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기사 작성을 위한 몇 가지 유의할 점
인터뷰 기사 작성을 위한 몇 가지 유의할 점
이 웅 재
(전 동원대 교수, “수필문학”지 상임 편집위원.)
인생은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부모와 자식 간의 만남, 스승과 제자 사이의 만남, 친구와 친구끼리의 만남, 남자와 여자로서의 만남, 직장 동료와의 만남, 이웃과의 만남, 우리의 하루하루는 수많은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만 만남이 아니다.
사람은 온갖 사물과도 만난다. 옷을 입어야 하고, 차를 타고 이동을 해야 하고, 핸드폰도 챙겨야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안경도 써야 하고, 볼펜도 있어야 하고, 휴지도 준비해야 하고, 때로는 100원짜리 동전도 필요하다.
만남은 관계를 형성한다. 그 관계는 대등할 때도 있고, 종속적일 때도 있고, 꼭 필요한 관계일 때도 있고, 별 의미가 없을 때도 있다.
나는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식사를 했다. 그 한 끼 식사를 위해서 많은 존재들과 만났다. 밥 그릇 가득 들어 있었던 밥알 하나하나, 김치를 이루고 있는 배추, 무, 마늘, 소금, 고춧가루 … 등등, 국물 속에 들어 있었던 콩나물, 파, 멸치 … 등등, 내 몸 하나의 생명 유지를 위해서는 이처럼 매 끼니마다 엄청난 많은 만남을 가져야 한다. 이때의 만남은 먹고 먹히는 관계를 형성한다. 얼핏 생각하면 비정한 만남이다. 그러나 그러한 비정한 만남이 없으면 나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나는 그 많은 생명체들의 희생에 의해서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보자.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처절하게 울어댔고,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여름에는 천둥이 저처럼 비통스럽게 울어대었으며, 가을에는 무서리도 저리 심하게 내리고, 그래서 내 누님같이 생긴 꽃 하나가 탄생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새 생명 탄생의 비경을 옆에서 바라보는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던 것이다. 소쩍새와 천둥과 무서리, 이들이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희생이 된 것이다.
이호우의 ‘개화’도 마찬가지다.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그건 그대로 새 생명의 탄생이요, 한 하늘이 열리는 개벽과도 같은 변화이다. 그 절정의 순간이 바로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요, 그런 생명 탄생을 위해서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여야 했고,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나도 가만히 눈을 감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만남은 관계를 맺게 하고, 관계는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니만큼 만남을 범상하게 생각하고 지내지 말자. 때로는 단순한 변화를 넘어선 창조를 가능하게도 하는 것이 만남이다.
일반인들에게 어떤 특정한 사람을 만나게 해 주는 작업, 그것이 여러분들이 자주 행하게 되는 인터뷰라 할 것이다. 말하자면 A(인터뷰 대상자)와 B(독자나 시청자)의 만남을 보다 의미 있게, 보다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게 해 주는 일, 그것이 바로 인터뷰라는 말이다. 따라서 A의 선택에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는데, 늘 인터뷰를 해 오신 여러분들에게는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있을 것이라서 큰 틀에서 대체적인 몇 가지만 말씀 드리고자 한다.
먼저, 시의성(時宜性) 내지는 필요성에 의한 대상 선정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어떤 대상을 선정할 것이냐 하는 그 범주를 우선 정하라는 말이다.
다음은, 필요한 범주 내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범위를 좁혀서 인터뷰하고자 하는 목적에 가장 근접한 적임자(適任者)를 선택해야 한다. 이때 불가피할 경우에는 어쩔 수가 없겠지만, 가급적이면 표준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선택함이 좋다. 인쇄 매체가 아닌 음향 매체 내지는 시청각 매체의 경우에는 특히 이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렇게 대상자를 선택했으면, 그 사람에게 연락을 하여 인터뷰가 가능한지를 확인하고, 시간, 장소를 약속한 후, 반드시 그 사람에 대한 사전 연구를 하여 두어야 한다. 막연하게 주먹구구식으로 행하는 인터뷰는 원래의 목적과는 상치되게 엉뚱한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고, 때로는 물에 물 탄 듯한 알맹이 없는 인터뷰가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제 5W1H(六何原則)와 같은 기사문 작성에서의 초보적인 얘기는 생략하고 몇 가지 나름대로 유의할 점에 대하여 말씀드리겠다.
