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기

늙마의 고백, ‘그대를 사랑합니다’ 1

거북이3 2011. 3. 5.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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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마의 고백, ‘그대를 사랑합니다’ 1

                                                                 이 웅 재

 

 부릉부릉 부르릉, 늙은 김만석이 고물 오토바이를 탄다. 부릉부릉 부르릉, 오토바이 소리가 요란하다. 김만석도 그에 못지않게 소릴 버럭버럭 지른다. 이순재가 김만석 역을 맡았다. 그는 우유배달을 한다.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파지를 줍는 윤소정 옆을 지나가는데, 윤소정이 그만 돌멩이 때문인지 리어카를 쓰러뜨린다. 나 때문에 넘어졌느냐고 묻는 이순재는 대답하는 윤소정에게 소릴 버럭버럭 지르는 것이다. 기실 가는귀가 먹었기 때문이겠지만, 윤소정은 깜짝깜짝 놀란다. 그렇게 두 늙은이들은 필이 꽂히기 시작한다.


 모처럼 영화관을 찾았다. 그것도 아내와 함께. 어쩐 일인지 아내가 미리 예약까지 해놓고 같이 가자는데 어찌 그 영을 어길 수가 있으랴. 어쩌다 한 번씩 마당극이나 오페라 따위는 함께 관람한 적이 있지만, 환갑이 넘으면서부터는 같이 영화를 본 적이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강풀 원작의 웹툰을 추창민 감독으로 영화화한 “그대를 사랑합니다.” 경로우대라서 반액으로 보게 된 영화는 예상 외로 수작이었다는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세월의 무게 속에 농익은 인정과 사랑이 관객들의 가슴을 뭉클 적시고 있었다.


 눈이 내린다, 퍼얼펄. 젊은이들에게는 낭만적인 것이겠지만, 늙은이들에게는 원수 같은 눈이다. 윤소정이 걱정되는 이순재가 비탈길에서 리어카를 끌어준다. “아이구, 허리야, 제기럴!” 하면서도 기분이 째지는 모습이다. 꽈다당! 리어카를 넘겨주고 가던 이순재, 윤소정이 묻는다. “괜찮으세요?” 대답은, “안 괜찮아!” 하지만 괜찮은 모습이다. 그는 우유대리점 주인의 아들이 모으는 우유팩을 반강제로 빼앗아 윤소정에게 가져다주기도 한다. 주는 일의 즐거움을 제대로 아는 표정이다. 받으려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주고받다’라는 말은 있지만, ‘받고주다’라는 말은 없는 것이 아닐까? 한자 어휘에도 ‘줄 수’자가 먼저요, ‘받을 수’자는 나중에 나오는 ‘수수(授受)’를 ‘수수(受授)’로 쓰는 일은 없다. 서구에서도 마찬가지다. 영어를 보아도  ‘Give and take’이지 ‘Take and give’라는 표현은 없는 것이다.


 장군봉 역의 송재호는 주차관리원이다. 아내는 김수미, 치매환자다. 그래서 출근할 때는 대문을 밖에서 잠근다. 그런데 그만 어느 날 알람시계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늦었다. 부랴부랴 출근하다보니 그만 대문 잠그는 걸 잊었다. 김수미가 신나게 집 밖으로 진출한다. 놀이터,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김수미를 발견한 이순재, 그냥 지나치질 못하고 옆에서 함께 지내다가 “방 안에선 신발 좀 벗구 다녀라.”라는 퉁박만 맞는다. 집을 찾아주겠다고 오토바이에 태우고 다닌다. 김수미는 행복하다. 지난날 벚꽃이 만개한 풍경 속에서 송재호와의 달콤했던 데이트를 기억 속에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온갖 고생을 하는 이순재가 안쓰러워질 때쯤 아내를 찾아 나선 송재호가 나타난다. 아내를 업고 가는 송재호는 연신 ‘고맙다’고 하는데, 이순재는 역시 버럭 역정을 낸다.


 이순재가 윤소정에게 편지를 보낸다. 왈 연애편지일 것인데, 윤소정은 까막눈이라 읽을 수가 없어 송재호에게 가서 읽어 달란다. “송씨 보시게.”로 시작하는 편지는 그렇게 우세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다. 윤소정이 송재호에게 가 있는 것을 오해하고 질투하는 이순재, 나중에 글씨를 모른다는 것을 알고서는 윤소정의 2층방 창문으로 편지를 던져 넣는다. 왼손으로 던진 편지는 기가 막히게 창문 속으로 날아든다. 그걸 주워 본 윤소정이 까르르 웃는다. 그 편지는 그림 편지였다. 만날 장소가 그려져 있고 그 장소에 두 사람이 서 있는 그림, 거기에는 만날 시간을 시곗바늘을 그려 알려주고 있었다. 글씨 한 자 없는 그 편지가 그렇게 많은 사연을 전달해 주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그걸 보고 좋아하는 윤소정의 늙수그레한 얼굴이 정겹게 다가온다.

 이순재는 윤소정이 파지를 줍는 일이 안쓰러워 동회에 가서 생활보호자 지원금을 타도록 해 주는데, 담당자가 이순재의 손녀딸, 김연아(송지효)였다. 주민증을 내놓으라니까 없단다. 이순재는 반어거지로 새로 발급받게 해 주는데, 이름을 대라니까 ‘송’이라는 성씨만 댄다. 이름이 없는 것이다. 이순재가 대신 이름을 말한다. ‘이뿐이’, ‘송이뿐’. 그래서 윤소정은 이름을 갖게 되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순재에 의해 이름이 불린다. 김춘수의 ‘꽃’이란 시 작품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주민증에 들어갈 사진을 찍으려고 사진관에 갔을 때도 경박스러운 젊은 사진사가 ‘웃으셔야죠, 웃으셔야죠, 영정 사진처럼 환하게…’ 하고 실수를 하는 바람에 버럭 이순재의 핀잔을 듣는 대목도 관객들을 웃음으로 몰아넣는다.

 송지효가 주민증이 나왔다고 윤소정 집을 찾아간다. 이름을 묻는 윤소정에게 “김연아예요.”라고 하니까, 김연아처럼 마음씨가 곱다고 한다. 송지효가 “사람들이 얼굴도 똑같이 이쁘게 생겼다던데.” 했더니 윤소정이 정색을 하는 게 아마도 아니라는 뜻으로 여겨진다. 관객들도 웃는다. 자신을 알라는 뜻인 듯싶은 것이다. 윤소정이 송지효를 그냥 보낼 수 없어 음식을 장만한다. 부엌에서 상을 차리던 윤소정은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진짜 좋아하는 것 같아요.”라는 송지효의 말에 그만 놀라서 상을 떨어뜨려 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준비해온 밥상, 대접에 수북하게 담은 고봉밥, 반찬 서너 가지, 그 중에 배추 등 쌈 재료가 제일 큰 그릇에 담겨 있다. 송지효, 먹고픈 생각은 손톱만치도 없지만, 억지로 먹는다. 그리고는 곧바로 약국을 찾아가서 소화제를 사먹는 장면도 상대방의 정성을 무색하게 하지 않으려는 젊은이의 배려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나중 윤소정은 송재호에게서 글씨를 배우기도 하는데, 그녀가 처음으로 쓴 편지가 ‘김만복 씨, 정말 고맙습니다. 송이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