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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석 교수의 수필을 읽고

거북이3 2014. 7. 6.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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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석 교수의 수필을 읽고

                                                                                                                                                                    이 웅 재

글을 읽으면서 부러워해 보았던 마음

기시감(旣視感:[佛] 데자뷰)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풀이로는 ‘한 번도 경험한 일이 없는 상황이나 장면이 언제, 어디에선가 이미 경험한 것처럼 친숙하게 느껴지는 일’을 가리킨다. 우리의 삶은 대부분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런데도 그것이 과거에 경험해 보았던 일처럼 느껴진다면, 새로운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매사를 순탄하게 헤쳐 나갈 수가 있을 것이다. 녹화되었던 비디오테이프를 다시 틀어보듯 우리가 ‘기시(旣視)’의 세계에 다시 진입하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어떠한 사람도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하여 만족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인생의 수많은 가능성 중의 하나가 실현되었다고 느껴지는 삶, 그래서 우리는 가끔 새로운 가능성의 삶을 동경하곤 한다. ‘기시(旣視)’라는 말이 ‘매우 진부한 것, 보기 싫증난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마 이러한 생각들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말한다.

“나에게 한 번만 더 새로운 일생이 주어진다면, 여태까지 살아왔던 바보 같은 삶을 다시 살지 아니하고, 정말로 내가 원하는 대로 멋진 인생을 살아볼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란 결코 두 번 다시 재생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이제까지 우리의 고정관념이다.

그런데, 우리의 한경석 교수는 이러한 고정관념을 스스로 깨뜨리는 발언을 하고 있다.

“군대생활 3년 동안 너의 일생을 미리 한 번 살아보라는 어떤 신의 계시인 줄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내가 일생동안 75년을 산다고 하고 그것을 25년씩 3등분해서 계산한다면 바로 그것이 내가 겪었던 군대생활 3년의 여정과 너무도 흡사하다는 것이다. 군대생활 초년 1년의 아주 어려웠던 시기는 전반기의 내 인생과 거의 흡사했고, 중년의 1년은 내 인생의 황금기인 중반기의 내 인생과 비슷했으며, 나머지 후반기의 월남에서 복무했던 1년은 내가 동아일보를 퇴직한 후의 삶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군대생활 3년은 내 평생 인생을 정확하게 보여 줬다.”

한 마디로 부럽다. 자신의 삶을 이처럼 객관적으로 재단하고 요령 있게 판단할 수 있는 그 탁월한 능력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그리고 궁금하다. 그는 얼마만큼 기시(旣視)의 세계에 대처하면서 살아왔을까, 얼마나 만족할 수 있는 삶을 다시 살아 보았을까, 정말로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기에는 하나의 큰 맹점이 도사리고 있었다. 군대생활 3년이 자신의 평생 인생을 정확히 보여주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언제인가가 무척 중요한 일이겠는데, 그는 그 시기를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이었다. “나머지 후반기의 월남에서 복무했던 1년은 내가 동아일보를 퇴직한 후의 삶과 비슷하다는 것이다.”라는 말을 유념한다면,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던 시기는 바로 그 ‘동아일보를 퇴직한 후’가 아닐까 하는 판단이다.

아쉽다. 진작 알아서 지난 삶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설계하면서 살아온 삶이었다면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참고 자료를 제공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지금 이 펜 끝(아니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고 있는 내 손가락 끝)에 묻어나고 있는 것이다.

술값을 차고 다니는 우리의 한 교수

세상인심이 마냥 한심하게 돌아가던 1920년대 초엽에 발표한 현진건의 단편소설 「술 권하는 사회」가 지금의 우리 현실과 유사하다고 느껴서 하루도 술 마시기를 빼놓지 않고 계속 마셨다고 하는 한 교수는, 그래서 몸무게가 72kg이 되었다고 엄살을 떨고 있는, 동명의 글 ‘술 권하는 사회’를 보면서 나는 비만도 사회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천번 만번 공감을 하였다.