우선, 주제를 분명히 해야 한다. 무엇에 대해서 쓰려는 글인지, 무엇을 강조하고자 하는지를 확고히 정해 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 주제와 관련이 되지 않는 내용이라면 아무리 그럴 듯하고 멋진 표현이라고 하더라도 과감히 버릴 줄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자나 시청자의 반응은 처음 의도했던 바와는 달리 엉뚱한 방향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기사문 작성의 실제에서는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을 엄밀히 구분해서 사용하여야 한다.
a ————— a' ≫ ————— ≪
b —————- b' ≪—————-≫
A B
a < b (사실) a' < b'(느낌)
위의 그림에서와 같이 사실판단에서도 때로는 느낌에 의해 다르게 인식되는데, 가치판단에서는 느낌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통사고와 관련된 기사문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보행자가 건널목으로 건넜다는 것과 건널목이 아닌 곳에서 무단횡단을 했다는 기사를 대하는 사람들의 느낌은 천양지차이다. 건널목이라 하더라도 푸른 신호등일 때와 붉은 신호등일 때에 따라서도 느낌은 차등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운전자가 술을 몇 잔 마셨다는 말이 들어갔을 때와 운전에는 별 영향을 끼칠 정도라 판단하여 그런 말을 빼어버렸을 때의 차이도 무시할 수가 없게 된다. 문학 작품에서는 가치판단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기도 하지만, 기사문에서는 특정한 경우가 아니면 사실판단에 충실한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관점의 차이도 이와 유사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지금 몇 시죠?”
버스 칸에서 우연히 함께 자리한 아가씨에게 물었다.
“다섯 시 오 분 전이요.”
이상했다. 다섯 시 오 분 전?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인데도 그게 왜 이상하게 들릴까? 그래서 한번 다시 물었다.
“지금 몇 시냐구요?”
이번엔 아가씨가 이상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대답을 바꾸었다.
“오 분 전 다섯 시요.”
‘시(時)’를 먼저 말하는 게 옳은지 ‘분(分)’을 먼저 말하는 게 옳은지 그걸 잠깐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글쎄 그것은 딱히 어느 쪽을 먼저 말하는 것이 옳다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단지 먼저 말해지는 쪽이 다른 쪽보다 '강조'의 의미를 띠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점은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다섯 시 오 분 전'
'오 분 전 다섯 시'
아무래도 이상하다. 말하는 컴퓨터에게 물어보았더라면 분명 이와 같은 대답은 아니 나왔을 것이다. 왜? 컴퓨터의 경우라면 언어표현에서의 일관성은 틀림없이 지켰을 테니까 말이다. 곧, '다섯 시'라고 말했다면, 그 다음 '분'의 표현에서도 같은 식으로 '다섯 분 전'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다섯 시 다섯 분 전', 아니면 '오 시 오 분 전' 식으로 말하는 것이 일관성을 지키는 표현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의 일상에는 이처럼 곰곰 따져보면 비논리적인 현상들이 너무나 많다.
다시 둘러서 생각해 보자. 왜 ‘다섯 시 오 분 전’ 또는 ‘오 분 전 다섯 시’라고들 말하는가? 어째서 그런 일관성 없는 표현들을 하는가? 그리고 그것을 왜 이상하게들 생각하지 않는가? 그것은 순전히 ‘관습’ 때문이라 하겠다. 관습, 그건 무서운 것이다. 그건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관습, 그것은 곧 ‘전통’이라는 말로 바꾸어 말해도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전통이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내기까지에는 위와 같은 ‘왜?’라는 의문, 다시 말해서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바라보는 ‘발상의 전환’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얼핏 생각했을 때, 이 둘은 모순되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와의 비교를 전제로 하여야만 ‘새로움’이란 말도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날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전통’을 무시하고서는 ‘새로움’도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둘은 서로 얼핏 모순되는 것 같지만, 그것은 ‘모순(矛盾)’이 아니라 ‘상생(相生)’의 원리 속에서 존재하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경우를 보자.
