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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역사와 문화

거북이3 2013. 7. 11. 11:47

 

서울의 역사와 문화(제 23회 수필문학 하계 세미나 발표용, 2013.7.10.11시, 서울 명동역 앞 동보성 4층)

                                                                                                                                                                 이 웅 재 정리

☆서울의 역사

서울이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서 최초로 수도로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백제 건국 초기로, 서울은 찬란한 백제문화의 전통을 이어받은 도시이다. 삼국시대에는 삼국의 주도권 쟁탈전이 가장 치열했던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서울은 고려를 거쳐 조선의 건국과 함께 다시 한반도의 수도로 자리 잡게 되었다. 조선 개국 초기에 도성을 축조할 때에 그 규모를 결정하기 어려워 고심하던 중, 어느 날 아침에 깨어보니 밤사이에 눈이 내렸는데 현 도성의 울안은 눈이 녹고, 그 밖에는 눈이 녹지 않아 마치 줄을 그은 듯 남아있어, 이는 하늘의 계시라 생각하고 그 선을 따라 도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래서 눈 울타리, 설울[雪城]이라 불렀고 이 말이 변하여 ‘서울’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그런가 하면, ‘성(城)+울’이었는데, 그것이 변해 ‘서울’로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서울은 언어의 변천 과정상으로 보면, 徐羅伐(羅;일 라, 伐; 말음 확인),徐耶(耶;어조사)伐’ 또는‘徐伐’은 ‘새벌’의 음차식 표기요,

학자들은 국호인 ‘신라(新羅)’나 ‘시림(始林)’도 ‘새벌(서블;수도의 뜻)’이 음차된 이름으로 보고 있다. 백제의 수도인 ‘소부리(所夫里=부여)’나 고려의 수도인 ‘松岳(솔[소]부리>소불>서울)’과 泰封의 수도인 ‘철원(鐵原;쇠벌>새벌>서울)’도 마찬가지이다. 이 ‘새벌’이 다음과 같은 음운의 변천을 겪어서 오늘날의 ‘서울’이 되었다는 것이 국어학계의 통설이다.

‘새벌>셔벌>셔>셔울>서울’

한편, ‘서울’의 지명은, 백제시대에는 慰禮城(溫祚王 때), 고구려에서는 北漢山郡(長壽王 때), 신라에서는 新州(眞興王 때), 통일신라에서는 漢山州로 불렀고, 고려시대에 와서 비로소 漢陽府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가 조선시대에는 漢城府, 일제시대에는 京城府로 불리다가, 광복과 함께 서울로 개칭되면서, 우리나라에 단 하나밖에 없는 한글식 법정 지명이 나오게 되었다. 최근에는 중국 등 한자권을 위하여 ‘수어울(首尔, 首爾)’이라는 표기까지 창안해 내었으나 바람직한 일이라 보기는 어렵다.

서울은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철도와 전차가 개통되고 전화, 서양식 학교, 근대식 병원(1885년, ‘광혜원’→‘제중원’→‘세브란스 병원’의 모체), 근대식 공원(1897년, 원각사 자리에 세워진 탑골 공원) 등 서구 문명을 받아들인 곳이기도 하다.

서울의 오래된 유적지 중 하나는 강동구 암사동 유적지가 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일부가 파손된 채 발견된 것으로 약 6,000년 전 신석기 시대의 신석기인들이 집단 취락을 이뤄 살던 곳이다. 유적지 관람료는 어른 500원(경로 무료), 어린이 300원이며 매주 월요일은 휴무일이다.

 

☆五常을 갖춘 도시

서울은 五常을 갖춘 도시이며, 그 중에서도 ‘信’을 중시하여 건설된 도시이다.

당시 서울의 총 인구가 5만 명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성을 쌓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동원한 장정들의 수효는 4년 간에 걸쳐 약 20만여 명에 이르렀다.

*仁義禮智信(興仁之門, 崇禮門, 敦義門, 肅淸門→肅靖門, 鐘閣)

*仁 : 기부문화가 성하게 됨. 정부 주관 봉사단 65개국에 9,896명 파견, 작년 세계 2위.

