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니
재밌니
이 웅 재
“재밌니?”
대낮. 오래간만에 낮술 한 잔을 하고 오는 길이었다. 낮술은 ‘지 에미애비도 몰라본다.’는 말이 있어 조심 또 조심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토요일이면 꼭 낮술 한 잔 하자는 친구가 있어 이리저리 거절도 해 보지만, 계속 그럴 수는 없어 간혹 오늘처럼 거나해질 때도 있었다. 어찌 생각하면 저녁나절의 술이란 ‘부어라 마셔라’, 술이 술을 불러오는 일이 다반사이니만큼 낮술이 오히려 더 건전하게 마시는 술일 수도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친구는 11시부터 술집에 앉아 전화 독촉 질이다. 빨리 오라는 것이다. 눈길에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라구 저토록 성화를 해 대는지 모르겠다. 빨리, 빨리…. 목울대가 걸음걸이보다 더 빠르게 재촉한다. “꿀꺼덕!” 침 넘어가는 소리다. 푸짐한 안주와 함께 톡! 쏘는 쐬주 한 잔이 벌써 목울대를 자극하는 것이다. 그래, 빨리, 빨리….
친구는 벌써 술 한 병을 거의 다 비우고 있었다. 불콰해진 모습이 보기에 좋다. 허겁지겁 도착한 내 앞으로 안주거리가 주섬주섬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나도 급하다.
“여기, 빨간 딱지 하나요!”
얼핏 무슨 말인지 궁금해 할 사람도 있겠지만, 술집에서는 다 통한다.
“새지 않는 것으로 줘요!”
친구는 한술 더 뜬다. 자기의 술병은 거의 다 비었다는 얘기다. 마시기도 전에 벌써 술이 다 새어버렸다는 엄살인 것이다. 술꾼들은 그렇게 돌려치기를 잘한다. 곧이곧대로 하는 말에는 술맛이 나지를 않기 때문이다. ‘이모’도 잘 알아듣는다. 요즘에는 주모를 ‘이모’라고 불러야지만 깍두기 한 조각이라도 더 얻어먹을 수가 있다. ‘아가씨’는 나이도 안 쳐 주는 섭섭함이 곁따라 오고, ‘아줌씨’는 그저 수더분한 촌티 나는 여성의 대명사로 여겨서다. 엄마의 자매를 가리키는 ‘이모’야말로 엄마 수준의 친근미와 조카다운 무간(無間)함이 어우러지는 적당하고도 알맞은 호칭인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제 술을 자신이 따라 마셨다. 한 자리에서 같이 마시지만, 서로 주종(酒種)이 다른 것이다. 그게 편하다. 주거니 받거니, 그걸 수작(酬酌)이라고 하던데, 수작은 수작을 낳는다. 적절한 선에서 멈추기가 힘든 이유다. 내 술 내가 따라 마시고, 네 술 네가 부어 마시는 거다. 깨끗하지 않은가? 남의 술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일체 간섭이 없는 게다. 그러니 요새말로 쿨하지 않은가? 게다가 요사이 하늘처럼 떠받드는 ‘개성’이 느껴지는 술 마시기가 아닌가?
술이 적당하게 취해 온다.
“이모, 여기 커피 한 잔.”
이제는 마무리다. 마무리는 깔끔해야 한다. 엎치고 덮치고 싸워서 승패가 거의 갈라졌던 바둑판도 끝내기에서 승부가 뒤집히는 일이 다반사, 커피로 입가심을 해야 술판이 상큼하게 정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술판을 마감하고 나서 야탑천 산책길을 따라서 걸어서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대로변으로 간다든가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꼴불견’의 이미지를 줄 수도 있다. 걸어서 오고 가고 30분쯤이면, 적당한 양의 산책 효과도 덤으로 따라붙는가 하면, 산책로 주변의 풍치도 감상을 할 수가 있게 되니, 그 아니 좋을쏜가? 여기는 서양에서는 Morning Glory, 동양에서는 견우화(牽牛花)라고 부르는 공해에 아주 민감한 나팔꽃이 벚나무 듬직한 둥치를 타고 기어오르며 피어나던 곳, 거기는 밤나무꽃 냄새와는 상반된, 여성의 냄새로 알려진 아가위나무[山査나무] 꽃이 피었던 곳, 저기는 신이 제일 먼저 만든 꽃이라는 코스모스가 한들거리던 곳이라는 생각 따위를 하면서 걷노라면 나름대로 주취(酒醉) 후의 적당한 흥취도 만끽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하탑초등학교 옆 무잡모퉁이를 돌아설 때였다. ‘무잡모퉁이’의 ‘무잡’이란 ‘물잡이>물잡>무잡’으로 변한 말이니, 이곳은 아마도 분당 신시가지가 들어서기 전에는 논이나 밭에 물을 대기 위하여 물을 잡아놓는 보(湺)가 있었던 곳이 아닌가 싶은 곳이다. 앞쪽에 예닐곱 살 정도로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하나 지나가고 있었다. 아이는 질펀하게 녹아내리는 눈 덮인 길을 발로 툭툭 차면서 갔다. 그러더니 발길에 채어 나가떨어진 피자 반쪽만한 얼음조각을 보고는 잽싸게 그걸 주워든다. 그리고는 그것을 가지고 비행기 놀이를 하듯 이리저리 돌리면서 함박웃음을 피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재밌니?”
“그럼요, 얼마나 재밌는데요….”
그 대답이 더욱 재미가 있었다. 그저 ‘네!’ 하는 대답은 형식적인 대답이다. 물어보니까 마지못해서 하는 대답이다. 그러한 대답에서는 전혀 감흥이 느껴지질 않는다. 제 생각을 꾸밈없이 솔직하게 하는 대답, 그래서 더욱 귀염성 있게 보였다. 한참 동안이나 그 아이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내게도 그 즐거운 마음, 말하자면 ‘행복 바이러스’가 전염이 되었는지 스르르 입가에 미소가 돈다. 철수가 행복하면 철수를 알고 있는 영희도 행복해지고, 그 영희의 친구와 남편, 옆집 아저씨까지도 행복해지게 된다지 않는가? 주위에 행복한 사람이 많게 되면 그 사람은 저절로 여러 사람의 중심축을 이루게 되고, 따라서 그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성공에 이를 가능성이 증대된다지 않는가?
한 국가의 국민 건강 척도는 국내총생산과 같은 양적인 수치로만 판단해선 안 된다. 최근 국가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로 방글라데시나 부탄, 코스타리카 등이 선정되었던 점만 보더라도 이는 쉽게 증명이 되는 일이라 하겠다.
사소한 일, 일상적인 일, 예컨대 술 한 잔 마시는 일이나 길 가던 아이가 발길에 차이는 얼음조각 하나, 돌멩이 하나에서도 즐거움을 느낄 수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함께 기쁜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요컨대 삶이란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재미에 ‘유익성’을 더할 수 있다면 그것은 최상의 행복 바이러스를 생산하는 지름길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