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58) 꿈 하나로 정당문학까지 올랐던 최여해(崔汝諧)
경북 인물열전 (58)
꿈 하나로 정당문학까지 올랐던 최여해(崔汝諧)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1. 慶尙道 慶州府 人物 條]
이 웅 재
최여해(崔汝諧: 1101[숙종 6]∼1186[명종 16])는 고려 명종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울주 통판(蔚州通判)에 보임되었다.
처음 명종이 잠저(潛邸: 국왕의 즉위하기 이전, 또는 즉위하기 이전에 거처하던 집) 시 익양공(翼陽公)으로 있을 때에, 최여해는 그 부(府)의 전첨(典籤: 종친부에 예속되어 정무를 맡아보던 관직)으로 있었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하루는 최여해가 꿈을 꾸었는데, 태조가 익양공에게 홀(笏: 일반적으로는 벼슬아치가 공복[公服] 등의 차림을 하였을 때에 손에 쥐는 작은 판[板]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왕권을 상징하는 물건을 의미함)을 주니 익양공이 그것을 받아 가지고 용상(龍床: 임금이 정사를 볼 때 앉는 평상, 곧 임금의 자리, 왕좌[王座].)에 앉았고, 최여해가 여러 동료들과 함께 그에게 하례하였다. 잠이 깬 뒤에 기이하게 여겨 그 이야기를 익양공에게 말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익양공이 이르기를, “부디 다시는 말하지 말라. 이는 큰일이다. 의종(毅宗)이 들으시면 반드시 나를 해칠 것이다.” 하였다. 의종은 도참설(圖讖說: 미래의 길흉화복과 성쇠득실[盛衰得失]에 대한 예언, 혹은 징조. 여기서는 특히 왕조의 운명에 대한 예언을 말함.)을 굳게 믿어 여러 아우를 꺼려하고 있었다.
1170년(의종 24) 8월 의종이 대소신료(大小臣僚)들과 함께 보현원(普賢院)에 거둥을 하였다. 가는 도중 한 공터를 발견하여 시종하는 문신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무인으로 하여금 수박(手博) 놀이(씨름 비슷한 놀이)를 하게 했는데, 나이 50세가 된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이 나섰으나 몸이 늙어 힘들어 하자, 문신 한뢰(韓賴)가 느닷없이 그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정중부(鄭仲夫)는 얼마 전에 김부식(金富軾)의 아들 김돈중(金敦中)이 자신의 수염을 촛불로 태웠던 일을 생각하고는 분노하여, 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와 함께 거사를 일으켜 왕을 따라갔던 문신과 환관 등을 살해하였다.
이를 본 한뢰가 임금의 용상으로 숨어들었다. 정중부가 한뢰를 찾으려 하는 중 정중부의 수하 이고가 한뢰를 잡아 죽여 버렸다. 이에 김돈중은 도망쳐서 궁궐로 간 후 태자를 데리고 가서 성문을 닫으려 했으나, 정중부가 그것을 먼저 눈치 채고 곧바로 개성으로 쳐들어가 궁궐과 태자궁을 휩쓸면서 대소의 문신 50여 명을 죽이고 왕을 폐하여 거제현(巨濟縣: 거제도)으로, 태자는 진도현(珍島縣: 진도)으로 추방한 후, 왕의 아우인 익양공(翼陽公) 호(晧)를 맞아 즉위케 하니, 이것이 바로 무신의 난 또는 정중부의 난이요, 이때 즉위한 익양공이 곧 명종이다.
한편, 최여해가 나주 판관(羅州判官)으로 있을 때에는, 전의 그 꿈으로 인하여 평소 익양공에게 마음속으로 귀의하였으므로, 좋은 과실과 해포(海脯: 말린 해산물)를 구하여 자주 공궤(供饋: 윗사람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하니, 익양공이 매우 기뻐하였다.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최여해가 축하의 표문(表文: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가지고 대궐에 나아가서 예(例)에 따라 조회에 참예하였지만, 왕은 알지 못하였다.
이에 최여해는 왕과 하직할 때에 이르러 환관(宦官)을 통하여 아뢰니, 임금이 비로소 놀라며 말하였다. “최 전첨이 왔는데 짐이 살피지 못했다.”고 하면서 인견(引見)하고 그를 위로하였다. 이에 곧 나주판관에서 좌정언지제고(左正言知制誥)에 제배(除拜: 시험이나 천거 등의 임명절차를 거치지 않고 왕이 직접 벼슬을 내리는 일.)되고, 이어 시어사 보문각대제(侍御史寶文閣待制)를 역임하였으니, 이때 나이가 70세이었다.
1176년(명종 6)에는 간의대부국자좨주(諫議大夫國子祭酒)로서 감시(監試: 고려 때 국자감에서 진사를 뽑던 시험. 사마시[司馬試]라고도 하였음.)를 주관하여 시(詩)·부(賦)로 이진승(李晋升) 등 8인과 십운시(十韻詩: 운자를 열 번 변경하여 짓는 장편시, 절구 율시 배율 중 배율에 해당함.)로 정세준(鄭世俊) 등 38인, 그리고 명경(明經) 1인을 시취(試取: 시험을 보아 인재를 뽑음)하였다.
그 후 최여해가 아뢰기를, “이부(吏部: 고려시대 상서6부[(尙書六部] 중의 하나로, 관리의 인사 관계와 지방의 관청을 감독하던 부서)에서 잘못하여 사적(仕籍: 벼슬아치의 명단)에 나이를 감산(減算)하였사오나, 신의 나이 지금 정년(停年)에 해당되니 관례에 따라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해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이르기를, “이부에서 명부에 나이를 잘못 감산한 것은 하늘이 시켜 그렇게 된 것이니 다시 말하지 말라." 하고 더 이상 논하지 못하게 했다.
벼슬이 여러 번 승진하여 77세에는 추밀원사 산기상시(樞密院使散騎常侍: 추밀원사는 고려 시대 왕명의 출납, 궁궐의 경호 및 군사 기밀 따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의 벼슬 이름)에 이르렀다.
최여해는 이 때 다시 표문을 올려, “추밀원에 자리를 채웠으니 진실로 오늘의 은혜와 영광을 알겠으며, 북궐(北闕)에서 임금께 알현하였으니 비로소 당년(當年)의 꿈이 맞았음을 믿습니다.” 하고, 인하여 사직하고 돌아가기를 청하니, 임금은 그에게 특별히 정당문학(政堂文學: 고려 시대에, 중서문하성에 속한 종2품 벼슬)을 제수(除授)하였다가 곧 이어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천성이 너그럽고 후덕하였으나, 행정 사무에 익숙하지 못하고 재주와 학식이 얕고 짧았는데, 명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잠저(潛邸) 시절의 요속(僚屬: 자기보다 아래 계급인 동료)이었기 때문에 높은 벼슬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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