작년 구세군 자선 냄비에는 1억 원짜리 수표 등 50여 억 원을 모금하기도 했다.

義 : 敦義門이 일찍 없어져서 義가 약화되었다. 대통령 한 번 하면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가 하면 각종 불의가 판을 치기도 하는 곳이 서울이다. 불탄 崇禮門만 복구할 것이 아니라 敦義門도 복원하기를 기대해 본다.

禮 : 東方禮義之國답게 지하철 경로석이 잘 지켜져서 ‘지공도사’들이 살 만하다.

‘體面’을 너무 차리는 단점도 있다. 먹을 것이 없어 피죽을 먹으면서도 6․25때까지만 해도 오리고기, 꼼장어(←곰장어←먹장어), 쥐치, 곰치(물메기)는 먹지 않았었다.

智 : 막아 놓아서 여성들의 발전이 되지 않았다. 肅靖門을 개방하였더니 여성들의 氣가 세 어지고 이제는 여성 대통령까지 나왔다.

信 : 신뢰 프로세스는 성공하여야 한다. ‘信’ 자는 ‘人+言’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사람의 말 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만약 信이 없다면, 교통신호와 같은 표지도 아무 쓸모가 없는 사회가 되어버릴 것이 아니겠는가?

*북대문: 당시의 정치인들은 백성이 똑똑한 것을 원치 않아서 개혁을 의미하는 肅淸 門이라고 했다가, 편안할 ‘靖’(‘智’보다는 낮은 단계의 ‘꾀’ 정도의 의미인) 자를 써서 ‘肅靖門’이라고 하였다.

서울성곽의 다른 문들과는 달리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해 실질적인 성문 기능은 하지 못한데다가, 여자의 방위인 북쪽에 있기 때문에(북쪽은 음의 기운이 강한 곳) 그 문을 열어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진다 하여 항상 문을 닫았다는 속설도 전하는데, 1968년 1·21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 2006년 4월부터 개방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肅宗 때 洗劍亭 쪽에 세운 水門인 漢北門을 어필로 ‘弘智門’이라고 편액하였다. 그러니까 弘智門은 正北門이 아니다.

*‘鐘路’는 ‘鐘閣’이 있는 길이라는 데에서 생겨난 명칭이니, ‘모을 종(鍾)’ 자가 아닌 ‘쇠북 종(鐘)’ 자로 써야 옳은 표현이다.

 

☆서울의 풍수

*서울의 풍수

祖山: 北漢山

主山: 北岳山(白岳山)

左靑龍: 駱山(약함: 조선조 장자가 임금이 된 것은 역대 조선 왕 27명 중 장자가 왕위를 계승한 경우는 고작 7명이다. 문종ㆍ단종ㆍ 연산군ㆍ인종ㆍ현종ㆍ숙종ㆍ경종이 그들) *대전현충원도

右白虎: 仁王山

開川→淸溪川(일제때 명칭)

漢江: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흐르는 반면에(지세: 東高西低) 청계천은 서에서 동으로 흐른 다. 이런 것을 ‘逆水’라고 하는데, 명당이 되려면 역수가 있어야 한다. 역수는 물이 천천히 흐르고, 바람도 잔잔해 평화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해 준다.

案山: 木覓山(불에 잘 타는 ‘木’자가 있어 화기가 강하다.)

朝山: 冠岳山(기가 셈, 관악산도 불꽃 모양을 닮아 火氣가 있다. 光化門 앞에 불을 먹고 산다는 해태, 숭례문[『阮堂集』에는 申叔舟의 아버지 巖軒 申檣이, 『東國輿地備 攷』에는 讓寧大君의 글씨라고 함.] 편액을 세로로 쓴 이유도 된다. ‘崇’ 자는 불꽃 이 타오르는 모습, ‘禮’는 五行에서 ‘火’에 속한다. 그것을 세로로 써 놓았으니 불꽃 이 훨훨 타오르는 모습이다. 말하자면 ‘以火制火’, 맞불작전을 편 셈이다.)

