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1)MBC 지붕 위에서
(거북이1)
MBC 지붕 위에서
이 웅 재
한여름 햇볕이 따가웠다. 가만히 있어도 등줄기에서 땀이 줄줄 흐른다. 그래도 인사동(仁寺洞) 길을 걷는 일은 늘 기분이 좋다. 외국인들의 눈에서마저 인사동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곳이라고 생각들을 하고 있지 않은가?
골동(骨董)의 거리, 화랑(畵廊)의 거리요, 전통의 거리, 낭만의 거리를 걷는데 까짓 등줄기의 땀쯤이야 대수로울 것이랴? 콧노래마저도 저절로 흘러나오는데, 발길은 인사동 네거리(인사동 15번지)로 들어선다. 그런데 이게 뭐지? 한쪽 길바닥에 무슨 동판(銅版) 같은 것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61년 처음 방송 MBC’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61년 처음 방송 MBC?
나는 고3이었다. 대학입시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고3이었다. 그리고 여름방학 때였다. 그러나 나는 할 일이 없었다. 나에게는 ‘대학’이란 손을 뻗어 잡아보기는커녕 쳐다볼 수조차도 없는 저 높은 곳에 있는 신기루였다. 아니, 아니다. ‘신기루’란 그래도 처음에는 붙잡을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쫓아가기라도 하는 대상이기가 일쑤인데, 나에게는 그곳은 아예 범접할 수 없는 곳, 그러니까 궁금(宮禁)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러한 내가 안 되어 보였던지, 이웃집 아저씨가 찾아왔다.
“요새, 별로 할 일이 없어 보이는데, 나하고 돈벌이 하지 않을래?”
모든 일에 의욕이 없어진 나는 굳이 돈벌이를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저 시간이라도 죽일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하여, 두세 번 간청하는 그 아저씨의 말에 못 이기는 척 따라 나섰다. 내가 간 곳은 바로 인사동 15번지였다. 그런데 목적지가 특이했다. 건물 내의 그 어느 곳도 아닌 곳, 그 건물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으로 가는 것이었다. 가장 높은 곳? 그곳은 바로 지붕이었다.
아저씨가 말했다.
MBC는 동일 가구 건물 2층(현 덕원갤러리)에 있었다. 아저씨는 요즘 보면 지하철역이나 건물 바닥 같은 데에 붙어있는 껌을 제거할 때 사용하는 것과 비슷하게 생긴 ‘헤라칼(주걱칼)’을 나에게 쥐어주었다.
1961년 12월 2일 개국한 MBC 라디오 방송
(호출부호 HLKV, 주파수 900kHZ, 출력 10kW).
-사진:‘위키 백과’에서 인용
그야말로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였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생각도 느낌도 없었다. 그저 덤덤히 그 기구를 받아들었다. 그리곤 오래되어 군데군데 뜯어져나가기도 한 지붕의 낡은 페인트를 벗겨내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그저 무덤덤하게 시키는 대로만 했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까 차츰 열중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어떻게 하면 빨리 벗겨낼 수 있을까? 나름대로의 방법마저도 고안해 내기에 이르렀다.
뜨거운 햇볕에 주룩주룩 쏟아지는 땀방울을 마악 벗겨내려는 곳의 양철지붕에 집중적으로 떨어지게 한다. 그냥 벗겨내면 바싹 마른 지붕의 페인트는 작업용 칼이 가는 곳마다 그냥 툭툭 조각을 내게 되어 끊어지고 끊어져서 일의 능률이 오르질 않았다.
그런데 땀방울이 떨어진 곳은 그 물기 때문에 아주 약간이기는 하지만 그 강도가 약해져서, 조각이 나서 서로 분리될 수도 있는 옆 부분과 연결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땀방울을 떨어뜨린 후 그곳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긁어내면 상당히 넓은 부분을 한꺼번에 제거할 수가 있다는 것을 체험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그와 같은 작업은 어찌 보면 게으름을 피우는 일처럼 보일 수가 있었다.
처음엔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했었나 보다. 그래서 내게 몇 번 재촉을 하기도 했다.
“조금만 더 빨리 할 수는 없겠니?”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아저씨보다도 내가 벗겨내는 면적이 더 넓은 것을 알기 시작한 아저씨는, 의외의 눈으로 가끔씩 나를 쳐다보기만 할 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질 않았다.
여름날은 길었다. 하지만 전심전력으로 일을 하는 사람에겐 시간관념이 존재하질 않는다. 무더위 따위도 문제가 될 수 없다. 오로지 한 가지 일에만 전념하고 있는 판국에 무엇이 문제가 될 것인가? 그렇게 그날 일은 끝났다.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에야 그 페인트 벗기는 작업은 끝났는데, 아저씨가 말했다.
“원래 내일까지 페인트 벗기는 일을 할 예정이었는데, 니가 열심히 잘해 주어서 오늘 다 끝냈구나. 내일부터는 새로 페인트칠을 하는 일을 하도록 하자.”
그러면서, 그날은 시간이 늦었으니까 그 인사동 15번지 건물의 지하에 있는 다방에서 자기로 했다. 영업이 끝난 다방의 의자들을 몰아놓고 거기서 자자는 것이었다. 그래야 집에까지 갔다 왔다 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으니, 오늘처럼 일을 하면 내일 하루 만에 페인트칠도 끝낼 수 있을 것이 아니냐는 말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그날 밤 잠을 자면서 조용히 나 자신을 생각하여 보았다. ‘이렇게 칠장이, 아니 아저씨는 원래 목수이니까 나는 애기목수가 되는 게 아닐까? 그게 내가 갈 길인가?’
하루 종일 피곤했던 몸, 불편한 잠자리였지만 금방 꿈속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정신 차려! 이건 네가 갈 길이 아니야!”
꿈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게 누구의 소리였던지는 지금까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 소리 때문에 나는 이튿날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아저씨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나는 지금도 생각해 본다. 그 아저씨를 계속 따라다녔다면, 나는 아마 이름 난 대목수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서울시내 중심부에 있는 이름난 건물의 지붕을 새로 단장하는 일을 맡았을 정도라면, 그 아저씨는 그래도 알아주는 ‘-장이’는 아니었을까 싶었던 때문이다.
어쨌든 나의 인생길은 여기서 완전히 방향이 달라져 버리고 말았다.
(2011.7.28. 원고지 18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