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스크랩] 점차 사라져가는 무잡모퉁이의 추억거리

거북이3 2013. 8. 23. 22:02

점차 사라져가는 무잡모퉁이의 추억거리

                                                                                                                  이 웅 재

 

이열치열하자는 생각으로 오후 세 시쯤 탄천 산책을 나섰다. 마악 ‘무잡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 허전했다.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 아파트 단지에서 야탑천으로 나가는 곳에 하탑초등학교가 있고 그 옆으로 어린이 놀이터, 공중화장실이 있는 거기가 ‘무잡모퉁이’였다. ‘무잡’은 ‘물잡’에서 ‘ㄹ 밑 ㅈ 탈락 현상’이 생긴 말이요, ‘무잡이’의 준말일 것이다. 그러니까 분당 신도시가 건설되기 전에는 이곳이 ‘물을 잡아 놓는 보(湺)’가 있던 곳이라는 말인데, 그 이름이 상당히 정겨웠다. 어린이 놀이터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 놓았었는데 거기에 ‘무잡모퉁이 어린이 놀이터’라는 구절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그 정겹던 ‘무잡모퉁이’라는 말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말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평소에 나는 이 ‘무잡모퉁이’가 좋았다. 이곳에 있는 돌멩이 하나도 허투루 보고 지나치지 않았었다. 평범한 바위 하나도 이리저리 각도를 달리 해서 보아 내 별명인 ‘거북이바위’라는 이름을 붙여놓기도 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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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잡모퉁이’라는 안내판이 사라진 뒤로도 또 한 번 서운함을 느낀 적이 있었다. 화장실 옆, 소나무들 사이에 무성했던 조릿대 숲도 싱그러워 마음에 들었었는데, 갑자기 몽땅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오늘도 그랬다. 얼핏 보아서는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도 무엇인가 뭉텅 떨어져나간 느낌이었다. 그래서 좀더 자세히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가슴 속에서 ‘쿵!’ 하는 소리를 들었다. 없었다. 없어졌다. 이럴 수가? 어린이들의 놀이기구가 되어 주던 벚나무 얕은 가지가 송두리째 베어 없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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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어린이들이 나무 위에 올라가 놀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다칠까봐 그랬을 것이라는 짐작은 갔지만, 이건 해도 너무했다. 구더기가 무서워 장 못 담글 리가 없고, 교통사고 위험이 있다고 자동차를 없앨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요새는 골목마다 다니면서 어린아이들에게 플라스틱 말을 태워주는 일도 사라졌으니, 옛날의 ‘죽마고우(竹馬故友)’의 변형이었던 ‘플라스틱 고우(故友)’마저도 없어진 판국에, 이젠 함께 나뭇가지를 타고 놀던 추억마저 사라져 버리게 된 것이다. 추억은 소중하다. 기억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요, 시간이 지나면 점차 희미해져서 나중에는 사라져 버리기도 하지만, 추억은 가슴에 남는 것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또렷해지며 그리워지는 것인데, 아이들에게서 그렇게 추억을 빼앗아가도 되는 것인가?

그뿐만이 아니다. 어렸을 적 나뭇가지를 타고 놀던 일은 맨손으로 높은 나무에도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을 무의식적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던가? 나는 지금도 개헤엄밖에는 칠 줄을 모른다. 그렇지만 파도가 심하지 않은 바다라면 아무리 깊은 곳이라 할지라도 빠져 죽을 일은 없다. 괌에서의 일이었던가? 호텔 옆쪽에 만들어 놓은 시퍼렇고 깊은 바다가 있었는데, 아무도 수영하는 사람이 없기에 나 혼자서 개헤엄을 치며 즐겼던 일이 있었다. 이 개헤엄도 어렸을 적 한 길이 넘는 집 근처 조그만 강물에서 배운 것이었다. 어렸을 적에는 가끔 참외 서리도 해 보아야 발각되어 붙잡힐까봐 전속력으로 내닫는 달리기도 배울 수가 있다.

참새를 잡으려고 초가집 처마 끝 구멍에 손을 쑤욱 집어넣었다가 선뜩한 구렁이도 만져보아야 하고, 머리칼에 파리를 잡아매고 흔들면서 개구리 잡이도 해 보아야 개구리는 움직이는 살아있는 놈만 먹이로 한다는 것을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잠자리도 잡고 매미도 잡고 물방개도 잡아 보아야 한다. 풍뎅이를 잡아 다리를 떼어버리고 모가지를 비틀어 뒤집어 놓으면 날아가려고 날개를 퍼덕여 근처를 깨끗하고 쓸어버리는 모습도 보아야 자라서 곤충학자나 의사가 되는데 도움이 될 수가 있다. 쇠똥을 헤쳐 쇠똥구리도 잡아보아야 하고 때죽나무 잎이나 여뀌를 짓찌어서 개울물에 풀어 넣고 그 독 때문에 희번덕 배를 드러내 놓고 기절해 떠오르는 물고기도 잡아 보아야 나무나 풀의 성질도 체험으로써 배우게 된다.

조선일보 2013년 8월 22일 자 A26면 ‘움직이는 조각…’을 보면, “철사 가지고 놀던 아이 ‘철사의 王’ 예술가가 되다”라는 기사가 있다. 어렸을 적의 체험은 그렇게 소중한 것인데, 왜 어른들은 그들에게서 자꾸만 추억을 빼앗아 버리려고만 하는가?

                                                                                   (2013.8.22.13매)

출처 : 이음새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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