방의 안팎에 A, B, C 세 사람이 있다. A는 방 안에, B와 C는 방 밖에. C가 방 안으로 이동했다.
A가 말한다.
“C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B가 말한다.
“C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왔다’와 ‘들어갔다’는 정반대의 말이다. 그런데, 그게 성립된다. 그것은 A와 B가 점유하고 있는 위치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보는 장소, 보는 시각, 보는 관점이 달랐기 때문인 것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았느냐? 그게 중요하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은 바로 그러한 관점의 차이, 생각의 차이를 강조하는 속담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어떤 현상, 어떤 대상을 대할 때는 항상 이러한 양면성, 이러한 관점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매사 아전인수격으로 생각하지 말고,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사물의 실상을 드러내줄 수가 있는 것이다. 이상은 기사문 작성 시의 객관성을 위해서는 어떠한 시각을 가져야 하는가, 또는 어떠한 태도를 유지하여야만 하는가를 얘기한 것이다.
이와 덧붙여서 기사문의 길이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자. 모든 글들은 대체로 3단 구성이 많다. 대개 글 한 꼭지를 5등분쯤 해서 서두와 결말 부분에 각각 1/5씩(그보다 약간 적어도 무방하다고 하겠다.)을 배분하고, 나머지 본문에 3/5쯤을 할당하여 두세 가지 이야기를 삽입하면, 적정한 분량의 글 한 편을 쉽게 이루어나갈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글 전체의 길이. 그 길이는 가급적 짧은 것이 좋다. 우리는 초등학교 때 교장 선생님의 훈화에 질린 적이 있지 않던가? 결혼식 축사와 같은 덕담도 길면 짜증이 난다. 짧은 글이 인상에 남는다. 글 전체의 길이뿐만 아니라 개개의 문장도 짧게 쓰는 버릇을 들이는 것이 좋다. 문장력에 특별히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단문(短文)이라야 주술 관계도 명확하고 의미 전달도 명쾌해질 수가 있다. 그러니까 간결체 문장을 애용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다음은 띄어쓰기.
문장을 쓸 때, 가장 소홀하게 생각하는 것이 띄어쓰기일 것이다. 까짓것 띄어쓰기가 조금 잘못되었다고 무엇이 큰 문제이랴 싶은 것이다. 더구나 예전의 고문(古文)이나 한문에서는 띄어쓰기 자체가 없지 않았던가?
“빨리가자!”로 쓰거나 “빨리 가자!”로 쓰거나 의미 전달에는 큰 문제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렇다. 그럴 수도 있다. “배고프다 밥먹자!”로 써도 알아듣고, “배고프다 밥 먹자!”로 써도 알아먹는다는 말이다. 맞다. 그럴 수도 있다. 까짓것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옳거니! 그럴 수도 있다.
어렸을 적 국어 선생님은 말했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를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로 쓰면 사태가 심각해진다고. 하지만, 아버지가 가방으로 들어가실 리는 만무하다. 그러니 그와 같은 예문을 들이대면서 띄어쓰기를 강조하는 일은 조금 어거지로 여겨진다.
세월이 흐르면서, 예문도 진화했다.
“아기다리 고기다리 던데이트.”
“아기다리 고기다리 던데이트?” 그런 말은 없다. 그러니 그건 띄어쓰기를 강조하기 위해 조작된 말임을 알 수가 있다.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데이트.”를 일부러 그처럼 띄어 써 놓은 것이다.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나, “아기다리 고기다리 던데이트.”라는 문장들은 다른 의미로 읽힐 가능성은 없으니 무시해도 될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오늘밤나무사온다.”
이걸,
①오늘밤 나무사 온다.
②오늘밤 나무 사 온다.
③오늘밤 나 무 사 온다.
④오늘 밤나무 사 온다.
⑤오늘 밤 나무 사 온다.
⑥오, 늘 밤나무 사 온다.
⑦오, 늘 밤 나무 사 온다.
로 띄어쓰기를 달리 하면 그 의미가 확연히 달라져 버린다.(이익섭․ 장소원 공저. 국어학개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2003. p.42.)
