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 고전수필 순례 30) 도자설(盜子說)(강희맹 )
(속 ․ 고전수필 순례 30)
도자설(盜子說)
강희맹 지음
이웅재 해설
백성 중에 도둑질을 직업으로 삼는 자가 있어 아들에게 그 술법을 모두 가르쳐주었다. 그 아들이 재주를 자부하여 자신이 아비보다 훨씬 낫다고 여겼다. 언제나 도둑질을 할 적에는 그 아들이 반드시 먼저 들어가고 나중에 나오며, 대수롭지 않은 것은 버리고 귀중한 것을 취하며, 귀로는 능히 먼 데 소리를 듣고 눈으로는 능히 어둠 속을 살피어, 여러 도둑들의 칭찬을 받게 되니 제 아비에게 자랑삼아 말하였다.
“내가 아버지의 기술과 조금도 다름이 없고 강장한 힘은 오히려 나으니, 이것을 가지고 도둑질을 하면 무엇을 못하오리까?”
아비도둑이 말하였다.
“아직 멀었다. 지혜란 배워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직 부족한 것이요 자득(自得:스스로 깨달아 얻음)이 있어야 여유로운 것인데, 너는 아직 멀었다.”
아들이 말한다.
“도둑의 도(道)는 재물을 많이 얻는 것으로 공(功)을 삼는 법인데, 나는 아버지에 비해 공이 항상 배나 되고 또 내 나이 아직 젊으니, 아버지의 나이에 도달하면 마땅히 특별한 수단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아비 도둑이 말했다.
“멀었다. 내 기술을 그대로 행한다면 겹겹의 성도 들어 갈 수 있고, 비밀리에 감춰둔 것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차질이 생기면 화가 따르기 마련이다. 형적이 드러나지 않고 임기응변하여 막힘이 없는 것은, 자득(自得)의 묘가 없으면 못하는 것이다. 너는 아직 멀었다.”
아들은 그 말을 듣고도 들은 척도 아니하니, 아비 도적이 훗날 밤에 그 아들과 더불어 한 부잣집에 가서 자식을 보장(寶藏: 보물을 저장해 둔 창고) 속에 들어가게 하고는 자식이 한참 탐을 내어 보물을 챙기고 있을 때, 아비 도둑이 밖에서 문을 걸어닫고 자물쇠를 잠그고 일부러 소리를 내어 주인으로 하여금 듣게 하였다. 주인이 집에 도둑이 든 줄 알고 쫓아 나와 자물쇠를 본즉, 전과 같이 잠겨 있으므로 그냥 안으로 들어가 버리니, 자식 도둑은 보장 속에서 빠져 나올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손톱으로 빡빡 긁어서 늙은 쥐가 긁는 소리를 내니, 주인이 말했다.
“쥐가 보장 속에 들어 물건을 절단 내니 쫓아버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
등불을 켜고 자물쇠를 끄르고 살펴보려고 할 때, 아들 도둑이 빠져 달아났다. 주인집 식구가 모두 나와 쫓으니 아들 도둑이 자못 다급하여 벗어나기 힘들 것으로 생각하고, 못가를 돌아 달아나면서 돌을 집어 물에 던졌다.
쫓던 자가, “도둑이 물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하고, 모두 막아서서 찾으니, 아들 도둑이 이 틈에 벗어나올 수가 있었다. 돌아온 후 제 아비를 원망하며 말했다.
“날 짐승도 오히려 제 새끼를 보호할 줄 아는데, 자식이 무엇을 잘못해서 이렇게도 욕을 보이십니까?”
아비 도둑이 말했다.
“이제는 네가 마땅히 천하를 독보할 것이다. 무릇 사람의 기술이란 남에게 배운 것은 한도가 있고, 제 마음에서 얻은 것은 응용이 무궁하다. 하물며 곤궁하고 답답한 것이란 능히 사람의 심지를 견고하게 만들고, 사람의 기술을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냐? 내가 너를 곤궁하게 만든 것은 바로 너를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이요, 내가 너를 위험에 빠뜨린 것은 바로 너를 건져주기 위한 것이었다. 네가 만약 보장에 갇히고 사뭇 쫓기던 환란을 당하지 아니하였다면, 어찌 쥐 긁는 시늉과 돌을 던지는 희한한 꾀를 낸단 말이냐? 네가 곤경에 부닥쳐 지혜를 짜내고 임기응변으로 기이한 수를 썼으니, 마음의 밑바닥이 한번 열리기 시작하면, 다시는 미혹해지지 않는 법이다. 네가 마땅히 천하를 독보할 것이다.”
뒤에 과연 천하에 적수가 없게 되었다.
무릇 도둑이란 천하고 악(惡)한 기술이지만 그것도 반드시 자득(自得)이 있은 연후에야 비로소 천하에 적수가 없는 법이다. 하물며 사군자(士君子)가 도덕공명(道德功名)을 뜻함에 있어서랴? 대대로 벼슬하여 국록을 누리던 후예들은 인의가 아름답고 학문이 유익함을 모르고서, 제 몸이 이미 현달하여 영예로운 자리에 오르면 능히 전열(前烈:전대의 위인)에 항거하여 옛 공업(功業)을 무시하니, 이는 바로 자식 도둑이 아비 도둑에게 자랑하던 때에 해당한다. 만약 능히 높은 것을 사양하고 낮은 데 거하며, 호방한 것을 버리고 담박한 것을 사랑하며, 몸을 굽혀 학문에 뜻을 두고, 성리(性理)에 잠심하여 습속에 휩쓸리지 아니하면, 가히 남들과 제등(齊等: 여럿이 서로 같음)할 수도 있고 공명을 취할 수도 있으며, 써주면 행하고, 버리면 들앉아서 적합(適合)하지 않은 것이 없으리니, 이는 바로 자식 도둑이 곤경에 부닥치자 지혜를 짜내서 마침내 천하를 독보하게 되는 것과 같다. 너도 또한 이와 근사(近似)하니 도둑이 보장에 갇히고 사뭇 쫓기는 것과 같은 환란을 꺼리지 말고, 마음에 자득이 있도록 할 것을 생각해야 될 것이다. 가벼이 여기지 말라.
♣해설:
지은이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의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경순(景醇)이며 호는 사숙재(私淑齋)·운송거사(雲松居士)·무위자(無爲子)이며,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화가인 강희안(姜希顔:「노송(老松)」조에서 소개한 바 있음)의 동생이며, 벼슬은 좌찬성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산수화에도 능했으며 저서에는 『사숙재집(私淑齋集)』『금양잡록(衿陽雜錄)』『촌담해이(村談解頤)』 등이 있다. 이 글은 『속동문선(續東文選)』제17권 「설(說)」에 나오는 「훈자오설(訓子五說)」중의 하나이다.
번역은 『한국고전종합 DB』를 따랐으나, 부분적으로 윤문하였음을 밝힌다.
http://blog.daum.net/leewj1004(2011.7.30.원고지 16매)
(속 ․ 고전수필 순례 30) 도자설(盜子說)(강.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