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인물열전

어머니의 등창 농혈(膿血)을 빨고 아버지의 혈분(血糞)을 맛본 출천지효(出天之孝) 김극일

거북이3 2013. 1. 26. 10:08

 

경북 인물열전 (67)

경북 인물열전 (67) 어머니의 등창 농혈(膿血)을 빨고 아버지의 혈분(血糞)을 맛본 출천지효(出天之孝) 김극일.hwp

          어머니의 등창 농혈(膿血)을 빨고 아버지의 혈분(血糞)을 맛본 출천지효(出天之孝) 김극일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6. 慶尙道 淸道郡 孝子 條]

                                                                                                                                                 이 웅 재

 

김극일(金克一: 1381~1456)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효자로서, 본관은 김해, 자는 용협(用協), 호는 모암(慕庵)이다. 의흥현감(義興縣監) 김서(金湑)의 아들이며, 벼슬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지내고, 집의(執義)의 벼슬에 추증되었으며, 사시(私諡: 문장과 도덕이 뛰어난 선비이지만 지위가 낮아 나라에서 시호를 내리지 아니할 때, 그 선비에게 친척이나 고향 사람 또는 제자들이 올리던 시호)는 절효(節孝)이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생전에 출천지효(出天之孝)로 칭송을 받아, 세종(世宗) 때에는 효자 정려(孝子旌閭)가 건립되고, 성종(成宗) 때에는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효자 비문(孝子碑文)이 세워졌다.

그는 총명이  범인을 뛰어넘어 5살이 되어서는 숙사(塾師)에게 학문을 배울 때 한 번 배운 것은 문득 외우며 통달하니 마침내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문인이 되어 문장에 능통하였다.

그가 태어나기 전 하루는 그 아버지인 현감 김서의 꿈속에 주자(朱子)가 현몽하여 소학 책 한권을 건네주며 말했다. “아들이 태어나거든 이 책을 읽히도록 하여라. 그리하면 장차 이 글을 실행할 효자를 둘 것이니라.”

그날부터 태기가 있어 14개월 만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지극하여 아버지께서 출입하시면 반드시 지팡이와 신을 받들어 드렸다. 아버지가 만년에 두 첩을 두었는데, 어머니가 혹 불편해하며 음식을 들지 않으면 그도 먹지 아니하고 기다렸다가 어머니와 함께 먹었다. 두 서모에게도 늘 지성으로 대하여 가정에 이간질하는 말들이 없었다.

어머니께서 등창을 앓아 고생하게 되었더니, 손으로 누르면 아플까 저어하여(두려워하여) 항상 입으로 그 농혈(膿血)을 빨아내어 낫게 하였고, 아버지가 이질로 설사를 하게 되니 걱정하여 술을 즐겨한 까닭이라 여기고 그 증상을 알고자 하여 혈분(血糞)을 그릇에 담아 하루 밤이 지난 후에 맛보며 크게 걱정하여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완치케 하기도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풍각현(豐角縣)의 경계에 장사지내고 장례 후에는 무덤가에 여막(廬幕)을 짓고 조석으로 제사를 지내었다. 극한(極寒)이나 혹서(酷暑) 또는 우중(雨中)을 가리지 아니하고 날마다 아버지의 처소에 문안하고 여막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본가와의 거리가 30여 리나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그 애통함이 모친상 때보다도 더하여 늘 여막에서 조석으로 묘 곁에 엎드려 있으면서, 날이 어두워져도 그치지를 아니하였다. 그의 효는 동물마저 감동시키는 효다. 동물 중에 가장 인륜과 어그러짐이 호랑이보다 심한 것이 없는데, 호랑이 또한 정성스런 그의 효에 감동하여 길들여진 것이 기르는 개 같았다. 그가 묘 곁에 엎드려 있노라면 호랑이가 와서 마치 호위라도 하는 듯 그 곁에 웅크리고 앉아 있어도 겁내지 아니하였고, 제사를 지내고 남은 제물로 먹이기를 가축같이 하였다. 호랑이도 그 앞에 다가와서 타라는 시늉을 하여 그가 등에 올라타면 본가에까지 모셔다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짐승마저도 감복을 하였으니, 그의 효행은 하늘마저도 보답함을 보인 것은 아니겠는가?

그렇게 삼년상을 마치고 나서도 더욱 정성을 다하여 조석으로 아뢰고, 무릇 맛있는 음식이나 철 따라 나는 새로운 음식은 사당에 천신(薦新)을 드리기 전에는 감히 맛보지도 않았고, 손님을 맞이하고 응대함에 있어서도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바쁘고 경황이 없을 때라도 부모가 평일에 앉았던 자리에는 감히 앉지를 아니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두 서모를 섬기되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보다 오히려 정성을 더하여 편안하게 섬겼고, 음식이나 의복과 생활에 필요한 것을 언제나 한결같이 나누어 드렸으며 사후에는 장송(葬送)을 예로서 후하게 하고 심상기년(心喪朞年: 상복은 입지 않으나, 근신하며 기간을 채움)하였으며, 매번 사시제(四時祭) 때마다 반드시 지전(紙錢)을 붙였다.

그는 성품이 편안하고 조용하며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장인인 한성판윤 이간(李暕)이 조정에 있을 때, 그에게 출사(出仕)하기를 권하였으나 그는 노친이 계셔 그 곁을 하루라도 떠날 수 없다 하며 벼슬에 유념치 않고, 의관을 정제한 채 소학의 글을 읽어 몸소 실행하였다. 무릇 향리와 인근 마을지역의 조상(弔喪)에도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비록 비복이나 미천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처신하였다.

그의 특이한  효행은 『삼강행실(三綱行實)』에 실려 전한다. 후에 향리에서 아들 육형제의 교육은 물론 후학들의 계도에 힘써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향년 75세였다.

경북 청도군 각북면 명대리(淸道郡 角北面 明大里)에는 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운계사(雲溪祠)가 있다. 또한 세종 때 청도군수 이기(李掎)의 보고에 따라 효자정려(孝子旌閭)가 건립되었고, 1482년(성종 13) 김종직(金宗直)이 찬한 효자문비가 다시 건립되었다. 청도의 자계서원(紫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아들 김맹(金孟)은 세종 때 문과에 올라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밤에 용마(龍馬)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김준손(金駿孫), 김기손(金驥孫), 김일손(金馹孫)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가 모두 빼어나서 ‘김씨삼주(金氏三珠)’로 일컬어졌다.

김일손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중종 때의 영의정(領議政) 남곤(南袞)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濯纓 : 김일손의 호) 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 그의 문장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한다."라고 김일손의 문장을 극찬하기도 하였다.

후손으로는 조선 풍속화의 대가인 김홍도(金弘道)가 유명하고, 시조집 "해동가요(海東歌謠)"에 시조 57수를 남겼으며,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하고, 김수장(金壽長)과 함께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시조의 정리와 발달에 크게 공헌한 남파(南坡) 김천택(金天澤) 등이 있다. (2013.1.26. 원고지 16.4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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