의미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정주영 씨를 능가하는 대재벌의 전 재산이 오락가락하는 일도 생기게 할 수 있는 것이 띄어쓰기이다. 한문 문장의 경우이지만 다음의 경우를 보자.
어느 대재벌 급의 노인이 70이 되도록 딸은 하나 있었지만 아들은 두지 못했다. 그런데 70이 되던 해에 기적적으로 아들을 하나 낳게 되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죽었는데, 그 많은 재산은 몽땅 사위가 차지해 버렸다. 만년에 낳은 자식이라면 더욱 애지중지 깊은 사랑을 주었을 것이요, 따라서 그에게 한 푼의 재산도 남겨주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노인이 남긴 유언장이 문제였다.
“七十而生子其非吾子家産遺之女婿他人勿犯.”
이 유서는 누구에게나 다음과 같이 읽혔다.
“七十而生子 其非吾子 家産遺之女婿 他人勿犯.”
(일흔 살에 아들을 낳았으니 그것은 내 아들이 아니다. 가산을 사위[女婿]에게 물려주노니 타인은 범하지 말지니라.)
부임해 오는 원님에게 줄기차게 탄원을 해 보았으나 그 유언장 때문에 도리가 없었다. 이러구러 세월은 흘러가고 그 아들도 이제는 청년기를 넘어서기 시작하지만, 늘 가난에 쪼들려 생활 자체가 말이 아니었다.
또 새로이 원님이 부임했다. 그 아들은 헛방이지 생각하면서도 다시 송사를 일으켰다. 그 원님, 똑똑한 원님이었지만, 용빼는 재주가 없었다.
“七十而生子其非吾子家産遺之女婿他人勿犯.”
아무리 보아도 아들에게로 유산을 물려줄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의 원님은 끈질겼다.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20자가 못되는(19자이다) 그놈의 유언장과 씨름을 하였다.
“꼬기요!” 새벽닭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도 또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구나, 자책하면서 토막잠이라도 자려고 하는 순간, 아, 이럴 수가? 번쩍! 머릿속에 섬광이 흘렀다.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잠이 문제가 아니었다. 빨리 날이 새고 동헌에 나가서 송사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드디어 문제의 당사자들까지도 출석한 시간, 원님은 또박또박 유서를 읽어 내려갔다.
“七十而生子 其非吾子 家産遺之 女婿他人 勿犯.”
(일흔에 아들을 낳았다고 해서 그것이 내 아들이 아니겠는가? 가산을 그[之]에게 물려주노니 사위[女婿]는 남[他人]이다. 범하지 말라.)
(권중구(權重求). 한문대강(漢文大綱). 통문관(通文館). 1971.10. ‘권두사’의 내용을 변형한 것.)
얼마나 개운한가? 이제 70 늙마에 얻은 아들은 굶주리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게 띄어쓰기의 힘이다.
역시 같은 글에 나오는 다음 문장을 보자.
“龍雨龍雨龍雨龍龍龍不雨龍龍龍雨龍雨.”
가물이 계속될 때 비를 내리게 하는 기우제의 주문(呪文)이라고 한다. ‘龍, 雨, 不’의 세 가지 글자만 사용이 되었는데도 해석이 쉽지가 않다. 해석을 위해서는 일단 다음과 같이 띄어서 읽어야 함이 급선무이다.
“龍雨 龍雨 龍雨龍龍 龍不雨龍龍 龍雨 龍雨.”
이렇게 띄어 놓고, 기우제의 주문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해석하면 그런 대로 해석이 가능해진다.
“용아 비를 내려라, 용아 비를 내려라, 용이 비를 내려야 용이 용이지, 용이 비를 내리지 아니하면 용이 용인가, 용아 비를 내려라, 용아 비를 내려라.”
이렇게 해석을 해 보면, 용의 자존심을 건드려 가지고 비를 내리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어주는 멋진 주문이 되지 않았는가?
한때, 택시에는 다음과 같은 표어들을 붙이고 다닌 적이 있다.
