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40) 자신의 묘비명을 스스로 지었던 조운흘(趙云仡)
경북 인물열전 (40)
자신의 묘비명을 스스로 지었던 조운흘(趙云仡)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1. 慶尙道 慶州府 및 卷 24. 醴泉郡 名宦 條]
이 웅 재
조운흘(趙云仡: 1332[충숙왕 복위 1]~1404[태종 4])은 한양부(漢陽府) 풍양현(豊壤縣: 현 남양주시) 사람으로, 호는 석간(石澗) 또는 서하옹(棲霞翁)이라고도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많고 담대하여 매사에 얽매이기를 싫어했으며 세상에 영합하지 않았다.
공민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홍건적의 난 때에는 왕을 호종하여 2등공신이 되었으며 국자감직강(國子監直講)을 거쳐 전라, 서해, 양광의 삼도안렴사(三道按廉使)를 지내고, 전법총랑(典法摠郞)으로 있다가 사직하고 상주 노음산(露陰山) 기슭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석간서하옹(石磵棲霞翁)이라 칭하며 외출할 때는 반드시 소를 타고 다녔다.
우왕 때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재 등용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다시 사임하고, 광주 고원강촌(古垣江村: 현 몽촌[夢村])으로 퇴거하였다. 그곳에서 신분을 감추고 판교원(板橋院), 사평원(沙平院)을 중수하여 원주(院主)라 자칭하면서 공사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창왕 때에는 서해도 도관찰사로 나가 왜구를 토벌하기도 하고, 그 후 계림부윤(鷄林府尹), 강릉부사(江陵府使) 등을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는 시절이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환란을 피하고자 미친 사람 흉내를 내며 지냈다. 서해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에는 매양 아미타불을 불렀다. 하루는 관내 군현을 순시 중 배천(白川)에 당도하여 잠을 자는데, 새벽이 되자 밖에서 갑자기, "조운흘!" "조운흘!" 을 염송하는 소리가 들려와 가만히 살피니 배천 현감 박희문이었다. 조운흘이 괴이하여 그 연유를 물으니 박희문이 말하기를, "관찰사께서는 '아미타불'을 염송하여 성불(成佛)코저 하시니, 저는 '조운흘'을 염송하여 관찰사가 되고저 그리 했나이다." 라고 답하니 후일 이 이야기를 듣는 이 모두 웃었다 한다.
그는 또 거짓으로 “청맹(靑盲: 눈은 멀쩡하나 보지 못하는 병)이 되었다.”며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 머물렀다. 그러자 그의 첩이 자신의 아들과 서로 놀아나며 늘 눈앞에서 수작을 하였으나, 수년 동안 모르는 척하다가 난리가 진정되고서야 눈을 부비며 자신의 눈병이 나았다며 아들과 사통한 첩을 데리고 뱃놀이를 가서 그 죄를 다스려 강에 던졌다고 한다.(용재총화 3권)
조선조에 들어와 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에 제수되었으나 이를 사퇴하고 고원강촌에 퇴거하여 살았는데, 스스로 묘지명을 지었으니,
"나이 73세에 병으로 광주(廣州) 고원성(古垣城')에서 별세하였다. 자식이 없었다. 해와 달을 구슬로 삼고 청풍명월(淸風明月)을 제물(祭物)로 삼았다. 옛 양주(楊州) 아차산(峩嵯山) 남쪽 마가야(摩訶耶)에 장사를 지냈다."고 했는데, 현재 묘지와 비석은 없고 묘비명만『고려사』권112 조운흘전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와 관련된 기생 홍장(紅粧)과 관련된 이야기도 널리 회자(膾炙)되는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고려 우왕시절이었다. 강원감사 박신(朴信)은 백성을 잘 다스려 칭송이 드높았다. 그는 강릉기생 홍장(紅粧)을 깊이 사랑하였다. 홍장은 당시 2백여 명 기생 가운데 가장 출중한 미모를 지녔다고 한다. 강릉부사 조운흘이 홍장과 박신의 사이를 알고 한번 놀려주고자 꾀를 냈다. 그는 홍장이 갑자기 죽었다고 박신에게 거짓으로 알리니 박신은 몹시 서러워하였다. 박신(朴信)이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갈 때였다. 조운흘은 경포대 한송정(寒松亭)에서 송별연을 베풀었다. 석양에 경포호수에 이르니 경호(鏡湖)는 십 리나 뻗쳐 물결과 주변이 어울린 아름다움이란 비길 데가 없었다. 두 사람의 취흥이 무르익었을 때, 문득 멀리 호수를 바라보니 그림배 한 척이 스르르 미끄러져 오는데, 그 속에 아름다운 여인 하나가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그 소리가 신선세계의 소리처럼 심금(心琴)을 울렸다. 박신은 놀라 물으니, 조부사는 이는 필시 선녀의 놀음일 것이라 하면서 우리도 가까이 가서 같이 놀아보자고 하여 호수에 배를 띄웠다. 여인이 탄 배가 가까이 왔다. 선녀처럼 보였던 여인은 분명 홍장이었다. 박신은 깜짝 놀랐다. 그제서야 조부사에게 속았음을 깨달았다. 세 사람은 경포호수에서 한바탕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떠난 박신을 두고 홍장이 노래한다.
울며 잡은 소매 떨치고 가지마소.
초원(草原) 장제(長堤)에 해 다 저물었네.
객창(客窓)에 잔등(殘燈) 돋우고 세워보면 알리라.
1년 후 박신은 순찰사가 돼 강릉에 다시 들렀는데, 홍장의 굳은 절개를 보고 그녀를 한양으로 데려가 부실을 삼았단다.
조선 효종 때의 신후담(愼後聃)은 이와 같은 홍장과 박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남겼다. 「홍장전」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김태준(金台俊)의 『조선소설사』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09.10.3. 원고지 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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