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인물열전

경북 인물열전 (47)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鄭云敬)

거북이3 2010. 4. 26. 18:36

경북 인물열전 (47)

   친우들에 의해 개인적인 시호를 받았던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鄭云敬)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5. 慶尙道 奉化縣 人物 條]

                                                                        이  웅  재

 

 봉화 정씨 집안에서 처음으로 정식 벼슬아치가 나온 것은 정균(鄭均)의 아들 정운경(鄭云敬:1305∼1366) 때부터이다. 정운경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이모 집에서 자랐다. 그는 처음에 봉화 부근에 있는 영주향교(榮州鄕校)를 다니다가, 뒤에는 그보다 격이 높은 복주(福州, 지금의 安東)의 향교로 이적하였는데, 학교 성적이 매우 뛰어났다.

 시골의 청년향리 운경은 복주에서 사록(司錄)의 벼슬을 지내던 7세 연상의 가정 이곡(稼亭 李穀)과 사귀게 되었는데, 그와 관동지방을 함께 유람하기도 하였다. 그 뒤 정운경은 한림(翰林)을 지낸 외삼촌 안분(安奮)을 따라 개경으로 왔다. 아마 충숙왕 무렵이었을 것이다. 개경에 온 운경은 12도(徒)와 교유하였는데, 안축(安軸)이 그의 재주를 칭찬하였다고 한다.

 정운경은 경상도 영해부(寧海府)와 개경 부근의 삼각산에서 몇 년간 독서하다가 개경에서 공생(貢生: 지방에서 선발되어서 중앙조정에서 실시하는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가진 사람)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1326년(충숙왕 13)에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1330년에는 동 진사(同 進士)에 급제하고, 이듬해 상주목 사록(司錄)에 제수된 뒤 전교교감(典校校勘), 주부(注簿), 도평의 녹사(都評議錄事), 삼사도사(三司都事), 통례문(通禮門 :고려 때 조회, 의례를 맡아보던 관청) 지후(祗候), 전의주부(典儀主簿 )등을 거쳐 1343년(충혜왕 복위 4)에 밀성군(密城郡) 지사가 되었다.

 그가 상주사록(尙州司錄)으로 지낼 때, 용궁(龍宮:예천군 용궁면) 감무(監務)가 뇌물을 받았다고 무고하는 자가 있어서, 안렴사(按廉使)가 정운경을 보내어 국문하게 하였다.

 정운경이 용궁에 이르러 감무를 보고는 물어 보지도 않고 돌아와서 말하기를, “관리가 탐하고 더러운 것이 비록 악덕(惡德)이라고는 하지마는, 재주가 족히 법을 농간하고 위엄이 족히 사람을 두렵게 할 만한 자가 아니면 하지 못하는 법인데, 지금 감무가 늙고 또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니, 누가 뇌물을 주려 하겠는가.” 하였다. 안렴사가 과연 그것이 거짓으로 고발한 것을 알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근래에 관리들이 가혹한 짓을 잘하는데, 사록은 참으로 장자(長者)로다.” 하였다. (경상도 상주목  명신 조 참조.)

 그에 관한 기록은 경상도 밀양도호부 명환 조에도 나온다.

 원나라 천자의 사랑을 믿고 상주에서 거만을 떨던 환관이 천자의 사신으로 와서 무례한 짓을 하려고 하였다. 이에 정운경이 즉시 벼슬을 버리고 떠났다. 그 환관이 부끄럽고 두려워서 용궁까지 밤을 도와 쫓아와서 사죄하였으므로 돌아왔다.

 안동대도호부 명환 조에는 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실려 있어 그가 공과 사를 얼마나 엄격히 구분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가 복주판관(福州判官)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고을의 아전 권원(權援)이 일찍이 운경과 더불어 같이 향학(鄕學)에서 공부한 일이 있었는데, 어느 날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서 뵈옵기를 청하니 운경이 불러들여 함께 술을 마시고 말하기를, “지금 자네와 더불어 술을 마시는 것은 옛정을 잊지 않기 때문이네. 내일이라도 자네가 범법(犯法)하는 일이 있으면 아마 이 판관(判官)이 자네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네.” 하였다.

 전라도 전주부 명환 조에서는 공민왕 때의 목사로서, 처를 거느리고 집에서 사는 중이 있었는데 하루는 밖에 나갔다가 죽었다. 그 처가 관가에 고소하였으나 증거가 없어 오래 판결을 보지 못했다. 정운경은 그 처가 사통하는 자가 있는가를 물었으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웃의 한 놈이 늘 희롱하기를, “노승이 죽었으면 좋겠다.” 하였다기에 놈을 잡아 두고 먼저 그 어미를 국문하여, 모월 모일 밖에서 돌아와 친구와 술을 마셨다면서 취하여 괴로워했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사실을 자복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 뒤 재정을 맡은 삼사의 판관을 거쳐 서운부정(書雲副正)이 되어 1346년 하정사(賀正使)의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갔다. 당시 고려 출신의 기황후(奇皇后)는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었으며 중귀(中貴: 궁중에서 신분이 높은 사람)에 고려 사람이 많았는데 그들이 음식을 대접하는 모습이 거만하였다. 이에 정운경이 정색하며 말하기를 “오늘의 접대는 옛 주상(主上)을 위한 것이다.”라고 말하니 중귀들이 크게 놀라면서 말하기를 “수재(秀才)가 우리를 가르쳐 주었다.” 하였다.

 성균사예(成均司藝), 보문각 지제교(寶文閣知製敎)를 지내고, 1348년(충목왕 4)에 양광도(楊廣道: 충청도) 안렴사, 이듬해 교주도(交州道: 강원도의 영서 내륙지역) 안렴사 등을 거쳐 1352년(충정왕 3)에는 전법총랑(典法摠郞)에 이르렀다. 1353년 전주목사(全州牧使)로 나가 치적을 올렸으며, 1359년(공민왕 5) 병부시랑(兵部侍郞)에 올랐다.

 1357년(공민왕 6)에 정운경은 비서감, 보문각 직학사를 거쳐 강릉도(강원도의 영동지역)와 삭방도(朔方道: 강원도) 존무사(存撫使)로 나가 치적을 올렸으며, 1359년에는 형부상서(刑部尙書, 정3품)로 뛰어올랐다. 1363년 검교밀직제학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그는 수령으로 재직하는 동안 청렴하고 강직하게 선정을 베푼 것이 후세인의 평가를 받아, 뒤에 『고려사』의 양리전(良吏傳)에 오르게 되었다.

 정운경은 죽은 뒤에 관직이 낮아 정부로부터 시호를 받지는 못하였으나, 그를 아끼는 친우들이 그의 청렴함과 의로움을 기려 '염의선생(廉義先生)'이라는 개인적인 시호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의 가정 형편은 처음 어려웠던 것 같았으나 그의 3남 1녀 중 맏아들인 정도전(鄭道傳)이 아버지인 그로부터 노비를 상속받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소지주의 경제기반 정도는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그에 대한 기록이 이곳저곳 많이 나오는 것은 바로 정도전의 아버지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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