 경탄이나 존경(?)의 마음을 은근슬쩍 숨겨보려는 치사스럽고 쩨쩨한 마음을 반어적으로 눙쳐 보려는 의도의 표출은 아닐까?
왜 이렇게 서론이 긴 것일까? 그건 바로 나 자신의 팔불출됨을 나름대로 변명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인 것이다. 그러니까 나, 오늘은 마음 놓고 팔불출이 되어 보겠노라는 ‘선전포고’인 셈이다.
시집 간 딸에게서 들은 얘기인데, 꼭 나보고 팔불출 되라는 얘기였다.
“서영아, 엄마 왔어!”
유치원이 끝나 가는 시간에 도착한 나는 헐레벌떡 숨도 고르지 못한 채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듣고 아이 하나가 세상천지에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슬픈 목소리로 울어대기를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흑흑, 엉엉!’, ‘으아앙, 엉엉, 흑흑, 흑흑!’
나는 당황했다. 왜 저러지? 유치원 선생님이 물었다. “왜 그러니?”
아이가 대답했다. “울 엄마가 엉엉 울어요!”
“뭐라고?” “울 엄마가 운다구요.”
무슨 뚱딴진가 싶었단다. 하지만, 사정을 알고 보니 심각하더란다. 그 아이 엄마는 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울면서 온갖 잡소리를 늘어놓는다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들으면, 왜 우는 것인지도 알 수 있게 되는데, 아이는 그것 때문에 또 우는 것이었다.
“엄마 왔어!” 하는 소리를 듣고 바로 제 ‘엄마’를 생각하고, 그 엄마가 울던 일을 되살려 내고서는 아이가 따라 우는 것이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도 저는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자신의 하루 일과를 반성하면서 우는 소리, 아이는 그렇게 서글피 우는 엄마를 보면서, 엄마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다면, 그러다 번쩍! 떠오른 생각이 엄마 대신 울어주는 것이었단다. 더구나, 엄마가 ‘아버지 운운….’ 하며 우는 걸 생각하니, 제 입장에서는 ‘할아버지’에게 무슨 큰 변이라도 생긴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마저도 들게 되어 정말로 서글퍼지더라는 것이다. 저를 그토록 사랑해 주시던 할아버지께서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싶어서 정말로 서럽고 서러워지더라는 것이다. 내 손녀 서영이는 다섯 살이다. 그러니까 그애 친구도 그 또래였음에 틀림없으리라.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팔불출이 안 되어도 괜찮은 얘기라 할 것이다. 그 다음이 문제가 된다. 어쨌든 그렇게 친구와 헤어지던 찰나에, 또 다른 친구가 ‘우리 귀여운 손녀’에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오늘 내 생일이거든. 서영아, 이따 저녁때 꼭 놀러 와!”
말하자면, 생일잔치 초대였는데, 우리 손녀 딸내미 왈,
“나, 요즘 눈귀 뜰 새 없이 바빠, 너네집 놀러갈 짬이 없어!” 하더란다. 놀란 애 엄마,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더라는 것이다. 유치원 이외에도 ‘동화 구연’, ‘발레’, ‘영어 회화’ 따위엘 다녀야 하다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짬’이 없을 수밖에…. 이쯤 얘기하면, ‘그 엄마, 참 극성이네.’ 하고 생각하리라. 그런데 이건 전혀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지금 다니는 것만도 많은 것 같아서 어느 걸 하나 빼버릴까 생각하고 있는 엄마에게, 우리 외손녀 하는 말,
“엄마, 나 피아노 학원에도 보내 줘!”
하더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우리 정부에선 무얼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도대체 그 많은 학원엘 보내려면, 얼마나 벌어야 할까? 우리 딸내미는 눈앞이 캄캄해 지더라고 했다. 남편은 그래도 고시 출신 엘리트 공무원이라고 하는데, 딸내미 학원비도 대기가 힘드는 형편이니…. 무언가 잘못된 사회임이 틀림없더라는 느낌, 그렇다, 가끔 사위하고도 술 한 잔 할 때가 있는데, 나는 서민들을 위한 정책들을 침이 마르게 열거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직 우리 사위의 힘으로 해결될 성격은 못되는 일이었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나는 계속 이것저것을 주문한다. 왜? 나는 머지않아 이 세상을 마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 이후에는 주문하고 싶은 말도 할 수가 없을 테니까 …. 그런 것은 어쨌든, ‘눈코 뜰 새 없이 바빠!’라면 모르겠는데, ‘눈귀 뜰 새 없이 바빠!’란 또 무엇인가? 곰곰 생각해 보니 그것이 훨씬 합리적인 말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아무리 생각해도 ‘코를 뜬다’는 말은 이상했다. 어디 그뿐이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직접적인 감각은 ‘보고 듣는’ 일이 아니던가? ‘눈코’는 ‘보고 맡는’ 일, 어색할 수밖에 없는 표현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외손녀를 닮고 싶다. 외손녀를 배우고 싶다. 그애는 평소에는 무사태평이다. 그렇게 지내다가도 가끔 한 번씩은 우리 모두를 놀래킨다. 어쩌다 옷 한 벌을 사 주면 우리 ‘공주님’께서는 한 말씀 하시곤 한다.
“우아, 이 옷은 참으로 아름답네요.”
글쎄, 우리 어른들은 그런 말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게 다섯 살짜리의 통상적인 말일 수가 있는 것일까? 솔직하게 나는 그런 말, 그러니까 ‘아름답네요!’와 같은 말, 해 본 기억이 없다. 왜? 그건 ‘예쁘네요.’ 하고는 다른, 미적 감각이 가미된 말, 그러니까 그것은 일종의 사치였으니까. 옷 이야길 조금만 더해 보자.
예쁜 어린애들의 옷이 있었다. 외손녀에게 사 주고 싶었다. 상당히 고가였지만, ‘눈 딱 감고’ 샀다. 서영이가 물었다.
“이거, 얼마짜리에요?”
우리들은 대답했다.
“비싼 거야.”
외손녀가 말했다.
“이거, 그럼, 6,000원짜리에요?”
그렇다, 6,000원짜리면 비싼 것이다. 최소한 앞으로의 내 생활에선 6,000원이 근검과 사치의 기준으로 작용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 나는 오늘도 아이에게서 배우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