“손님을 가족같이!”(①)
그런데 가끔은 “손님을 가족 같이!”(②)라고 써 놓은 것들도 보였다. ‘같이’는 붙여 쓰면 조사가 되어 ‘처럼’과 같은 뜻이 된다. 그런데 그걸 띄어 쓰면, 그때의 ‘같이’는 ‘함께’라는 뜻의 부사가 된다. 그러니까 ①은 관계가 없지만, ②는 곤란하다. 택시비는 손님이 내는데 왜 기사님의 가족과 함께 가야 하는가? 아예 ①이건 ②이건 그냥 “손님을 가족처럼!”이라고 쓰면 오해의 여지가 생길 수가 없을 것인데….
띄어쓰기, 어떻게 하면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우선 대원칙을 늘 염두에 두자.
“문장의 각 단어는 띄어 씀을 원칙으로 삼는다.” (한글 맞춤법 제1장 총칙 제2항)
이것 하나만 지켜도 절반쯤은 성공이다.
다음으로 유의해야 할 것을 알아보자.
“조사는 그 앞말에 붙여 쓴다.”(한글 맞춤법 제5장 띄어쓰기 제41항)
이것까지 지키면 3/4쯤은 문제 해결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산다.(조사)
비호와 같이 달리는 기차.(부사)
다음은 표준어 사용의 중요성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언어란 늘 변한다. 시대와 사회상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언어의 역사성과 사회성이다. 예컨대 ‘디새’라는 고어를 보고 그것이 현대어 어떤 말과 상응하는지 알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디새>지새>지>지애>지와>기와[瓦]’로 변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전공자 말고는 별로 없을 것이다.
언어란 늘 변한다. 대체로 그것은 1세대 단위로 심한 변화를 겪는다. 따라서 30년쯤에서 한 번씩 표준어 규정이라든가 맞춤법 규정을 수정해줄 필요가 있다. 한글에 대한 맞춤법 통일안이 처음 제정된 것은 1933년이다. 그런데 2세대 정도가 지난 다음에야 수정이 되었다. 1988년이 되어서야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 규정’이 새로 개정 고시되어 1989년 3월 1일부터 새로운 규정에 의해 쓰이도록 된 것이다. 그러니까 56년이 지나서야 수정이 된 것이니, 그 동안 우리 사회가 우리의 언어생활에 대하여 얼마나 등한시하여 왔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맞춤법’도 법이다. 다른 법들은 그것을 위반하면 감옥엘 간다든가 벌금이나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든가 하는 실질적인 제약이 따른다. 그런데 맞춤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받게 되는 법적인 처분은 없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까짓 맞춤법쯤이야 조금 틀리기로서니….’ 하는 안일한 생각에 젖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잘못된 생각은 하루빨리 고쳐야 하리라 생각된다.
예를 들어 보자. 시험공부를 하는 형제에게 그 어머니가 과일 한 접시를 가지고 와서 말했다. “이거 나눠 먹고들 공부해라.” 그 소리를 들은 형은 동생에게는 딱 한 개만 주고 자기 혼자서 그 과일을 거의 다 먹어버렸다.
동생이 항의했다.
“엄마가 나눠 먹으라고 했잖아?”
형이 대답한다.
“그래, 나눠 먹으라고 했지, 그래서 나눠 먹었잖아?”
동생이 말한다.
“형 혼자 거의 다 먹고 나한테는 딱 하나만 줬잖아?”
“그래서?”
“엄마 말을 안 지켰잖아?”
형이 말한다.
“야 임마, 너는 나눠 먹는다는 말도 모르냐? 나눠 먹는다는 것은 노나 먹는다는 것과는 다르단 말이다. 노나 먹는다는 것은 똑같이 등분해서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나눠 먹는다는 것은 아주 쬐끔만 떼어 줘두 된다는 말이다, 알겠냐?”
그렇다. ‘나누다’라는 말과 ‘노느다’라는 말은 그렇게 차이가 있는 것이다. 까짓 과일 정도를 먹을 때에야 뭐 그리 큰 문제일 것은 없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대재벌의 유산 상속 문제와 관련이 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건 정말 엄청난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맞춤법이나 표준어도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이상 개략적인 글쓰기에 대한 유의사항들을 말해 보았다. 좀더 구체적인 점들은 다음번 기회가 주어지면 다루도록 하겠다.
(09.9.25. 원고지 55매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