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쓰기 43) [메모의 중요성]
(수필 쓰기 43) [메모의 중요성]
이 웅 재
나는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이 부럽다. 얼마 전에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수목 드라마 ‘아이리스(IRIS)’에서 보여주었던 주인공 최승희(김태희 분)와 김현준(이병헌 역)의 첫 술자리에서 독한 폭탄주를 직접 제조해 원샷하는 당찬 매력의 최승희의 모습도 매력 덩어리였지만, 김현준의 그 기억력은 어쩌면 ‘아이리스’의 시청률을 올려주는 디테일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극중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한 번 본 소주병의 바코드 넘버까지도 정확히 재현해내는 기억력을 부러워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첩보물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그처럼 비상한 기억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걸 보면서 나는 태생적으로 스파이가 될 자질은 전혀 없었다는 자괴감과 아울러 안도감을 가져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잊지 않기 위해서는 기록을 하는 수밖에는 없다. 구멍가게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외상 장부를 꼼꼼히 작성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최근에는 그런 사람이 별로 없지만, 몇 십 년 전에는 문맹자(文盲者: 요즈음에는 非文解者라고 한다)가 적지 않았는데, 그런 사람에게는 치부책(置簿冊)이 없었다. 그렇다고 외상값 떼어먹을 생각을 했다가는 큰코를 다친다. 그들은 문자해득을 할 수 없는 결점을 기억력으로 보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구멍가게 수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보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일들의 경우라면 기록해 두는 일보다 더욱 정확하게 치부하는 방법은 없는 것이다.
조영탁의 ‘행복한 경영 이야기’ 제1390호(2010.2.23)에서는, “혹자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을 ‘적’지 않은 ‘자’는 ‘생존’할 수 없다고 우스개로 말하곤 합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기억은 짧고 기록은 길다.”고 단언한다. 그렇다. 기억은 짧고 기록은 길다. 그래서 기록들을 한다. 기록이 있어서 역사가 이루어진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그래서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이 된 것이다. 이하윤(異河潤)의 「메모광」이라는 수필을 보아도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가 있다.
어느 때부터인지 나는 메모에 집착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와서는 잠시라도 이 메모를 버리고는 살 수 없는, 실로 한 메모광(狂)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버릇이 차차 심해 감에 따라, 나는 내 기억력까지를 의심할 만큼 뇌수의 일부분을 메모지로 가득 찬 포켓으로 만든 듯한 느낌이 든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을 때, 흔히 내 머리에 떠오르는 즉흥적인 시문(詩文), 밝은 날에 실천하고 싶은 이상안(理想案)의 가지가지, 나는 이런 것들을 망각의 세계로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내 머리맡에는 원고지와 연필이 상비되어 있어, 간단한 것이면 어둠 속에서도 능히 적어 둘 수가 있다.
가령, 수건과 비누를 들고 목욕탕을 나서다가 무슨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면, 나는 이것을 잊을까 두려워, 오직 그 생각 하나에 마음이 사로잡히게 되나, 거기서 연상(聯想)의 가지가 돋치는 다른 생각 때문에, 기록할 때까지 기억해 두지 않으면 안 될 수효가 늘어, 점점 복잡하게 된다든지, 또는 큰길을 건널 때 자동차를 피하다가, 혹은 친구를 만나 인사와 이야기하는 얼마 동안, 깨끗이 그 생각을 잊어버리는 일이 있다. 생각났던 것을 생각하나,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 내지 못할 때의 괴로움과 안타까움은 거의 나를 미치기 직전에까지 몰아가곤 한다. 그러므로 목욕이나 이발 시간같이, 명상의 시간이 주어지면서도 연필과 종이가 허락되지 않는 때처럼, 나 같은 메모광에게 있어서 부자유한 시간은 없는 것이다.…쇠퇴해 가는 기억력을 보좌하기 위하여, 나는 뇌수의 분실(分室)을 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메모 벽(癖)은 정리벽(整理癖)으로 이어지고, 그 정리벽은 다시 수집벽(蒐集癖)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니, 기억력만 믿고 지내는 것보다는 늘 메모하는 습벽(習癖)을 기르는 일이 훨씬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특히 글쟁이들에게는 메모하는 습관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가 있다. 필자의 경우를 예로 보자.
