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55) 세계 최초의 운하를 뚫으려고 했던 정습명(鄭襲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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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인물열전 (55)
세계 최초의 운하를 뚫으려고 했던 정습명(鄭襲明)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3. 慶尙道 迎日縣 人物 條]
이 웅 재
정습명(鄭襲明:1096?∼1151[의종 5])은 고려 예종, 인종, 의종 3대의 중신(重臣)으로, 본관은 영일(迎日), 호는 동하(東河) 또는 형양(滎陽)으로, 영일정씨 형양공파의 시조이다. 향공(鄕貢: 향시에 합격하여 진사시에 응시하도록 지방장관의 천거를 받은 사람)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내시(內侍)에 보임되고, 1134년(인종 2) 안흥정(安興亭) 밑의 조운(漕運)을 쉽게 하기 위하여 홍주(洪州) 소태현(蘇泰縣)의 하천을 팠으나 실패하였다. 이를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9권 충청도 태안군 산천 조(條)에서 좀더 자세하게 알아보자.
고려 인종이, 안흥정 아래의 물길이 여러 물과 충돌하게 되어 있고, 또 암석 때문에 위험한 곳이 있으므로 가끔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있으니, 소태현 경계로부터 도랑을 파서 이를 통하게 하면 배가 다니는 데에 장애가 없을 것이다 하여, 정습명을 보내어 인근 군읍 사람 수천 명을 징발하여 파게 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그 뒤에 종실의 왕강(王康)이 건의하기를, “예전에 파던 도랑은 깊이 판 곳은 10여 리나 되고, 파지 않은 곳이 불과 7리인데, 만약 마저 다 파서 바닷물로 하여금 유통하게 한다면 매년 조운(漕運: 세곡을 실어 나르는 조선[漕船]의 운항)할 때에 안흥량 4백여 리의 위험한 물길을 경유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인부를 징발하여 다시 팠으나, 물 밑으로는 온통 돌이요, 또 조수가 심하여 파는 대로 다시 메워버리므로, 공을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천수만과 가로림만 6.8km를 연결하는 이 굴포운하(掘浦運河: 굴포라는 말 자체가 요즘 운하라는 의미의 말이지만, 이미 지명으로 고정되어 있는 때문에 ‘굴포운하’라는 용어를 사용함)는 세계 최초의 인공 물길의 대역사였지만, 마지막 2.8km를 뚫지 못한 채 수시로 시도되다가 조선 세조 때에 와서 중단된다. 현재에도 남아 있는 운하의 유적지는 많은 백성들이 흘렸을 피와 땀을 묵묵히 웅변해 주고 있는데, 최근에 와서 다시 그 개발 논의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기도 하다.
정습명은 묘청(妙淸)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킬 때 내시지후(內侍祗候)로서 수군을 이끌고 순화현(順化縣) 남강(南江)에서 적을 막았으며, 이어 병선판관(兵船判官)이 되어 상장군 이녹천(李祿千) 등과 함께 서적토벌(西賊討伐)을 도모하였으나 대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140년(인종 18)에는 김부식(金富軾), 임원애(任元敱), 최자(崔滋) 등과 함께 시폐10조(時弊十條)를 올렸으나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홀로 주언(奏言)을 좇지 않는다 하여 사직하였다.
1142년 김부식의 집에 우거(寓居)하였는데, 간관의 체통을 잃었다는 탄핵을 받게 되어 국자사업 기거주(國子司業起居注)에서 파직되었으나 곧 다시 예부시랑으로 승진하였다.
인종과 공예태후 임씨(恭睿太后任氏)가 의종 대신 둘째아들인 대령후 경(大寧侯暻)을 태자로 세우려 하자 이를 막기도 하였다. 오랫동안 간관 직에 있었으므로, 인종이 승선(承宣: 왕명을 출납하는 벼슬→承旨)으로 발탁하여 동궁의 스승으로 삼았으며 죽을 때에는 의종을 잘 보위해 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하였다.
1148년(의종 2) 한림학사가 되고, 이듬해 좌승선으로 고시관이 되었다. 1151년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추밀원은 고려 때 왕명의 출납, 궁중의 숙위[宿衛]와 군기[軍機] 곧 군사기무 담당을 맡아보던 기관)가 되어, 의종의 잘못을 간하다가 왕의 미움을 샀고, 또한 김존중(金存中), 정함(鄭諴) 등의 무리로부터 참소를 받게 되자 그는 병을 핑계로 벼슬을 사임하니 김존중이 대직을 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간신에 둘러싸인 임금의 의향을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금년과 간지(干支)가 같은 신묘년(辛卯年)에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이로부터 아첨하는 간사한 무리들이 날마다 자꾸 등용이 되었으며 임금은 더욱 방종, 사치, 퇴폐, 음란, 향락에 빠져 법도가 무너지게 되었다.
임금이 한번은 귀법사(歸法寺)에 소풍을 나갔다. 혼자 말을 달려 달영다원(獺營茶院)에까지 가게 되었는데, 모시던 신하가 따라가지를 못하였다. 임금은 혼자 그 원(院)의 기둥에 기대어 서서 말하기를 정습명이 살아 있었다면 내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하고 한숨을 쉰 일도 있었다.
『고려사』의 「열전」에 의하면, 인물이 초탈하여 작은 일에 속박당하지 않는 활달한 인품의 소유자이고 남달리 큰 국량을 가졌으며 늘 학문에 힘썼는가 하면 문장에도 능통하였다고 한다. 정몽주(鄭夢周)는 그의 11세손이다.
『동문선』에 세태를 읊은「석죽화(石竹花)」등 3편의 시와 2편의 표전(表箋: 표문과 전문, 즉 임금께 올리는 글과 지난날 길흉의 일이 있을 때 임금에게 아뢰던 사륙체[四六體]의 글)이 전하는데, 그 중 석죽화 한 편을 보인다.
세상에선 붉은 모란꽃만 사랑하여 (世愛牡丹紅 세애모란홍)
정원에 가득히 심고 가꾸네. (裁培滿院中 재배만원중)
누가 이 거친 초야에 (誰知荒草野 수지황초야)
좋은 꽃떨기(패랭이꽃) 피어있는 줄 알기나 하랴. (亦有好花叢 역유호화총)
어여쁜 모습은 달빛 받아 시골 못에 비치고 (色透村塘月 색투촌당월)
향기는 언덕 위 나뭇잎 흔드는 바람결에 전해지네. (香傳壟樹風 향전낭수풍)
외진 땅에 있노라니 찾아주는 귀공자 적어 (地偏公子少 지편공자소)
아리따운 자태를 농부에게 붙여보네. (嬌態屬田翁 교태촉전옹) *屬=觸(촉)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하게 피어나는 석죽화의 아름다움를 통하여 그의 초탈한 품성을 역력히 대할 수가 있는 가편(佳篇)이라 하겠다. (11.2.4[금], 원고지 17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