*풍수(風水)는 문자 그대로 바람과 물이다. 바람은 잡을 수도 볼 수도 없어서 논하기 어렵 다. 반면 물은 볼 수도 있거니와 만져볼 수도 있어 구체적이다.

*풍수에선 得水가 으뜸이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 따라서 바다를 잘 이용해야 한다.

공자도 지자요수(智者樂水, 知者樂水)요,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 했다.

통일 한국의 수도로는 藏風까지 생각한다면 하늘로 무한정하게 날아오를 수 있는 곳이면서 한반도 전체의 중심쯤 되는 곳으로 인천이 좋지 않을까 싶다. 永宗島에는 매일 수많은 비행기가 새처럼 날아오르지 않는가? 6․25때 자칫 패망할 뻔한 위기도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바꾸었던 곳이 바로 인천이었다. 인천의 옛 명칭은 ‘彌鄒忽’ 또는 ‘買召忽’인데, ‘彌’나 ‘買’는 물을 뜻하고, ‘鄒’나 ‘召’는 사잇소리, ‘忽’은 ‘골’과 같이 고장을 뜻하는 말로, ‘물의 고장’ 곧 ‘水城’이 되어 得水를 기본으로 함은 물론이다.

 

☆宗廟의 정문: 蒼葉門(6․25때 분실되어 현판이 없는 문)

대궐, 전각, 4대문, 종묘 정문 이름은 모두 鄭道傳이 지었음. 조선초의 文衡은 鄭道傳→ 權近→卞季良으로 이어지면서 점차 그 권위나 학식이 약화된다.

好事家들의 말이기는 하지만, ‘蒼’은 14획, ‘葉’은 13획, 合 27획→조선이 27대로 끝남 을 예언한 것이요, ‘蒼’을 解字하면 ‘十十八君’, ‘葉’도 解字하면 ‘十十八世’로 英親王까 지 합하여 28세로 조선왕조가 끝날 것을 예단한 명칭이라고 한다.

 

☆서울 출신 대통령은 왜 없는가?(김두규 교수의 국운풍수에 의존)

정조는 이론뿐만 아니라 실무에 대해서도 당대의 그 어떤 지관보다 풍수에 능했다. 훗날 그는 풍수에 대한 저술을 한 권의 문집으로 남겼다(『弘齋全書』 제57권).

그는 한양에 인물이 나지 않는 것은 북한산성 아래에 수십 년 전에 소금을 쌓아 태워 뜸을 뜨고 염산(鹽山)을 만들어 놓는 바람에 지맥이 끊긴 것 때문이 아닌가 의심한다.

경복궁(청와대)의 주산인 북악산을 보자. 봉우리 하나가 단정하게 솟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사천왕의 부릅뜬 눈과 같은 험한 바위들이 곳곳에 보인다. 또한 적지 않은 골짜기들이 패여 있다. 풍수 고전 『撼龍經』(본디 당나라의 楊筠松이 엮은 책으로, 조선 시대에는 잡과의 하나인 음양과 初試에서 ‘撼龍’이란 과목을 지리학의 하나로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에서는, 이와 같은 터를 신단(神壇)으로 적당하다고 적고 있다. 큰 교회나 대성당이 들어서면 좋다는 이야기이다.

청와대에만 들어가면 세상과 격리되어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은 기가 막혔기 때문이다. 원래 이곳 지명이 '숨은골(대은암동·大隱岩洞)'이었다.

해결책은 경복궁을 대통령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광화문을 통해 당당하게 대통령과 관리들이 대통령궁으로 들어가고,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의 대통령과 사절들도 여기서 맞게 한다.

 

☆서울의 상징물

1. 휘장: 해, 산, (한)강을 나타내면서 전체적으로는 신명나는 사람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 이다.

 

 

 

 

2. 슬로건

 

 

 

 

 

3. 브랜드

 

 

 

 

 

4. 서울의 대표 상징 마크: 해치(獬豸)… 동아시아 고대 전설 속의 ‘시비와 선악을 판단하여 안다고 하는 상상의 동물’로 현재 우리 가 흔히 쓰는 해태(海陀)의 원말이다.