‘아니 벌써 술시(戌時)잖아?’의 ‘나는 술값을 차고 다닌다’라는 글을 보면 그는 과거에 술값이 없어 화장실엘 가는 척 술집에서 도망을 쳤던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랬던 한 교수가 요즘에는 술값에 대해 아주 느긋하다. 동아일보에서 퇴직할 때 해 준 금반지를 차고 다니기 때문이다. 나는 한 교수와 술을 마시러 갈 때면 그의 손에 끼워진 그 반지가 무사한지를 확인하곤 한다. 그가 다시는 술집에서 도망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하지만, 기실 속내는 나마저도 그의 그 자랑스런(?) 행적을 따라 하지 않기 위해서인 것이라는 점을 독자들은 아마 먼저 알고 있을 것이다. 술값을 차고 다니는 한 교수가 나는 무척 믿음직스럽다. 그 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알뜰살뜰히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가 동아일보에 입사한 첫 날 환영식 술자리에서 그는 박준구 선배를 KO시키고 다른 사람들도 추풍낙엽으로 쓰러뜨려 놓고는 마음껏 으쓱해졌다.

“동아일보 선배들도 별게 아니구먼. 이 정도 마시고 집에 가자고 하니 말이야.”

그러한 우리의 한 교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대로 미리 보아두었던 143번 버스를 타는 데까지는 성공을 했단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곯아떨어진 한 교수, 버스 기사에 의해 깨기는 했는데…그의 고백을 들어 보자.

“요동치는 것은 밑에 있는 길 뿐이 아니었다. 옆에 있는 담장도 웨이브를 치며 나한테 달려왔다. 이쪽 벽이 나한테 달려와 피하면 저쪽 벽에 부딪히고, 또 그쪽 벽을 피하면 이쪽 벽에 부딪히고.

나는 그렇게 해서 겨우 100m밖에 안 되는 길을 30분 넘게 휘청거리며 걸어왔다. 그때 생각으론 마치 그 길이 몇 km나 되는 것 같았다. 그 덕분에 새 신문사에 출근한다고 마누라가 예쁘게 새로 맞춰준 양복은 무릎이 뻥 뚫리고 팔꿈치도 마찬가지였다.”(-술독에 빠진 환영식)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그랬던 그가 요즘에는 술을 좀 멀리하는 듯하다. 세월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술은 사회가 마시게 하고, 세월은 그것을 멀리하게 만드는 가 보다. 그래도 술 마시고 호쾌하게 지낼 때가 좋을 땐데 하는 아쉬움이 밀려든다. ‘김 국장과 용각산’에서 만나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장면 말이다.

음주운전을 하다가 다른 차한테 받히는 바람에 경찰에게 걸렸다. 그 경찰 왈,

“아실만 한 분들이 왜 이래요. 음주운전이에요. 지금부터 2시간을 줄 테니 그 동안 술을 깨고 오세요.”

마음씨 착한(?) 경찰이었다. 우리의 한 교수는 매일 술고래가 되는 김 국장이 늘 용각산을 먹는 것을 생각해냈다. 그래서 용각산을 사서 퍼먹었다. 그리고 2시간 후 파출소엘 찾아가서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가 용각산을 먹고 왔단 말예요. 음주운전 같은 것은 걱정도 안 돼요.”

나는 기계로 가서 입에 댄 뒤 경찰이 ‘좀 더 세게…좀 더 세게…’를 외쳐대자 그대로 따라 있는 힘껏 불어댔다. 그렇게 두 번을 불고 나자 경찰이 기계를 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기자님은 음주운전입니다. 그것도 당장 운전 취소입니다.” (-김 국장과 용각산)

운전 취소, 그건 대부분의 공간 이동을 도보로 해야 하는 것이니, 건강에 아주 좋은 조치가 아닐까 싶어서 나는 그 경찰의 말에 전적으로 찬성이다. 그런가 하면, 술과 얽혀지는 얘기 중에는 때로 가슴 아픈 사연도 있게 마련인데, ‘소주 한 잔의 추억’ 같은 글이 이에 해당한다. 한 교수는 처음 선배 기자의 이해할 수 없는 술 마시는 행태에 대하여 실망을 한다.