이틀째 계속되는 황사(黃砂) 현상으로 서울을 비롯한 몇몇 지역의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는 휴업 조치까지 내려졌다. 며칠 전 공주(公州)의 상가(喪家)에서 밤을 꼬박 새우는 바람에 슬금슬금 감기 기운이 돌기 시작하던 것이 사상 초유의 황사 현상과 결탁하여 내 몸을 여기저기서 공략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처럼 계획했던 영암(靈岩)의 월출산행(月出山行)을 포기할 순 없었다. 억지로 몸을 추스려 고속 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탔으나 머릿속은 계속 멍한 상태였다. 창 밖을 바라보니 신문지 조각들이 이리저리 날리면서 달리는 차량들에게 치이고 있었다.
‘인재(人才)가 국부(國富)다’라는 조선일보의 기획 기사도 승용차 바퀴에 깔렸고, ‘가계 빚 2,300만 원’도, ‘물가․무역 수지 빨간 불’도 찢기며 흩어지며 저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바람은 긍정적인 기사나 부정적인 기사를 가리지 않고 휘날리게 했고, 달리는 자동차들은 ‘중도 좌파 정당 새판’도 찢어 버렸고, ‘현 민주당 정책’을 고수하겠다는 모 민주당 대선 후보의 정견도 묵사발을 만들고 있었다. 황사 바람 앞에서는 그 모두가 무용지물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았다. 자연 현상 앞에서는 정치, 경제, 교육, 문화의 그 어떤 인위적인 계획이나 의도들도 무력화(無力化)되고 있었다.
(「월출산 탐방기」에서)
신문지 조각들이 이리저리 날리면서 달리는 차량들에게 치이고 있는 광경에 대한 묘사 부분이다. ‘인재(人才)가 국부(國富)다’라는 조선일보의 기획 기사, ‘가계 빚 2,300만 원’, ‘물가․무역 수지 빨간 불’ 등의 표현은 메모해 두지 않았다면 쓰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메모 덕분에 버스를 타고 가면서 바라본 창 밖의 광경이 생생하게 묘사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현장감을 살리는 데 아주 유효적절하다고 하겠다. 바꾸어 말하면 사실성을 배가시켜 주는 묘사가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다음과 같은 글도 메모의 덕을 톡톡히 본 글이다.
극락교(極樂橋)를 건너니 커다란 자연석에 “이 뭣고란?”이라 쓰인 글씨 아래, 그에 대한 설명이 친절했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선(禪)을 참구(參究)하는 데 의제(疑題)로 하는 화두(話頭) 1,700가지 중 ‘父母未生前 本來面目是甚磨(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 나의 참모습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있는데, ‘참나(本來面目)’, 곧 ‘진아(眞我)’를 깨달으면 생사를 해탈하게 된다고 했다. 속리산 탐방 시에 ‘이 뭣고’란 다리가 있어 그 의미를 알 수 없어 했었는데, 그걸 여기 와서 알게 되어 무척 반가웠다. ‘참나[眞我]’까지 깨치지는 못했어도 ‘이 뭣고’의 의미는 깨우치게 된 것이다. 아쉬운 것은 ‘천칠백 가지가 있읍니다’의 ‘있읍니다’란 맞춤법에 어긋나는 표기. 그러나 그것은 ‘있습니다’를 표준어로 정하기 전의 석비(石碑)일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甚磨’는 ‘甚麽)’로 바로잡아 주었더라면 하는 점이었다. ‘갈 마[磨]’가 아니라 중국에서만 쓰는 중자(中字)로서의 ‘어찌 마, 무엇 마[麽]’를 쓰는 것이 옳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옆에는 “만암대종사 고불총림 도량(曼庵大宗師 古佛叢林 道場)”이라 쓰여 있는 석비와 ‘고불총림 백양사’에 대한 안내 표지판도 있었다. 이 절은 서기 632년(무왕 33년, 임진) 여환선사(如幻禪師)가 개창(開創)한 것으로, 선조 7년(1,574년) 환양선사(喚羊禪師)가 백양사(白羊寺)로 개칭하였다 한다. 환양선사가 설법을 하였더니 흰 양들이 와서 들었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니, 그는 법력(法力)이 대단한 선사였을 것이다. (「내장산 탐방기」에서)