‘獬’가 부정한 사람을 보면 뿔로 받는다는 神獸, ‘豸’는 ‘웅크리 고 노려보다’ 등의 의미를 지닌 말로, ‘외뿔 달린 사자)’ 또는 ‘모 든 것을 다 꿰뚫어보는 능력을 갖춘 상상의 짐승’을 가리킨다.

 

5. ‘해치’ 캐릭터: 해치를 형상화한 것으로, 인정이 두텁고 후한 ‘돈 후함’과 익살스러우면서도 ‘해학성’을 겸비한 존재로 형상화했다.

 

6. 꽃, 나무, 새…개나리, 은행나무, 까치

*개나리…개나리는 진달래・벚꽃과 함께 보춘삼화(報春三花)라고 한다. 아무렇 게나 휘묻이를 하든가 꺾꽂이를 하여도 잘 사는 개나리는 신리화(莘荑 花)라고도 하고, 튀밥을 닮았다고 ‘튀밥꽃’이라고도 한다. 서양 이름으로 는 ‘Golden Bell’(黃金鐘)이라고도 한다. 가장 멋진 이름은 아마도 어사리(御賜利)일 것이 다. 장원급제한 사람에게 임금이 하사하던 가화(假花)인 어사화(御賜花)와 같은 이로움을 주 는 꽃이라는 말이다.

*은행나무: 행자목(杏子木)이라고도 한다.

세계에 1목 1과 1속 1종만이 존재하는 식물로, 동아시아 원산의 낙엽교목으로 자웅이주이다. 지질학상 고생대 말기부터 있었기 때문에 ‘살아있는 화석’이라고도 한다. 현재에는 동아시아에 1종만이 남아 있다. 생명력이 강해서 가지와 뿌리를 제거하고 줄기만 남은 은행나무에서도 몇 년간 해마다 은행잎이 돋는 경우도 있다. 환경 오염에도 강하고, 동아시아지역을 제외한 외국인들에게는 가장 이국적인 나무 중 하나라서 가로수로 많이 사용하지만, 열매를 밟으면 암모니아 냄새가 나므로 수나무를 심어야 할 터인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은행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만들어진 징코민, 기넥신과 같은 약들은 혈액순환 개선제로 고혈압 예방 등에는 좋지만, 혈액 응고 작용을 저해하기 때문에 큰 수술을 앞둔 사람은 최소한 3일 전에 섭취를 중단해야 한다. 마늘과 인삼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은행잎은 불에 잘 타지 않고, 살균 방부 성분이 있어 잘 썩지도 않기 때문에, 책갈피로 은행잎을 꽂는 것은 관상용뿐만이 아니라, 책이 상하는 것을 막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모기 유충을 죽이기 위해서 은행잎을 가득 넣은 망을 정화조에 담가두기도 한다.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던 곳을 ‘행단’(杏壇)이라 부르는데, 이때의 ‘杏’을 은행나무로 아는 사람이 많지만, ‘행단’은 살구나무가 있었던 제사 터 혹은 언덕을 의미한다. 중국 산둥성 취푸[曲阜]에 있는 행단 앞에는 살구나무가 있다. 행단은 지금도 ‘학문을 가르치는 곳’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살구나무 씨앗은 한자로 ‘행인(杏仁)’이다. 공자가 ‘仁’을 강조한 것도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원시적인 식물이라 잎이 나는 자리에 열매가 나고 정자가 존재한다는 특징이 있다. 꽃말은 ‘長壽’다.

*까치: 식성은 잡식성으로 작은 물고기·곤충·곡식 등을 먹고 특히 해충을 잡아먹어 예로부터 길조로 여겨져 왔다. 아침에 까치가 와서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 하여 더욱 반겼다. 이는 까치가 낯선 자를 보고 울음소리를 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다가 보은하는 새라고 알려진 까치와 관련된 전설도 널리 퍼져 있다. 그래서일까, 감 따위의 과일을 수확할 때에도 까치밥이라 하여 우듬지의 잘 익은 홍시를 그대로 남겨두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까치는 암수의 애정도 강하고, 새끼를 위하는 품성도 뛰어나다. 암컷이 알을 품고 있는 동안 수컷은 암컷에게 먹이를 날라다 주는 것이다.

