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45)겨우 10살 때 금위도지가 되었던 배정지(裵廷芝)
경북 인물열전 (45)
겨우 10살 때 금위도지(禁衛都知)가 되었던 배정지(裵廷芝)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6. 慶尙道 大丘都護府 人物 條]
이 웅 재
배정지(裵廷芝:1259[고려 고종46]-1322[충숙왕 9])는 자(字)를 서한(瑞漢), 호를 금헌(琴軒)이라 하며, 초명(初名)은 공윤(公允)으로 본관은 대구[달성]이다. 아버지는 추증(追贈) 통헌대부(通憲大夫) 민부전서(民部典書) 배영(裵瑩)이요, 어머니는 우계군부인(羽溪郡夫人)으로 내시 양온령동정(良醞令同正) 이신송(李臣松)의 딸이다.
대구 배씨의 시조 배현경(裵玄慶)은 뛰어난 장수로서, 홍유(洪儒),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知謙), 유검필(庾黔弼)과 함께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서 후삼국(後三國)의 어지러운 세상을 평정하고 최초의 통일왕조 고려를 개국하도록 만드는 데 으뜸가는 공을 세운 사람이다. 원래 이름은 백옥삼(白玉衫)이었다고 하는데, 개국 공신이 되면서 사성(賜姓)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배(裵)씨들은 이와 같은 개국공신의 후예였던 만큼 고려조에서 융성한 대접을 받았다.
『고려사』108권 열전21 및 『고려명신전』(南公轍 저)을 보면, 배정지는 나이 겨우 10세에 금위(禁衛:고려시대에, 궁중을 지키고 임금을 호위, 경비하던 친위병. 禁軍이라고도 한다)에 소속되어 도지(都知)가 되었다고 한다.
1270년(원종 11)에 대몽골 전쟁으로 천도(遷都)했던(1232년) 강화(江華)에서 옛 도읍지 개경(開京)으로 다시 옮겨올 때 그의 나이가 11살이었는데, 말고삐를 걸머지고 왕을 호종(扈從)하여 그 공로로 대정(隊正: 고려시대 종9품 軍官)에 임명되었다.
1291년(충렬왕 17)에는 별장(別將)으로 인후(印侯)를 따라 연기현(燕岐縣)에서 합단(哈丹: 몽골인으로 원 나라의 홀필렬[忽必烈] 때 세력을 키워 반역을 했다가 패배한 내안[乃顔]의 잔당 두목으로 고려 충렬왕 16년에 2만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여, 한때 강원도 원주에 주둔하기도 하는 등 막강한 세력을 지녔었다.)을 격퇴하였다. 이때 그가 칼을 빼어 말을 달리면 가는 곳마다 바람에 풀이 쓰러지듯 적이 쓰러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적의 화살이 날아와서 보거(輔車: 광대뼈와 아래 이틀 사이)를 꿰뚫어 피가 철철 흘렀는데도 개의치 않고 상처를 싸맨 채로 다시 싸워서 적을 베고 귀를 잘라온 것과 포로로 잡아온 것이 부지기수였다. 그 공로로 벼슬이 뛰어올라 중랑장(中郞將)에 임명되었다.
인후(印侯)가 그를 데리고 원나라에 갔을 때에는 원나라 황제가 그를 불러서 보고는 말하기를 “과연 용사(勇士)로다.” 하면서, 은 50냥을 하사했다고 한다.
그 후 양부(兩府)에서 추천하여 충청도와 전라도 두 도(道)의 찰방(察訪: 고려 말에는 사회혼란으로 인해 역제(驛制)가 크게 문란해졌는데, 상업이 발달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정부 관료들이 역을 개인적으로 많이 이용했고, 이로 인해 부담이 커진 역리들이 도망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공양왕 때 조준[趙浚]의 건의로 역마다 6품관을 역승[驛丞]으로 임명하여 역을 관리하게 했다. 그 역승을 감찰하는 직이 찰방이다.)이 되어 간악하고 교활한 자들을 징치(懲治)하고 의탁할 데가 없는 고아와 노인들을 보호했으므로 온 관내가 평안하게 되어 칭송이 자자했다.
충선왕(忠宣王)이 왕위를 물려받자 호군(護軍)에 임명되었다. 왕이 말했다.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데는 농사보다 나은 것이 없다.”
그러면서 전농사(典農司)와 유비창(有備倉)을 설치하기로 하였는데, 배정지에게 그 직무를 맡도록 하였다.
1318년(충숙왕 5)에는 탐라(耽羅)에서 김성(金成) 등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배정지를 탐라존무사(耽羅存撫使)로 보내서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돌아온 후에는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임명하였다.
1321년(충숙왕 8)에는 당쟁(黨爭)이 일어났는데, 그에 연루되어 곤장을 맞고 죽림(竹林:지금의 통영?)의 방호(防護)로 유배(流配)되었다. 그의 아들 배천경(裵天慶)이 아버지 대신 귀양을 가겠다고 요청을 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둘이 함께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귀양에서 풀려나 돌아온 후에는 문을 닫아걸고 병을 핑계로 삼아 일체 사람들과의 만남을 사절하고 날마다 거문고와 바둑으로 낙을 삼아 지내다가 이듬해에 죽으니, 향년 64세였다.
배정지는 수염이 많고 머리털은 희었으며 생김새가 멀쑥하고 장대하였으며, 사람들은 모두 그의 군인으로서의 지략(智略)이 우수한 것에는 탄복하였으나 관리로서의 유능한 점은 알아주지를 못하였다. 관직은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그는 입 밖으로 재물과 이익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는 바, 집에는 단돈 열 냥도 없을 정도로 청렴하였으며, 글씨를 잘 썼다.
낭장(郎將) 정승백(鄭承伯)의 딸과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었다. 도원수(都元帥)를 지낸 아우 배지란(裵芝蘭)과 함께 가문 중흥에 공이 컸다. 장남인 배성경(裵成慶)은 공민왕 때 과천(果川)에 침입한 홍건적을 토벌하다가 아들 배광유(裵光裕)와 함께 순절하였으며, 둘째 아들 배천경(裵天慶)은 충렬왕 때 동북면(東北面) 병마사를 지냈으며, 공민왕(恭愍王)을 호종하여 단성강절공신(端誠康節功臣)으로 금자숭록대부(金紫崇祿大夫)에 올라 달성군에 봉해졌고, 막내인 배함경(裵咸慶)은 맏형인 성경과 함께 홍건적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정충효절공신(貞忠效節功臣)으로 검교장군(檢校將軍)에 올라 명성을 떨쳤다.
묘지(墓誌)는 진현관(進賢館) 대제학(大提學) 이제현(李齊賢)이 지었으며, 글씨는 박유(朴濡)가 썼다. 나주의 초동사(草洞祠)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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