위의 글들에서 느낄 수 있듯 메모는 특히 기행문을 쓸 때에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 하겠다. 그렇게 메모를 하면서 가다 보면, 수백 개의 계단이나 깔딱고개도 주위 풍광을 즐기며 여유롭게 쉬엄쉬엄 갈 수가 있어서 좋은 면이 있다. 외국 여행과 같은 때에는 열심히 가이드의 말을 받아적다 보면 가이드가 신이 나서 더 많은 유익하고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는 득(得)을 볼 수도 있다. 대체로 후미(後尾)에서 따라가야 하는 단점이 있지만 말이다. 때로는 간단한 그림을 그려두는 일도 필요하다. 특히 절간 같은 곳엘 갔을 때에는 각 건물의 위치도 따위를 대충 그려 두면 매우 요긴할 수도 있는 것이니 유념할 일이다. 초기의 금강산 관광을 다녀올 때에는 그 메모의 습벽 때문에 혼이 난 적도 있었다. 그때의 글 일부분을 보자.
삼선암과 독선암이 구름을 타고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면 귀면암은 험상궂게 노려보며 마귀들을 접하지 못하게 으름장을 놓고, 만물상 바위들은 자신의 자태를 안개로 감싸면서 신비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송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고려의 국서를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고려는 물 밖에 있는 야만이니 귀중한 서적은 보내지 말라고 하는 등 우리나라를 별로 탐탁하지 않게 보았던 소동파까지도 "원생고려국 일견금강산(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이라고 하여, 금강산 구경을 평생의 소원으로 여겼던 것이니, 다시 더 말하여 무엇하랴?
설명 들으랴, 감상 적으랴 바쁜 내게 갑자기 북쪽 남자 관리원 한 사람이 부리나케 쫓아왔다. 관리원, 말이 좋아 관리원이지, 남한의 등산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관찰하는 감시원,우리나라로 말하자면 한때 서슬이 퍼렇던 안기부원쯤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무얼 적습네까?”
북한 사람 특유의 어감에는 심문조의 의미가 섬뜩하게 묻어 있었다.
“아, 금강산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경치를 메모하고 있습니다.”
“그런 건 책자에 다 나와 있지 않습네까?”
“내가 실제로 느낀 감상은 그때그때 본 경치와 함께 적어놓지 않으면 나중에 다시 그때의 느낌을 알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한 번 좀 봐도 되겠습네까?”
겉으로 표현하는 말은 겸손한 듯했지만, 이건 은근한 강요였다. 나는 내 손바닥만한 수첩을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한 쪽으로만 가지가 자란 소나무의 그림과 함께 “초속 80m의 바람 때문”이라는 글씨가 씌어 있었다. 이곳의 소나무들은 모두 5엽송으로서 골짜기로 내리부는 바람 때문에 한 쪽으로만 가지가 쏠려 있었던 것이다. 남한의 다른 산에서도 가끔은 볼 수 있는 모양이었지만, 이곳의 계곡 쪽으로 자라 있는 소나무는 한결같이 그와 같은 모습이었다.
“이런 걸 왜 적습네까?”
꽤나 끈질기게 따져 묻고 있었다. 나도 조금은 귀찮고 짜증이 나서 약간 퉁명스레 대답했다.
“나중에 기행문이라도 하나 끼적여 볼까 해서 그럽니다.”
그제야 감시꾼은 고개를 약간 주억거리고 있었다. 어느 새인가 여자 관리원도 한 사람 따라붙고 있었다. 나중 얘기지만, 내 아내도, 친구 K와 그의 처도 모두들 ‘이키! 걸렸구나. 하고 간이 콩알만 해졌다는 것이다. (「금강산 기행」에서)
기행문을 쓸 때에만 메모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음과 같은 글도 메모 없이는 쓰기가 힘든 글이다.
