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기

늙마의 고백, ‘그대를 사랑합니다’ 2

거북이3 2011. 3. 5. 01:02

  

 늙마의 고백, ‘그대를 사랑합니다’ 2

                                                                 이 웅 재

 

 송지효가 이순재에게 말한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고백하세요.” 이순재 답 왈, “왜?” “할머니도 여자니까요.” 사랑한다는 표현을 잘 못하는 우리 한국의 나이 든 남정네들. 좀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윤소정의 생일날이다. 손녀딸 송지효가 알려주었다. 이순재는 윤소정의 집으로 찾아간다. 윤소정에게는 방안에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궁금해서 부엌 쪽으로 가서 귀를 기울이는 윤소정. 갑자기 이순재가 문을 여니까 놀라서 짐짓 방바닥을 걸레질하는 척한다. 조금 있다가 들어오는 이순재의 양 손에는 조그마한 상이 들려 있다. 그 위에는 촛불이 켜져 있는 생일 케이크가 놓여 있고. 둘이 마주 앉았다.

 “불 좀 꺼요.” 윤소정이 촛불을 끄려고 한다. “아니, 전등불을 끄란 말이오.” 전등불이 꺼졌다. 은은한 촛불만 남아 일렁거린다. 박완서의 ‘촛불 밝힌 식탁’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그러나 상황은 천지 차이로 다르다. 박완서의 소설에서는 이웃에 사는 부모가 자꾸 찾아오는 것이 싫어서 전등불을 끄고 촛불만 켜 놓고 식사를 하는 것이지만, 지금 이 장면은 오래 묵은 된장 같은 두 늙은이의 정과 정이 넘쳐나는 광경이다. 그 모습은 어떠한 그림보다도 아름답다. 이순재가 노래를 부른다. “해피 버스데이 투유…해피 버스데이 송이뿐…” 하다가 드디어 클라이맥스로 올라간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송지효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고백하세요.” 했을 때, 이순재는 말했었다.우리 나이쯤엔 여자한테 '당신'이라는 말은 말이야. 여보, 당신 할 때 쓰는 당신이야. 당신이라는 말은 못 쓰지.내 먼저 간 당신에게 예의를 지켜야지.” 당신과 그대가 이렇게 서로 다른 말이라는 것을 나는 오늘에야 처음으로 알았다. 이순재는 “그대를… 사랑합니다!”라는 어색하고도 쑥스러운 말로만 그치지를 않았다. 주섬주섬 내놓은 생일 선물, 그것은 비싸 보이지는 않지만 예쁘장한 머리핀이었다. 그것을 받아든 윤소정의 얼굴은 더할 수 없는 행복감에 젖어 있다. 요새 젊은이들의 요란스런 이벤트 따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감동이 화면 전체에 흐르고 있었다.

 이순재가 다시 주민 센터를 찾았다. 손녀 앞에 서 있는 그는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자꾸만 손뼉을 치기도 하는 등 요란을 떤다. 한참만에야 겨우 눈치를 챈 손녀가 묻는다. “할아버지, 장갑 사셨어요?” “아니, 선물 받은 거야!” 그리고는 우쭐우쭐댄다. 꼭 사춘기의 소년 같다. 그 모습이 그렇게 보기가 좋다. 이순재는 어디를 가더라도 그 가죽장갑을 벗지 않는다. 그건 바로 또 하나의 윤소정이었으니까.

 한편, 김수미는 방안의 벽에다가 크레용으로 괴발개발 그림을 잔뜩 그린다. 동네의 모습 같다. 나무도 있고, 풀도 있고 꽃도 있다. 물고기도 있고 별도 있고 달도 있다. 무지개도 떠 있다. 윤소정이 그녀에게 바람개비를 만들어준다. 김수미는 그 바람개비를 돌려보며 좋아한다.

 송재호는 자기 처인 김수미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되고 자식들을 불러들인다. 아들 둘에 딸 하나. 예전에 다섯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니 단란한 모습이다. 그러나 자식들이 결혼하면서는 모두들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함께 살지 못하는 데에는 다들 핑계가 있다. 세 자녀들이 부모를 보살피지 않고 하나둘 떠나가는 장면을 회상하면서 송재호는 중얼거린다. “그렇게 우리는 말만으로 자주 찾아뵙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는 웬 일로 불러들였을까 궁금해 하는 자식들을 한번 보고는 그냥들 다시 돌아가라고 한다. 김수미가 죽기 전 마지막 상면을 하자는 생각이었나 보다.

 자식들이 모두 돌아간 다음 송재호는 방에 연탄불을 피워 놓고는 방문의 틈새를 푸른색의 넓은 점착테이프로 공기가 통하지 못하게 발라서 막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이지만, 그 아내가 가고 나면 혼자서 살아갈 자신이 없어 아내와 함께 동반자살을 하는 것이다.

 영안실. 이순재와 윤소정이 음식상에 앉아 있다. 옆자리의 젊은이들이 화투를 치면서 떠들어댄다. “호상이지, 호상!”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순재가 소리를 버럭 지른다.

 “세상에 잘 죽는 게 어딨냐 말이야! 노인네가 오래 살다가 죽으면 다 호상이야, 살만큼 살았으니까 죽는 게 당연하다 이거야! 늙었으니까 그만 죽어야 한다 이거야! … 니미, 어디서 호상 호상하구 있어!”

 윤소정이 이순재에게 이별을 고한다. 나중 영감님 돌아가시는 걸 볼 자신이 없어 시골에 가서 살겠다는 것이다. 처음엔 화를 내며 말려보지만 그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느낀 이순재는 옛날 송재호가 끌었던 다 낡아빠진 택시를 가지고 그녀를 시골로 데려다준다. 아름다운 시골이었다. 서정성이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어쩌다 한두 집이 멀찍멀찍 떨어져 있는 한적한 곳. 이 장소를 찾기 위해 감독이 엄청 발품을 팔았다고 한다.

 그녀가 시골로 떠난 후의 그녀의 집이 있던 골목길, 어둑어둑해지는 시간이었다. 거기 이순재가 정신이 나간 듯 우두커니 서 있다. 어린 소녀 하나가 다가온다. “왜 남의 집 앞에 서 있어요, 이거 우리가 이사 온 집이란 말이에요.”

 소녀는 갑자기 저쪽 가로등으로 뛰어간다. 그리곤 스위치를 올려 가로등을 켠다.

 “여기 살던 할머니가 부탁했어요. 골목길이 어두우면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기가 위험하니까, 날이 어두워지면 꼭 좀 가로등 불을 켜 달라구요.”

 이순재가 가로등 밑으로 다가간다. 가로등 불빛을 올려다본다. 하늘 한 쪽 편으로는 둥근 달도 떠 있었다. 김수미가 그려놓았던 달과 같다.

 이순재가 죽었다. 둥근 달이 떠 있다. 김수미가 그려놓은 달이요, 가난한 마을의 옥상에 떠 있던 달이다. 송이뿐 할머니를 만나러 시골로 오토바이를 타고 가서 둘이서 드라이브를 하며 행복해하던 장면이 화면을 덮는다. 오토바이는 점점 하늘로 상승한다. 별을 지나 둥근 달 가운데로 들어간다. 둥근 달은 점차 이지러질 것이다. 늙은이 두 쌍의 사랑 얘기도 그렇게 잊혀져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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