제주도와 울릉도에는 센 바람으로 인해서 까치가 없었으나, 근래에는 까치를 방사하여 살도록 하여 주었다.

 

☆明洞(이하는 가급적 현지 설명 자료)

명동(明洞) 이라는 동명은 조선 초 한성부(漢城府)의 명례방(明禮防)에서 유래한다. 현재 대한민국 공시지가 1위의 지역(평당 2억 원)이다.

1930년대 말 명동은 근대적인 도시 풍으로 저마다 특색 있는 분위기를 갖춘 다방 등이 생기면서 시인, 문인, 사진예술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번화가가 되어 한국 문화 예술의 중심지였다.

6․25 이후 사회가 안정되기 시작하면서부터 건축물의 신축 붐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최고의 패션가를 형성하게 된다.

60년대에는 국립극장(현 예술극장), 돌체다방(오상순 씨 등의 단골집), 술집 銀星(崔佛岩 씨 어머니가 경영하던 막걸리집. 여주인은 술값은 주는 대로 받고 외상값을 따지지 않았다. 아들 최불암이 어머니 유품을 정리하다 라면상자 가득한 외상장부를 발견하고, ‘이 돈 다 받으면 부자가 되겠구나’ 싶어 들춰보았는데, 이름 대신 어머니만 알아볼 수 있는 별명과 암호로 적혀 있어서 실망했다는 일화도 있는 곳이다. 1959년 최불암이 대학[한양대 연극영화과]에 간다고 할 때, 단골 樹州 卞榮魯가 막걸리를 따라줬다. 벌컥벌컥 받아 마시고 잔을 다시 드리려니 찌꺼기가 남아 있어 바닥에 털었다. 수주가 최불암의 뺨을 쳤다. “이놈이 곡식을 버리는 놈이구먼!”), 雪波다방(문인 등이 많이 모이던 클래식 음악 다방) 등으로 유명했고,

70년대에는 통기타와 청바지의 문화를 일으킨 곳으로 자리매김되다가, 80년대 이후에는 각종 시위의 중심지로 되었으며, 90년대 이후에는 서울의 대표적 상권을 압구정과 강남에 내어주게 되면서, 점차 ‘10대의 거리’로 변모하였다가, 2000년에 들어서면서 명동은 다시 ‘패션 1번지’로 부상하게 된다.

현재 평일 기준 200여 만, 주말에는 250만, 외국인 5만 명의 유동인구가 북적이는, 10-20대 여성의 거리로 바뀌게 되어, ‘명동’은 번화가의 고유명사가 되었으며, 그러한 연유로 타 지역에서도 가장 번화한 거리를 ‘명동’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아졌다.(춘천의 명동 등)

 

☆東寶城

명동지역에서 제일 큰 규모 와 최고의 시설을 갖춘 중국집이다. 1975년 문을 열어 38년 동안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곳으로 상견례 등의 장소로 많이 이용된다. 남산 일대는 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남산

100만 평의 넓이를 자랑하는 미국 뉴욕의 센트럴 파크, 여의도의 면적보다도 큰 넓이인데, 세계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지역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정말 어머어마한 규모라고 할 수가 있겠다. 공원 주위의 10km 내외는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과 자전거를 타거나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이들로 붐빈다. 그래서인지 특별히 주말과 평일 저녁 7시 이후로는 공원 주변의 차량 통행이 전면 금지된단다. 뉴욕에 센트럴 파크가 없었다면 그만 한 크기의 정신병원이 생겼을 것이라는 말까지 있는 것을 보면, 뉴요커들에게 얼마나 사랑을 받는 공원인지를 짐작할 만하다. 단돈 40만 원만 내면 결혼식 장소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데, 대신 음악을 크게 틀거나 풀 위에 양탄자를 깐다거나 술 접대를 할 수 없다는 등의 제약이 따른단다.