“미스 박, 이리로 와. 그 동안 내가 안 와서 삐졌지?”

그러면서 그녀에게 지갑을 꺼내더니 수표 한 장을 주는 게 아닌가.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술값이 없어서 튀김집에 가서 술 한 잔에 튀김 한 입씩만 먹으라던 양반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소주 한 잔의 추억)

그 선배는 술값을 갚고 난 쥐꼬리만 한 월급을 아내에게 가져다주고 아내의 바가지에 욱 하는 심정으로 아파트 5층에서 그 돈을 밑으로 휙 집어던졌단다. “돈은 하늘하늘 날려 밑에 있는 땅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 돈을 가지러 가는 사람은 둘 중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아침 이 되어 어젯밤 일이 생각난 그가 정신없이 밖으로 나가 봤을 때, 그곳엔 돈이 하나도 없었더란다. 그랬던 그가 30대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요절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글은 읽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알싸하게 만들어준다.

동아닷컴의 J사장에 대한 일화도 읽을거리의 하나라 여겨진다. 태평로의 대복 집에 가서 부원들과 함께 술을 마셨던 적이 있는데, 오줌 맥주로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한 뒤 J사장은 부원들과 헤어진 뒤 집으로 향했단다. 중간의 과정은 생략한다. 그는 안방으로 들어가서 아무렇게나 옷을 벗어 놓은 뒤 잠에 곯아 떨어졌단다.

황당한 건 그 집 주인이었다. 낯선 남자가 집으로 들어와 옷을 벗어 놓고 잠을 자니 안 그렇겠는가. 집주인은 결혼을 해서 얼마 되지 않은 신혼부부였다고 했다.…

그가 아침 목욕을 끝내고 회사로 돌아오자 경비실에서 전화가 와서 손님이 찾아왔다고 전한다. 누가 이아침 시간에 나를 찾아올까 하고 경비실로 내려간 그는 조금 전에 봤던 그 집 주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무조건 빌었다.

“죄송합니다. 어제 밤에는 술이 너무 과해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연거푸 머리를 숙이며 사죄했다.

그 집 주인은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남의 집에 와서 잠을 자 놓고 아침에 그렇게 몰래 도망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리고 사람이 잠을 잤으면 숙박비라도 내고 가야지, 가방까지 놓고 가서 이렇게 주인에게 가져오도록 해도 되는 겁니까?”(-오줌 맥주)

‘운구조(運柩組)’는 또 어떤가?

큰 키에 비실대는 그의 모습은 마치 살아있는 주검같이 보였다. 서슬이 시퍼렇던 국장의 위엄도, 술이 엄청 세던 50대의 기개도 보이지 않았다.…

여섯 사람이 국장의 양쪽 팔 다리와 몸통을 들고 장송곡을 하며 운구하기 시작했다.

“어히 어하. 어허이 어하아~~~~~.”

우리의 갑작스런 운구에 국장은 위에서 들려가며 “허 허” 웃고만 있었다.…나는 국장을 그렇게 골려준 데 대해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운구조)

그러나 그것은 이 이야기의 전개 부분일 뿐이다. 그 결말 부분을 보자.

“아저씨 어디서 좀 쉬었다 갑시다. 쉬가 마려워 못 가겠어요.”

