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 고전수필 순례 16) 김시습전(金時習傳)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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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 고전수필 순례 16)
김시습전(金時習傳) [하]
이 이 지음
이웅재 해설
거정이 막 조정에 들어가느라고 행인을 물리치고 바삐 조회에 들어가는데, 마침 시습이 남루한 옷에 새끼줄로 허리띠를 두르고 폐양자(蔽陽子: 천한 사람이 쓰는 흰 대로 엮은 삿갓)를 쓴 채로 그 길을 지나다가 그 행차의 앞길을 범하게 되었다. 그는 머리를 들고, “강중(剛中: 서거정의 자)은 편안한가.” 하였다. 거정이 웃으며 대답하고 수레를 멈추어 이야기하니, 길 가던 사람들이 모두 놀란 눈으로 서로 쳐다보았다. 조정의 벼슬아치 가운데 어떤 이가 시습에게 모욕을 당하고 참을 수가 없어, 거정에게 알리고 그의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하자 거정은 머리를 저으며, “그만두게. 미친 사람과 무얼 따지려 하는가. 지금 이 사람을 벌하면 백대(百代) 후에 반드시 공의 이름에 누(累)가 되리라.” 하였다.
김수온이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로서, ‘맹자가 양(梁)나라 혜왕(惠王)을 뵙다.[孟子見梁惠王]’라는 논제로 태학의 유생들을 시험하였다. 상사생(上舍生) 한 사람이 삼각산(三角山)에 있는 시습을 찾아가서, “괴애(乖崖: 김수온의 별호)가 장난을 좋아합니다. ‘맹자가 양나라 혜왕을 뵙다.’란 것이 어찌 논제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였다. 시습이 웃으며, “이 늙은이가 아니면 이 논제를 내지 못할 것이다.” 하더니, 주필(走筆)로서 글을 지어서 주며, “자네가 지은 것이라 하고, 이 늙은이를 속여 보라.” 하여, 상사생이 그 말대로 하였더니, 수온이 끝까지 다 읽기도 전에 문득, “열경(悅卿)이 지금 서울 어느 산사(山寺)에 머물고 있는가?” 하였다. 상사생이 숨길 수가 없어 이와 같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 논지(論旨)의 대략은, “양나라 혜왕은 왕을 참칭하였으니 맹자가 만나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는데 지금은 그 글이 없어져 수집하지 못하였다.…
성화(成化) 17년(1481, 성종12)에 시습의 나이 47세였다. 갑자기 머리를 기르고 글을 지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제사를 지냈다. 그 글의 대략은, “순(舜)이 오교(五敎)를 베푸심에 부자유친(父子有親)이 으뜸이요, 죄가 3000가지나 되더라도 불효(不孝)가 가장 큽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살면서 어찌 양육(養育)하신 은혜를 저버리겠습니까.…
드디어 안씨(安氏)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을 이루었다. 벼슬을 하라고 권하는 이가 많았으나 시습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의연하게 세속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가기를 예전대로 하였다. 달밤을 만나면 이소경(離騷經)을 외우고, 외우고 나서는 반드시 통곡하였다. 어떤 때에는 송사하는 곳에 들어가서 잘못된 것을 바르다고 궤변(詭辯)을 늘어놓아 승소(勝訴)하게 하고는 판결문이 나오면 크게 웃고는 찢어 버렸다.
시전(市廛)의 아이들과 어울려 멋대로 노닐다가 술에 취하여 거리에 드러눕기가 일쑤였다. 하루는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이 저자를 지나가는 것을 보고 큰소리로, “이놈아, 그만두어라.” 하고 소리쳤다. 창손은 못들은 체하고 지나갔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위태롭게 여겨 친구들이 절교(絶交)를 하였는데 오직 종실(宗室) 수천 부정(秀川副正) 이정은(李貞恩)과 남효온(南孝溫)ㆍ안응세(安應世)ㆍ홍유손(洪裕孫) 등 몇 사람들은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그의 처가 죽으니, 그는 다시 산으로 돌아가서 두타(頭陀: 중 모양으로 머리를 깎고 눈썹을 가지런히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佛道 수행을 닦는다는 뜻이다.)의 모습을 하였다. 강릉과 양양(襄陽) 등지로 돌아다니며 놀기를 좋아하고, 설악(雪嶽)ㆍ한계(寒溪)ㆍ청평(淸平) 등의 산에 많이 머물렀다.…
홍치(弘治) 6년(1493, 성종24)에 병이 들어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생을 마쳤으니 나이 59세였다. 화장을 하지 말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절 곁에 임시로 빈소를 차려 두었다가 3년 후에 안장하기 위하여 그 빈실(殯室)을 열어보니 안색(顔色)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승도(僧徒)들이 성불(成佛)하였다고 놀라 감탄하고, 마침내 다비(茶毘)를 하여 그의 유골(遺骨)을 취하여 부도(浮圖)를 만들었다.
생시에 손수 자신의 늙었을 때와 젊었을 때의 두 개의 화상을 그려 놓고 스스로 그 찬(贊)을 절에 남겨 두었는데, 그 찬에 마구잡이로 써놓기를, “너의 얼굴은 지극히 못생겼고 너의 말버릇은 너무 당돌하니 너를 구렁텅에 처넣어 둠이 마땅하도다.” 하였다. 그의 시문(詩文)은 거의 흩어져 열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데 그것을 이자(李耔)ㆍ박상(朴祥)ㆍ윤춘년(尹春年) 등이 앞 다투어 수집해서 세상에 간행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사람이 천지의 기운을 받고 태어나는데 청탁(淸濁)과 후박(厚薄)이 고르지 않아 날 때부터 아는 것과 배워서 아는 구별이 있으니, 이것은 의리로써 하는 말이다. 시습과 같은 사람은 문장에 있어서는 나면서부터 터득했으니 문장에도 날 때부터 아는 자가 있는 모양이다. 거짓 미치광이로 세상을 도피하였으니, 그 은미한 뜻은 가상하나 굳이 윤리의 유교를 포기하고 방탕하게 제멋대로 행동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록 빛과 그림자를 감추어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김시습이 있었던 줄 모르게 한들 무엇이 연민스러울 것인가. 그 사람을 생각할 때 재주가 타고난 기량 밖으로 넘쳐흘러서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였던 것이니 가볍고 맑은 기운은 넘쳐나게 받고 투텁고 무거한 기는 모자라게 받았던 것이 아니었는가 한다. 그러나 그는 절의를 내세우고 윤기(倫紀)를 붙들어서 그 뜻을 다하여 일월(日月)과 더불어 그 빛을 다투게 하고, 그의 풍성(風聲)을 듣는 이는 나약한 사람도 또한 바르게 서게 하니, 비록 백세의 스승이라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애석하구나. 시습의 영특하고 날카로운 자질로써 학문을 연마하고 실천의 공업을 쌓았더라면, 그 이룬 것은 헤아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아, 그의 기품이 있는 말과 준엄한 논의는 기피해야 할 것도 범하여 저촉하였고, 공경(公卿)마저 꾸짖고 매도(罵倒)하여 조금도 서슴지 않았는데 당시에 그의 잘못을 들어 말한 자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우리 선왕(先王)의 성대하신 덕과 높은 재상들의 넓은 도량으로 말하면 말세에 이르러 선비로 하여금 말을 공손하게 하도록 하는 것과 견주어 볼 때에, 그 득실이 어떠하겠는가. 아, 거룩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