장맛비가 전국을 휩쓸고 지나갔다. 주방 쪽 창문을 통해서 탄천 변의 제2종합운동장 쪽을 바라보니 산책로에 물이 빠지고 드문드문 산책하는 사람들이 보여서 나도 집을 나섰다. …
물이 빠진 산책로는 지저분했다. 여기저기 진흙이 난장판을 이루기도 했고, 온갖 오물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휴지 조각, 비닐, 스치로폼, 페트병, 뿌리가 뽑힌 채 떠내려오다가 물가에 자라고 있는 조금 키가 큰 나무들에 걸려 있는 잡초 등등 종류도 다양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걷노라니 지루한 감이 싹 가신다.
빠알간 빛깔의 등산모 하나는 나무 둥치의 위쪽에 걸려 있다. 그런 대로 제자리를 찾아든 모양새다. 늘 위쪽에서만 생활하던 습관이 그렇게 나무 둥치의 위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무에게 무슨 모자가 필요할 것인가? 이제는 그만 가게 기둥의 입춘방처럼 격에 맞지 않는 처지로 전락해 버리고 만 신세일 뿐이다.…
그 옆쪽으로는 소주병 2개가 의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하나는 ‘참이슬’, 하나는 ‘처음처럼’이다. 겉으로는 어깨동무를 했는데도 서로가 저 잘났다고 으스대는 모습이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이번에는 예쁜 모양의 화장품 병이 보인다. 한 동안 아리따운 아가씨의 사랑을 듬뿍 받았을 터인데, 지금은 진흙탕에서 뒹굴고 있다. 아로나민 페트병도 있다. 남의 건강을 지켜주느라 수고하더니, 이제는 쓸모가 없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 저기 축구공이 하나 둥둥 떠내려오고 있다. 동네 조무래기들과 매일 만나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던 시절이 그리워서 어쩔거나. 그러나 저 공은 흘러가다가 어딘가 쯤에서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건져지겠지. 그리고는 그 새로운 주인과 함께 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가 있게 될 것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손수건 하나가 풀숲에 걸려 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둔치에 나와 군데군데 만들어 놓은 나무 의자에 앉아서 달콤한 정담을 나누고 있을 때, 아가씨가 남자 애인에게 깔고 앉으라고 펴 놓았던 것인지 꽃무늬가 알록달록하다. 남자 애인의 궁둥이를 받쳐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지금은 지저분하게 더러워진 모습이다. 그들의 사랑은 해피엔드로 잘 마무리되었을까?
신문지와 뒤범벅이 된 채, 동화책도 보인다. 중가운데가 펼쳐진 채 바람이 불면 책장이 펄럭거린다. 신데렐라가 고개를 빠끔히 내밀다가 사납게 흐르는 흙탕물을 보고는 놀라서 재빠르게 책장 속으로 숨어 버린다. 철수도 순이도 책장 밖으로 나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빨리 날이 개어 맑은 햇빛이 비치고 그들이 서로 손을 잡고 탄천 둔치로 나와 함께 산책로를 걷게 되기를 빌어본다.…
아니, 저건 편지 아니야? 진흙에 뒤범벅이 된 편지지에는 깨알 같은 글씨들이 안쓰러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가지고 있던 기다란 우산대로 뒤적여 보았더니 그만 글씨들이 진흙에 묻혀버려 알아볼 수가 없게 된다. “어제도 나는…” 하는 구절 다음부터는 그냥 흰 백지 상태다. 마무리가 되지 않은 편지였었나 보다.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볼펜 하나가 뒹굴고 있었다. 얼른 주워서 옆쪽 괴어 있는 물에 씻은 다음, 주머니에서 늘 가지고 다니던 파지를 꺼내어 끄적여 보니 글씨가 써진다. 그래, 이 볼펜을 가지고 가서 저 쓰다가 만 편지의 뒷부분을 완성시켜 주자. 그러나 문제는 받을 사람의 주소를 모른다는 점이다. 까짓것, 받을 사람을 모르면 어떤가? 편지가 완성된다는 것이 중요한 일이지.…
탄천 둔치의 산책로에는 온갖 것들이 떠내려오다가 걸려 널부러져 있었다. 기쁨도 슬픔도, 달콤함도 위태로움도, 사랑도 미움도, 욕망도 관용도, 자연은 그 모든 것들에게 공평했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종족 번식을 위한 눈물 나는 노력도 콸콸 흐르는 흙탕물과 함께 했던 것을 보고, 모든 것은 우리가 어떻게 자연을 이용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마음 깊이 깨달았다.