그 운전사는 고속도로 옆에 차를 세우고 볼 일을 보게 했다. 고속도로는 높게 있어 길 밑으로 떨어지면 다칠 것 같았다.…그때 이 국장이 내 뒤로 살금살금 왔다. 그리고 오줌을 누고 있는 나를 뒤에서 힘껏 밀어 밑으로 떨어뜨리는 게 아닌가. 급경사로 된 그 둑길을 나는 허겁지겁 뛰어 달려 내려가고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국장이 소리 지르는 말을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

“한경석 네 이놈. 이제 니가 당했제? 으뜨냐! 내를 데러 가며 장송곡을 불러? 아하하.”(-운구조)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고 했던가? 그러나 그런 성격의 말로 받는 일은 하냥 즐겁지 아니한가? 겉으로는 아웅다웅하는 것 같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건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끼리는 있을 수 없는 일로 느껴지는 것이다. 술이란 그렇게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 따뜻한 정이 흐르게 만들어 주는 전도체인 모양이다.

그것이 친구 사이이면 더욱 그렇다. 이제 한 교수의 소꿉동무 오기수라는 사람을 찾아가 보자. 그 친구는 과로에다 농약 중독으로 겨우 지천명(知天命)을 넘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 친구를 두고 한 교수는 마음 아파한다.

왜 내가 그 친구한데 ‘서울에 가서 술이나 실컷 먹어보세’라는 말조차 한번 못해 봤느냐는 것이다.…그냥 종로거리의 피맛골 선술집부터 시작해 강남의 호화 술집까지 주욱 돌며 거나하게 술에 취해볼 걸…, 하는 마음이다. 지나가다 길거리에서 함께 오줌이라도 한 번 갈겨보고, 아무 곳에서나 둘이 껴안고 잠도 자 봤으면 좋았을 걸. 지금 그는 망인이 되어 이미 이 세상에 없거늘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친구와 우정)

그게 친구다. 뭐 특별한 사연이라도 서로 얽혀 있어야 한다든가, 2001년에 개봉된 곽경택이 감독하고 유오성, 장동건이 출연한 영화와 같은 갈등이 존재하여야지만 친구인 것은 아니다. 최근 언론에 다시 그 이름이 등장하게 된 IQ 200 왕년의 천재소년 김웅용 씨는 말한다. 어릴 땐 늘 혼자라 고립돼 있었고 밖에 나가 놀지도 못하고 힘들었다고. 오죽하면 충북대에 다닐 때에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아 동문회가 없어서 재충북대 원주고 동문회에 교가도 부르고 당시 선생님들 이름과 별명도 외워서 선배들 테스트를 받아 합격했겠느냐는 것이었다. 열심히 활동했더니 후배들은 자신을 진짜 동문인 줄 알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말한다.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 해요. 그리고 친구가 많아야 하죠. 그게 행복하게 사는 거죠.”라고.(2014.1.18. 조선일보 A31면 People & Story 참조.)

‘아니 벌써 술시(戌時)잖아?’에 나오는 글들은 한 마디로 재미가 있었다.

開川面 龍出里 사람이 아니라는 한 교수

‘그때는 좋았지’에는 주로 그의 사적인 생활 반경에서 일어난 일들이 소개된다. 그 중 제일 처음의 작품 ‘나는 별이 없는 하늘 아래에 산다’는 글에서 한 교수는 말한다. “까만 하늘에서 별빛을 찾는다. 별빛 속에서 내일을 찾는다.” 그는 공해로 인하여 까매진 하늘에서 열심히 별빛을 찾고, 그 별빛을 바라보며 내일을 설계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그의 사적 생활 반경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초등학교 시절 대전으로 유학을 나와서 대전중학교의 입학시험에 합격을 한 그는 스스로를 ‘개천에서 용 났다’고 했다.

