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 고전수필 순례 28) ‘명엽지해(蓂葉志諧)’에서(홍만종)
(속 ․ 고전수필 순례 28) '명엽지해(蓂葉志諧.hwp
(속 ․ 고전수필 순례 28)
‘명엽지해(蓂葉志諧)’에서
홍만종 지음
이웅재 해설
♣부부가 거울을 가지고 송사를 벌이다
산골에 사는 어떤 여자가 서울의 시장에는 청동(靑銅) 거울이라는 것이 있는데, 보름달의 그림자처럼 둥글다는 말을 들었다. 늘 한번 얻어서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는 연고가 없었다. 마침 지아비가 상경을 하게 되었는데, 때마침 보름이었다. 여자는 거울의 이름은 잊어버린지라 지아비에게 말했다.
“서울의 시장에는 저 달과 같은 물건이 있다고 합디다. 낭군께서는 그것을 꼭 사 오셔서 제가 한번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지아비가 서울에 다다랐을 때엔 달은 이미 하현달이 되어 있었다. 반달을 쳐다보고는 시장에서 그와 닮은 것을 찾은즉 여인들이 사용하는 빗이 그와 닮았다고 여기고, ‘아내가 사오기를 청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구나.’라고 생각하고는 드디어 나무빗을 사가지고 돌아왔는데 달은 다시 보름달이 되어 있었다. 그 사람은 빗을 처에게 내어주면서 말했다.
“서울 시장에 달과 같은 것이라곤 이것밖에는 없었소. 그래서 갑절을 주고 사 왔소.”
그 아내는 사온 것이 자기가 구하던 것이 아니라서 싫었다. 달을 가리키면서 지아비를 나무랐다.
“이 물건이 과연 저 달과 비슷하단 말이오?”
지아비가 말했다.
“서울 하늘의 달은 이 물건과 비슷했는데 고향의 달은 비슷하지 않으니 이상하군.”
드디어 다시 사러 갔다. 다음 달 보름에 서울에 도착하여 밝은 달을 쳐다보니 거울처럼 둥글었다. 그래서 거울을 사기는 했으나 얼굴을 비춰본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집에 돌아와서 펼쳐놓고 아내에게 보여주었다. 아내가 비추어 보니 지아비 옆에 어떤 여인이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평생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던지라, 지아비 옆에 자신의 모습이 비춰진 것임을 알지 못하고, 지아비가 새로운 여자를 사가지고 온 줄 알고는 크게 노하여 투기(妬忌)를 하기 시작했다. 지아비가 해괴하게 여겨 말했다.
“내가 한번 봐야겠군.”
곧 거울을 들여다보니 아내의 곁에 어떤 남자가 하나 앉아 있었다. 지아비도 또한 자신의 얼굴을 본 적이 없던 터수라, 아내의 곁에 자신의 모습이 비춰진 것을 알지 못하고 아내가 간부(奸夫)를 하나 얻었다고 생각하여 크게 노하여 서로 붙들고 싸웠다. 부부는 거울을 가지고 관가로 가서 서로 호소했다. 아내가 말했다.
“지아비가 새로이 아내를 얻어가지고 왔습니다.”
지아비가 말했다.
“아내가 정부(情夫)를 얻었습니다.”
사또가 말했다.
“거울을 올려 보아라.”
드디어 책상 위에 올려놓고 거울을 열어 보았다. 사또도 역시 거울을 본 적이 없는지라, 그 모습이 자신의 것인 줄 알지 못하고 위의와 관복이 자기와 똑 같은 사람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신관 사또가 온 줄로 알았다. 급히 시중드는 아이를 불러,
“나와 교대할 사또가 이미 왔으니 급히 봉인(封印)하라.”
말하고는 드디어 관아에서 물러갔다.
♣싫은 체하며 문고리를 가리키다
어떤 처녀가 있었다. 신혼 첫날밤에 유모가 신방으로 데리고 갔다. 처녀는 자못 굳게 거절했다. 유모가 억지로 업어서 신방으로 갔다. 방문 앞에 이르러 돌쩌귀를 문고리로 잘못 알고서 한참동안이나 잡아당겼는데, 열릴 리가 없었다. 처녀는 겉으로는 비록 무척 거절하는 체했지만, 속마음으로는 더딘 것이 싫어져서 유모에게 말했다.
“이 문이 열린다고 해도 나는 들어가지 않을 거야. 유모가 잡아당기는 것이 문고리가 아니고 돌쩌귀라고 하더라도 말이야.”
♣치마 벗는 소리가 듣기에 좋다
정송강(鄭松江:鄭澈)과 유서애(柳西崖:柳成龍)가 일찍이 청명한 날 교외에서 나그네를 전송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이백사(李白沙:李恒福), 심일송(沈一松:沈喜壽), 이월사(李月沙:李廷龜) 3인도 그 자리에 있었다. 술이 거나해지자 소리[聲]에 대한 품평을 논하고 있었다. 송강이 말했다.
“밝은 달밤에 다락 위에 구름 지나가는 소리가 좋지요.”
일송이 받았다.
“만산홍엽(滿山紅葉)에 바람 앞의 먼 산봉우리에서 나는 소리가 제일 좋습니다.”
서애가 말했다.
“새벽녘 창가에서 졸음은 밀려오는데 자그마한 술잔에 술 따르는 소리가 더욱 묘하지요.”
월사가 받았다.
“산속 초당에서 재주 있는 선비가 시를 읊는 소리 또한 아름답답니다.”
백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여러분의 소리에 대한 말씀들이 모두가 좋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듣기 좋은 소리로야 동방화촉 좋은 밤에 아리따운 여인이 치마 벗는 소리만 하겠습니까?”
좌중의 모든 사람들이 한바탕 크게 웃었다.
♣해설:
지은이 홍만종(洪萬宗:1643-1725)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우해(宇海), 호는 현묵자(玄黙子)로, 조선 효종 때의 학자이다. 젊었을 때부터 와병생활을 하며 은거와 집필로 평생을 보냈다. 특히 평론집이라 할 수 있는『순오지(旬五志)』에서는 정송강의 작품을 극찬하였다. 저서에 『시화총림(詩話叢林)』,『소화시평(小華詩評)』『명엽지해(蓂葉志諧)』등이 있다.
이 글은 소화집(笑話集)인『명엽지해(蓂葉志諧)』중에서 발췌한 글로 번역은 정용수의『고금소총․ 명엽지해』(국학자료원, 1998)를 따랐으나, 부분적으로 윤문하였음을 밝힌다. ‘명엽’이란 ‘명협(蓂莢)이란 풀의 잎’을 말하는데, 이 풀은 요(堯)임금 때 났었다는 풀로, 초하루부터 보름까지 하루에 한 잎씩 났다가 열엿새부터 한 잎씩 떨어져 그믐날에는 다 떨어져 버리고, 작은 달에는 마지막 한 잎이 시들기만 하고 떨어지지는 아니하여 ‘달력풀’이라고도 불리는 풀이다. (2011.7.25. 원고지 17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