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수필 순례 38) 영장산객전(靈長山客傳)
(고전수필 순례 38)
영장산객전(靈長山客傳)
안정복 지음
이웅재 해설
객은 광주인(廣州人)이니 성은 모(某)요, 이름은 모요, 자는 모이다. 그 자를 인하여 거처하는 집에다 순(順)이라고 편액을 걸고는 말했다.
“천하의 일은 순리(順理)뿐이다.”
영장(靈長)은 산 이름이다. 그 속에서 글을 읽으며 자호(自號)를 ‘영장산객(靈長山客)’이라고 하였다. 어려서는 몸이 약하여 병을 달고 살더니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학문에 사우(師友)가 없어 마음 내키는 대로 백가서(百家書)를 두루 보았으며, 관중(管仲), 상앙(商鞅), 손무(孫武), 오기(吳起), 감공(甘公), 석신부(石申夫), 경방(京房), 곽박(郭璞), 순우의(淳于意), 편작(扁鵲)의 책을 모두 연구하느라고 여러 해를 보냈지만, 소득이 없었다. 뒤늦게 그것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았으나 정작 시원하게 버리지 못하다가, 26세에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얻어 읽어 보고서야 비로소 이 학문이 귀하다는 것을 알고 탄식하였다.
“‘제 집에 무진장(無盡藏)으로 있는 것을 버려두고 깡통 들고 남의 대문에서 비렁뱅이 노릇을 했다.’는 말은 옛사람이 먼저 깨달은 바가 아니겠는가.”
드디어 손수 베껴 입으로 외웠다. 한편으로는 역대의 사기를 두루 다스려 치란(治亂)의 자취를 연구하고 안위(安危)의 기미를 살피며 제작(制作)의 근원을 분석하고 시비(是非)의 단서를 분별하기를 또한 여러 해 동안 계속하였는데, 그 때문에 내면으로 향하는 공부가 또한 전일하지 못했다. 널리 본 나머지 비록 얻은 것은 없었지만 말이나 의논을 내놓으면 그런대로 들어볼 만한 것이 있었기에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이 간혹 실제로 터득함이 있다고 여기기도 했으나 그 내면을 알고 보면 텅텅 비어있을 뿐이요, 이로 인하여 헛된 이름으로 세상을 속인 셈이 되어 버렸다. 기사년 여름에 천거되어 후릉 참봉(厚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겨울에 이르러 또 만녕전 참봉(萬寧殿參奉)에 제수되자 명예를 사려는 것처럼 보일까봐 명에 응하였으나 그가 좋아하는 바는 아니었다. …(중략)…
갑술년 2월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승진하고 통훈대부(通訓大夫)의 품계에 이르렀는데, 모두가 순서에 따라 오른 자급(資級: 벼슬아치의 위계)이었다. 이 해 6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영장(靈長)의 옛 집으로 돌아가 여막(廬幕)을 지켰는데, 병이 나자 그대로 죽겠다는 마음을 먹고는 문을 닫아걸고 교유를 끊은 채 한결같은 마음으로 운명을 기다렸으니, 이때에 나이 43세였다.
객이 평일에 제갈량(諸葛亮)과 도연명(陶淵明)의 위인을 사모하였는데,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와 진송(晉宋)의 전(傳)은 자상함과 소략함이 뒤섞여 있고 빠진 것도 많다 하여 두루 전기(傳記)를 채집하여 두 사람의 전(傳)을 만들어 항상 읽으면서 그들을 만나기나 한 듯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흉내를 내어 뽕나무 800그루와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집의 좌우에다 심었는데, 뽕나무는 600그루가 말라 죽고 버드나무는 한 그루가 시드니, 일찍이 웃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망령되게 옛사람을 본떴더니 사물마저도 같잖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제갈량에게는 4분의 3이 미치지 못하고 도연명에게는 5분의 1이 미치지 못하니, 내가 누구를 속이겠는가.”
글을 읽으면 항상 대의(大義)만을 보고 심하게 해석하려 들지 않았으니 이 또한 두 사람이 하던 바를 사모한 것이다. 자질과 성품이 촌스럽고 어두우며 엉성하고 우활하여 백에 하나도 능한 것이 없었으나, 한 가지 스스로 허여한 것은 남의 선을 보면 좋아하고 남의 능함을 보면 몸을 굽혀 배우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사물을 대하여는 거스르는 법이 없고 남을 심하게 꾸짖지 않았기에 일찍이 한 번도 남에게 무안을 당한 일이 없었고, 벼슬하는 5년 동안 분수에 맞게 분주하여 한 사람도 채찍질한 적이 없고 사(私)로써 공(公)을 해치지 않았으며 옛것을 고집하여 세속을 어기지 않았으므로 아랫사람들은 그 간편함을 즐거워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의 화락하고 평이함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들은 처세를 잘한다고 했지만 그것 또한 마음을 쓰지 않았다.
집이 가난하여 서책이 없으므로 즐겨 적어서 잊어버리는 것에 대비하였으나 글을 짓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으니, 이 또한 문사(文辭)에는 재주가 없음을 알아서 그런 것이었다. 저술한 것이 농 안에 가득 차 있지만 모두 탈고(脫藁)되지 않은 것이니, 비록 연석(燕石: 송 나라의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연산[燕山]에서 주운 돌을 옥이라 믿어 세상 사람의 웃음거리가 된 고사. 『太平御覽』)처럼 스스로 귀중하게 여기지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으로서 한갓 심력만 소모했을 뿐이지 긴요하지도 않은 것이 분량만 많았다.
♣해설:
지은이 안정복(安鼎福)은 조선 정조 때의 학자(1712~1791)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백순(百順), 호는 상헌(橡軒) 또는 순암(順菴)이다. 제천(堤川)에서 태어나 조부의 임지를 따라 여러 지방을 다니다가, 25세 때 경기도 광주 경안면(慶安面) 덕곡리(德谷里)에 정착하였다. 그의 집안은 당시의 중앙정계로부터 소외되고 있었던 남인 계열로 아버지는 관직에 나간 적이 없었으며, 그 자신도 한 번도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문인으로 지내면서 그의 학문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학문과 덕행이 널리 알려지면서 이익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나가 사헌부감찰, 목천현감(木川縣監) 등을 역임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라 광성군(廣成君)에 봉해지기도 하였다.
특히 과거의 역사, 지리학을 비판하고 우리 역사의 정통성과 자주성을 세웠다. 저서에 『동사강목(東史綱目)』,『순암집(順菴集)』,『가례집해(家禮集解)』,『잡동산이(雜同散異)』 따위가 있다. 좌참찬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영장산객전(靈長山客傳)」은『순암집(順菴集)』제19권에 실려 있다. 번역은 『한국고전종합 DB』를 따랐으나, 부분적으로 윤문하였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