공원 주변에 있는 건물들은 그 모습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다는데, 아직은 이곳 사람들이 겨울철로 여기는 계절감 때문일까? 영화 “나 홀로 집에”에 나오는 비둘기 할머니 대신 비둘기 할아버지처럼 생긴 분이 관심을 끌긴 했지만, 기대에 비해서는 썰렁한 편이었다. 이따금씩 봄소식을 전하기 위한 산수유 꽃이나 조금은 특이하게 생긴 수선화가 그나마 위안이었고, 어쩌다 우리 앞에 나타난 청설모는 도망갈 줄을 모른다. 청설모도 미제는 컸다. 그리고 빛깔도 보다 흰둥이에 가까운 회색빛이었다. 여기에도 스케이트장이 있었다. 호수가 있는 쪽에서 보이는 쌍둥이 빌딩이 이 근처에서는 제일 비싸단다.

그런 도심 속의 공원을 걸으니 기분이 한결 상쾌해졌다. 좀더 걸으면서 공원의 흥취에 보다 깊이 빠져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다.(이웅재, ‘미국문화체험기’에서)

센트럴 파크의 넓이에 버금가는(90여만 평) 남산은 해발 265m의 공원으로 애국가 2절에도 나오는 곳으로 1940년 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다. 센트럴 파크보다도 훨씬 낭만적인 연인들의 공원이라고 하겠다. 본래 이름은 仁慶山이었는데, 나라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산신령을 모시는 신당을 세워 산신 木覓大王을 모시면서 木覓山으로 불렸다. ‘木覓’은 남쪽 산을 뜻하는 순 우리말 ‘마뫼’를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라 하기도 한다.

센트럴 파크에는 없는 韓國索道와 N서울타워(이용 요금: 성인 9000원, 경로 7,000원), 한옥마을 등이 있고, 타워 아래에는 사랑의 자물쇠, 烽燧臺, 국립극장과 안중근 기념관 등이 있다.

 

☆봉수대(LH토지주택박물관 학예사 김주홍, 서현문화의 집 관장 윤종준의 성남문화해설사 양성교육 교재에 의함)

烽燧는 중국 西周 말기에 시작된 것으로, 幽王이 미인 褒似의 웃음을 보려고 허위 봉화를 올렸다가 망하게 되었다고 한다(司馬遷의 『史記』「周本紀」). 우리나라의 경우, 가락국 金首露王 때 許黃玉의 도래시부터 사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 『삼국유사』「駕洛國記」).

봉수대는 먼 곳까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適地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 근처에는 대개 핸드폰 통신 안테나가 있다.

烽燧란 밤에는 烽火(횃불, 연료는 나무)로 낮에는 燧火(연기, 연료는 이리의 똥, 그래서 狼煙이라고도 함, 낭연은 바람이 불어도 곧게 올라가는 성질이 있음.)로 신호를 전달하였고, 비가 오거나 흐린 날에는 화포나 북, 角聲(나팔) 또는 깃발로 알리거나 봉수군이 직접 달려가서 전하기도 하였다.

『經國大典』에 의하면, 평상시에는 1개의 홰(平安火), 적이 나타나면 2炬, 경계에 가까이 접근하면 3거, 경계를 침범하면 4거, 전투가 벌어지면 5거의 홰를 올리도록 규정되어 있다. 봉수는 통상 하루 만에 서울의 남산봉수대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烽軍의 숫자는 시대에 따라 다소간의 변화가 있으나 대체로 5명씩 5일 만에 교대하여 25명이 근무하고 烽火保 75명이 봉군의 생활을 지원하였다고 한다. 『東國輿地勝覽』에는 최대 738개의 봉수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봉수제도는 1894년에 폐지되지만, 최근 통일기원봉화제 등의 행사로 되살아나게 되었다.

