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 고전수필 순례 27) 진주 촉석루기(矗石樓記) [하 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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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 고전수필 순례 27)
진주 촉석루기(矗石樓記)
하 륜 지음
이웅재 해설
누관(樓觀≒樓閣)을 경영하는 것은 정치하는 자의 여사(餘事)이긴 하나 그 흥하고 폐하는 것으로써 인심(人心)과 세도(世道)를 가늠해볼 수 있다. 세도는 오르내림이 있어서 인심의 서글픔과 즐거움이 한결같지 아니하고, 누관이 흥하고 폐하는 것도 그에 따르게 된다.
대저 누관 하나가 폐하고 흥하는 것으로써 한 고을의 인심을 알 수 있고, 한 고을의 인심으로써 한때의 세도를 알 수 있는 것이라면, 어찌 여사로만 돌리고 작게 여길 수 있겠는가?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오래되었는데, 지금 우리 고을 촉석루를 보니 더욱 그러함이 믿어진다.
누는 용두사(龍頭寺) 남쪽 돌벼랑 위에 있는데, 나는 옛적 소년 시절에 여러 번 올라가 보았다. 누의 규모는 우람하고도 널찍하여 내려다보면 까마득하고, 그 밑으로는 긴 강이 흐르며 여러 봉우리는 바깥쪽으로 벌여서 있다.…
인기(人氣: 사람의 기개)는 맑고 풍속은 후하며 늙은이는 편안하고 젊은이는 순종하며, 농사짓는 농부나 누에치는 아낙네는 제 임무에 부지런하고, 효성스런 자식과 사랑스런 손자는 제 힘을 다하여 봉양하고, 방아타령은 마을을 이어가며 높으락낮으락 하고, 고기잡이노래는 강안(江岸)에 이어져 길었다 짧았다 하며, 날새들은 무성한 숲속에서 스스로 알아서 우짖으며 날아다니고, 어별(魚鼈)은 촉고(數罟:코가 촘촘한 그물)에 걸릴 위험이 없으니, 한 구역의 물건들이 모두 제 자리를 얻은 것을 볼 수 있다. 더구나 화사한 꽃, 시원한 그늘, 맑은 바람, 밝은 달이 때맞추어 찾아오고, 소장영허(消長盈虛: 초목이 자라고 스러짐과 달이 차고 이지러짐)와 회명음청(晦明陰晴: 어둡고 밝음과 흐리고 갬)의 변화가 서로 이어져 끊이지 않으니 즐거움이 또한 무궁하다.
그 명칭의 의미에 대해서는 담암(淡庵) 백선생(白先生:고려 후기의 문신 白文寶)의 기문이 있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강 가운데 돌이 삐죽삐죽 나온 것이 있어서 누를 짓고 이름을 촉석(矗石)이라 했다. 김공(부사 金忠光)의 손으로 시작되고 안상헌(安常軒: 상헌은 호, 이름은 安震)이 다시 지었는데 모두 장원급제한 이들이다. 그래서 겸하여 이름한 것이다.( 때문에 일명 壯元樓라고도 한다.)” 하였다.…
고을의 부로(父老)인 전판사(前判事) 강순(姜順)과 전사간(前司諫) 최복린(崔卜麟) 등이 여러 노인들과 같이 의논하기를, “용두사(龍頭寺)는 읍을 창설하던 초기부터 지상(地相: 집이나 건물을 지을 때에, 그 터의 형세를 관찰하여 길흉을 감정하는 일.)을 살피던 곳으로, 촉석루를 세워서 한 지방의 승경이 되었다. 옛사람이 그로써 사신과 빈객의 마음을 즐겁게 하여 화기(和氣)를 불렀고 그 혜택이 고을 백성에게 미쳤던 것인데, 폐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나 능히 중수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우리 고장 사람들이 함께 책임을 져야할 일이다.” 하였다.
이에 각각 재물을 갹출하여 용두사에서 전향(典香: 향을 올림)하고 있는 중 단영(端永)이란 자를 시켜서 그 일을 담당하게 하는 동시에, 내가 이 일들을 임금께 아뢰니 금단(禁斷)하지 말라는 분부가 내리게 되었다.
임진년 겨울 12월에 판목사(判牧事) 권충(權衷: 고려 말·조선 초의 무신. 공조판서, 의정부찬성사를 지냄.) 공이 부임하여 판관 박시혈(朴施絜)과 같이 여러 어른들의 말을 채택해서 이듬해 봄 2월(1413)에 강의 제방을 수축하는데, 백성을 나누어 대오(隊伍)를 만들고 한 대오가 각기 한 무더기씩 쌓게 하여 논밭과 마을에 대한 여러 해의 근심을 제거하게 하니 열흘이 못 가서 일을 마치게 되었다.
나아가서 자급(自給)을 못하는 자를 도와주고, 놀고먹는 자 수십 명을 소집하여 부지런히 서두르게 하여 9월에 이르러 완성을 보았는데, 높다란 건물이 드디어 새롭게 이루어지니 뛰어난 경치는 예와 같았다.
지금 판목사 유담(柳淡)공과 판관 양시권(梁施權)이 후임으로 와서 단청을 하고 또 관람과 아울러 관개(灌漑: 논밭에 물을 댐)에 대한 것을 계획하여 수차(水車)를 만들고 둑을 쌓아서 백성의 이익을 도모해 주었다. 부로(父老)들은 그와 같은 시말(始末)을 갖추어 나에게 청하기를, “…기문(記文)을 만들어서 영원한 세대에 보여주도록 하지 않으려는가?”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이는 모두 어른들의 지원으로 된 것이지 내가 무슨 공이 있으리오.” 하였다.
그러나 이미 인심과 세도로써 기쁨을 삼고 또 어른들의 뜻에 느낀 바 있어 전후에 견문한 바를 삼가 적는다.…
나는 다행히 퇴직할 날이 가까웠으니, 생각으로는 필마로 고향에 돌아와서 여러 어른들과 매양 좋은 철 기쁜 날에 누에 올라 술 마시고 시 지으며, 그 즐거운 바를 함께 즐기면서 남은 세월을 마치고자 하니, 부로들이여, 기다려 주시기를 바라노라.
♣해설:
지은이 하륜(河崙: 1347~1416)의 본관은 진주,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으로, 여 말ㆍ선초의 문신이다. 초기에는 정도전(鄭道傳)과의 불화로 그다지 비중 있는 직책을 맡지 못하다가,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우고 정당문학이 되었으며, 이후 벼슬은 좌의정에까지 올랐다.『동국사략』을 편수하고『태조실록』 편찬을 지휘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 저서에 『호정집』이 있다.
이 글은 『동문선』 제81권 「記」「진주 촉석루 기」에 실려 전하는데, 촉석루는 우리나라 3대 누각(평양 부벽루,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중의 하나이다. 번역은 『한국고전종합 DB』를 따랐으나, 부분적으로 윤문하였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