(「장맛비에 떠내려 온 것들」에서)
관람기를 쓸 때에도 메모는 꼭 필요하다. 연극, 영화, 마당극, 오페라 등등을 관람할 적에도 볼펜과 메모지는 아주 유용하다. 그런 것 없이 하는 관람은 나중에 ‘그런대로 볼 만했다’든가 ‘재미있었다’는 등의 간단한 기억만이 남을 뿐이니, 비싼 관람료에 값할 ‘남는 것’이 없는 ‘구경거리’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뎅! 뎅! 60년대 이후에는 듣기 어려운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지자, 장내는 칠흑으로 변했다. ‘빛이 있으라!’ 성경을 본 따 마음속으로 한번 웅얼거렸더니 빛이 드러난다. 완애(이호재 분)의 고물상이다. 그 고물상은 꽤 값나가는 땅이란다. 그런데도 그는 늘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궁상을 떤다. 그날도 라면을 먹고 난 다음의 설거지를 하고 있는 장면으로부터 연극은 시작되었다.
가게의 출입문이 빼곰히 열린다. 자룡(오영수 분)이다. 느닷없이 완애의 손에 들려 있던 냄비가 날아간다. 놀라서 문이 닫힌다. 다시 설거지하는 완애. 다시 살그머니 문을 여는 자룡. 이번엔 컵이 날아가던가? 문은 급히 닫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자룡은 “어휴, 라면 냄새!” 라고 떠벌이며 호기 있게 문을 열치고 들어온다.
“나가!”
완애의 위협.
“배 째라!”
자룡의 느글느글한 대답. 그러나 그는 어느새 무릎을 꿇었다.
“이번이 끝이다. 이틀 동안 오들오들 떨었다!”
비굴함이 묻어난다. 그는 늘 그런 식으로 완애에게 얹혀살았던 것이다. 국민학교(그땐 국민학교였다고들 우긴다.) 동기동창으로 50여 년 동안을 함께 지내온 완애는 할 수 없이 자룡을 또다시 받아들이고 만다.
“일어나!”
“고마워!”
자룡은 그러면서도 이죽거린다.
“돈이 그렇게 무섭냐? 돈에 날이 서 있냐?”
그건 분명 관객들을 향해 하는 말임에 틀림없었다. ‘돈이 그렇게 무섭냐?’
완애가 받는다.
“그러는 너는? 돈이 별거 아니라면서 딸년에게 손은 왜 벌리냐?”
티격태격은 계속된다.
“이 알짜배기 땅값만 해도 어딘데, 맨날 라면만 먹고 지내니…. 재산 물려줄 처자식도 없는 놈이, 그렇다고 복지재단에 기부할 놈도 아니면서. 자, 60이다.”
돈 봉투를 건넨다. 완애는 그의 그런 입을 틀어막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강구한다. 한쪽 구석에 있는 낡은 책상에서 백지와 볼펜을 가지고 온다.
“자, 각서 쓰라구. 부르는 대로 써! 나, 자룡은…, 공금을 들고 게임장 가지는 않는다.…10월 21일. 자룡 씀.”
투덜거리면서도 자룡은 완애가 시키는 대로 한다. 쫓겨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개 8마리는 네가 멕이고 그 똥도 치워주어야 한다…. 잡아먹을 수 있는 똥개도 아니고….”
그때 때르르릉! 전화 벨이 울린다. 완애가 받지 않자 자룡이 받는다. 다혜(역시 국교 동창이다.)의 전화다.… (「우리 모두, 언덕을 넘어서 가자」에서)
이런 글을 어찌 메모 없이 쓸 수가 있을 것인가? 볼펜과 메모지, 글쟁이들에겐 애인보다도 소중한 존재가 바로 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