남산에는 5개의 봉수대가 있었는데, 조선 태조 3년(1394)에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뒤 설치되어, 약 500년 동안 사용되다가 일제강점기에 모두 파괴된 것을 수원 화성에 있는 봉수대를 참고해 1993년 1개소만 복원해 놓은 것으로, 城南에 있는 天臨山 봉수대(미 복원)에서 경상도 쪽에서 올라오는 봉화를 용인 寶蓋山으로부터 이어받아 남산으로 연결하였다고 한다.

 

☆숭례문(국보 1호)

외교사절 등이 왕을 만나기 위해 성 안으로 들어갈 때 통과해야 했던 한양도성의 정문으로,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가뭄이 심해질 때는 화(火) 기운이 강해진 것이니 남쪽의 숭례문을 닫고, 북대문인 숙정문을 열었다고 한다. 속칭 남대문으로 불리어지던 숭례문은 2008년 2월 10일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 보상 문제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방화하였는데, 2013. 5. 4. 복구되었다.

이전의 모습과 달라진 점은 양쪽으로 성곽의 일부분을 복원한 점과, 1층 문루 지붕 위의 잡상(雜像·나쁜 기운을 물리치기 위해 기와지붕의 추녀마루 위에 놓는 흙인형)도 ‘잡상은 홀수로 놓는다’는 조선시대 원칙에 따라 8개에서 7개로 줄였으며, 단청작업도 ‘전통기법 복원’ 원칙에 따라 100% 천연안료가 쓰였다는 점이다.

편액(扁額)은 양녕대군의 글씨라는 기록(『東國輿地備攷』,『芝峯類說』)과 申叔舟의 아버지인 申檣의 글씨라는 기록이라는 견해(『阮堂集』제7권)가 두드러진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런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隅進閣지붕: 네 면에 모두 지붕면이 만들어진 형태로 전후면에서 보면 사다리꼴, 측면에서 볼 때에는 삼각형의 형태.

*맞배지붕: 측면에는 지붕면이 없는 형태.

*八作지붕: 우진각지붕 위에 맞배지붕을 올려놓은 것 같은 형태.

 

남대문시장

남대문 부근 시장에 대한 기록은 조선 초기인 태종 14년(1414) 새 도읍지인 서울의 남대문 근처에 가게를 지어 상인들에게 빌려준 것이 시초였다는 것이 있다. 본격적인 시장 형성은 임진왜란 이후(1608년)로 宣惠廳이 세워지면서부터이다.

현재 남대문 시장은 동대문 시장과 함께 서울의 2대 시장 중 하나로, 숭례문을 기점으로 2만 2천여 평 규모의 넓이에 크고 작은 1만 2000여 점포가 들어서 있으며, 하루 50만 명 이상이 찾아오는 종합재래시장이다. 외국인들도 많이 찾아와서 남대문 시장에서 3년 간만 장사를 하게 되면 3개 국어는 저절로 터득된다고 한다. ‘남대문 시장에 가면 없는 것이 없다’는 말이 있다시피 취급품은 건축 자재와 가구류를 제외한 의류·식품·청과·잡화 등 모든 업종이 총망라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제품들은 상인들이 직접 제조·생산하여 판매한다.

동대문시장이 패션, 의상의 시장이라고 한다면 남대문시장은 액세서리, 부자재, 문구류의 시장이라고 할 수가 있으며, 특히 북한 실향민 상인들이 많아서 ‘아바이시장’이라고도 불리는 지하의 ‘도깨비시장’은 수입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없는 것이 없는’ 시장이다.

1번 게이트에서 직진을 하면 신세계백화점이 나오는데, 그 근처에는 저녁이면 리어카 노점상들이 즐비하게 생겨나서 갈치조림, 야채호떡과 같은 먹거리를 판매하는 상점과 60년대를 연상시켜주는 포장마차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기도 하는 곳이라서 한번쯤은 들러볼 만한 곳이다.

 

☆기타: 바뀌어야 할 명칭들

*德壽宮→慶運宮

大漢門→大安門

昌慶苑→昌慶宮

祕苑→昌德宮 後苑

(13.7.2. 원고지 63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