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의 변신은 무죄다.
라면의 변신은 무죄다.
이 웅 재
‘소수의 신조어’라서 두음법칙에서도 예외가 되어 버린 ‘라면(裸麵)’의 변신을 나는 무죄라고 주장한다.
한국 최초의 라면은 1963년 9월 15일에 출시되었다. 식량난 타개를 위해서, 삼양식품의 설립자 전중윤 회장이 일본의 ‘묘조식품[明星食品]’에서 기계 2대를 사 들이면서 생산하기 시작한 라면은, 가격 10원으로 처음 우리들 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이 시기의 라면은 그 생산 취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서민들에게 ‘군림(?)’하였다. 생긴 건 국수 비슷하게 생겼는데, 국수와는 천양지차,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이다. 국수는 직선으로 길게 생겼는데 이놈은 파마해 놓은 머리칼마냥 곱슬곱슬했다. 국수보다는 가늘게 생겼는데도 국수보다는 질겼다. 국수보다는 분량이 적어도 국수보다는 배가 불렀다.(그 당시에는 부끄러운 얘기지만, 배부른 게 최고였던 시절이었다.) 국수보다는 뒤따르는 반찬이 없어도 국수보다는 맛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건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식량보다 귀한 몸이 되어 버렸다. 한마디로 당시에는 라면을 먹는 사람이 부러웠던 것이다. 구황식품으로 만들어져 고급식품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렇게 귀한 몸인 라면을 제대로 먹어보지도 못한 채 나는 군대에 입대하였다. 군대에서 먹어본 라면, 그건 라면에 대한 사형선고였다. 한두 사람이 아닌 엄청나게 많은 인원이 먹을 분량을 큰 솥에다가 끓인 라면은, 이미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던 그 환상적인 라면이 아니었다. 식사당번이 취사반에까지 가서 커다란 들통에다가 받아오는 퉁퉁 불어터진 라면, 그건 6・25 시절의 꿀꿀이죽보다도 못했다. ‘라면 만만세’에서 ‘라면 절대 사절’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나마 라면을 위해서 한 가지 다행스러웠던 점은 PX에서 살 수 있는 막걸리 안주로는 ‘왔다’였다는 일이라고나 할까? 군대에 갔다 온 사람치고 생 라면에 스프 뿌려서 ‘뿌셔’(부숴) 먹는 안주 맛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것은 어쨌든 제대한 후의 한 동안은 모두들 ‘라면이여, 안녕!’을 소리 높여 외친다. 그러면서 차츰 라면은, 원래의 취지대로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누구는 라면밖에 먹을 수 없는 처지가 한스러워서 이를 악물고 달리기를 해서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지 않던가? 맛있는 음식물을 먹기 힘들 때 그저 배고픔만 면하기 위하여 끓여먹는 대용식품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오죽하면 ‘라면으로 때우지.’라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그런데 라면은 또 한 번의 변신을 한다. 대한민국의 국력이 조금 나아지자, 외국을 여행하는 한국인들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나라가 다르면 제일 고통스러운 것이 음식, 여행지인 현지 음식이 도통 입에 맞지를 않는 것이다.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인데, 쪼올쫄 굶으면서야 무슨 흥이 있어 관광을 제대로 할 수 있으랴? 그럴 때 불끈 기운을 차리게 해주는 ‘뽀빠이의 시금치’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다름 아닌 라면이었다. 그때의 라면은 꼭 ‘컵라면’이라야만 했다. 일반 라면이야 호텔에서 조리를 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어느 곳엘 가건 급수대는 비치가 되어 있었고, 거기서 뜨거운 물을 받아 부우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것이 컵라면이 아닌가? 느끼한 음식, 지나친 향신료 때문에 때로는 메슥메슥해지는 음식에 완전히 질려버렸을 때의 컵라면 하나는, 정말로 구세주 중의 구세주라 할 것이다. 약간은 매콤하면서도 그 개운한 맛, 그 맛은 우리 한국인에게는 더할 수 없는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상큼한 맛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그 라면 한 가지면 현지의 진수성찬보다도 훨씬 녹초가 된 몸을 가볍게 추스르게 해줄 수도 있고, 그 라면 한 가지면 밤늦은 시간에 이 방 저 방 사람이 한데 모여 소주 파티를 벌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라면은 외국 여행하는 한국 사람들의 필수품 목록 최상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도 더 맛있는 라면이 또 있다. 별 일도 아닌 이유로 아내와 말다툼을 하고 나서 서로가 침묵시위를 하면서 지낼 때의 라면이 바로 그것이다. 아내는 밥 먹으라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오기로 하루 종일 굶으면서 버티고 지내었는데, 저녁이 다 될 무렵쯤 할인 마트에라도 가는지 아내가 외출을 한다. 그건 어쩌면 일부러 라면이라도 끓여먹을 시간을 주기 위한 무언의 배려일지도 모른다. 그 황금 같은 시간을 놓칠 수야 없지 않은가?
아내의 외출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서둘러야 한다. 가스 불을 댕기고, 적당한 양의 물을 받은 냄비를 얼른 불 위에 올려놓는다. 계란이라도 하나 찾아서 깨뜨려 넣으면 금상첨화다. 그리고는 냉장고를 뒤져서 김치 한 보시기를 챙겨 적당히 삶아진 라면을 먹는 맛이란, 같은 처지를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진미 중의 진미인 것이다.
정약용의 둘째 아들 정학유(丁學遊)가 지은 ‘농가월령가’ 4월령에 나오는 대목 한 군데를 보자.
“벽계수 백사장을 굽이굽이 찾아가니, 수단화 늦은 꽃은 봄빛이 남았구나./ 촉고(數罟)를 둘러치고 은린옥척(銀鱗玉尺) 후려내어 반석에 노구 걸고 솟구쳐 끓여 내니/ 팔진미(八珍味) 오후청(五侯鯖)을 이 맛과 바꿀쏘냐.”
여기서 팔진미는 ‘원숭이의 주둥이, 매미의 뱃가죽, 곰의 발바닥…’ 등이라고 하니, 내 식성으로는 아무래도 ‘아내 몰래 끓여먹는 라면’ 맛에 미흡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오후청도 ‘중국 전한 성제(成帝)의 외삼촌인 평아후(平阿侯) 등 다섯 제후가 서로 시샘을 해 가며 온갖 산해진미를 해 먹었는데, 누호(婁護)라는 사람은 그 다섯 제후의 집을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그 집집마다에서 가지고 온 음식들을 한데 넣고 끓여 잡탕을 만들어 먹었다고 하는 진미’라고 하니, 역시 그런 잡탕보다는 ‘아내 몰래 끓여먹는 라면’이 훨 나을 것임을 장담, 또 장담하는 바이다.
그래서 라면의 변신은 무죄다. 라면이여, 영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