그 후 대전고등학교에 낙방하고 후기 고등학교를 가고 싶지 않은 학교였던 보문고등학교로 갔을 때 그는 開川面 龍出里 출신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학교에서 그는 영자지인 English Weekly 신문배달을 했다. 그것이 그가 처음으로 신문사와 인연을 맺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고 하였으니, 그 때의 일도 분명 개천에서 용 나는 데에 일조는 했다고 보인다. 그리고 그는 군대에 있을 때도 開川面 龍出里 출신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다시 개천에서 용 났다고 하는 때는 군대에서 제대를 한 다음 대학교 2학년 때 슈퍼마켓을 하고, 결혼을 했으며, 3학년 때 대지 18평에 건평 15평, 그리고 방 3개를 갖고 있는 집을 샀을 때이다. 그 다음 조선일보에 들어갔고, 그 후 동아일보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와서 수많은 사연을 남긴 채 동아일보로 갔을 때, 그는 다시 ‘나는 開川面 龍出里 출신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후, 대학원 석사과정을 거쳐 박사과정을 졸업하고 IMF로 동아일보에서 사원들을 퇴직시키고 있을 때, 대학으로 가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싶어서 동료 60여 명과 함께 동아일보를 나온 일을 두고 그는 다시 ‘나는 그때 開川面 龍出里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 후, 겸임교수가 되기는 했지만, 뇌졸중을 비롯하여 1년에 죽을 고비를 6번 넘기는 사고 등을 겪게 된 일들은 아무리 문인화 초대 작가, 대한민국 미술대전 입선, 서예 초대작가가 되고 국가 유공자가 되었지만, ‘나는 開川面 龍出里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소망했던 삶을 아무런 불만 없이 오롯하게 산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 정도의 다양한 삶을 살았던 그는, 우리들이 보기에는 분명 開川面 龍出里 사람으로 보이는데 말이다. 그만큼 그의 포부는 원대했었다고 하겠다.

100개의 질문서를 풀게 하여 맞이한 아내 등 가족에 대한 무한한 사랑

사적인 공간에서는 자연적으로 가족들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제목에서부터 가족들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등장시킨 예로는 ‘할머니의 사랑’, ‘어머니’, ‘가시고기’,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되나요’ 등이 있다. 물론 이런 작품들 이외에도 곳곳에서 아내라든가 형님 등 가족들이 거론된다. 이들 작품을 읽어 보면 우리의 한 교수는 무척이나 가족들을 챙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할머니의 사랑’을 보면, 할머니는 한 교수가 태어난 지 8개월쯤밖에 되지 않아서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다른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부터 매일 저녁 냉수로 목욕을 하시면서, “우리 손자 공부 좀 잘하게 해주시오.”라고 빌었다든가 뒷동산 작은 옹달샘 뒤 계곡에 있는 ‘진석이 바위’가 둘째 형님을 두고 빌기 위해 할머니께서 명명한 이름이라는 얘기들은 셋째 손자인 한 교수에게 자신도 할머니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으리란 생각을 가지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그러한 할머니의 사랑마저도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가족을 중시하는 사람인지를 잘 드러내 주는 일이라고 하겠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보다 더 절실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나이 43살 때 낳은 아들이라는 말에서 다른 어떤 표현보다도 더욱 애지중지 키우시느라 정성을 다했을 어머니를 느끼도록 하여 주고 있었다. 그 어머니는 1998년 음력 1월 대보름날 세상과 하직하였다고 했다. 평소 입버릇처럼, “나는 정월 대보름날 저 세상으로 갈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그날은 더구나 흰 눈마저 소복하게 내려 온 세상을 덮은 날이었다고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대전으로 유학을 떠난 한 교수는 어머니의 살가운 사랑의 손길을 직접적으로 대하면서 지내지를 못하였던 모양이다. 막내인 그는 그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한 번 모셔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서울로 모셔왔다고 한다. 어머니는 몸이 불편해 누워 계셨지만 마음은 한없이 평온하셨던 모양인데, 그렇게 한 달쯤 지난, 눈이 소복하게 내리던 대보름날 세상을 하직하셨다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에 대한 생각은 “어머님은 세상에서 가장 맵시 있고 영특한 분이셨습니다.”라는 말 한 마디에 잘 휘갑이 되어 있다고 보인다.

이제 ‘가시고기’를 통해서 한 교수의 아버지를 만나볼 차례다. 돌아가신 지 20년이 넘은 아버지를 한 교수는 ‘풍류를 아는 어른이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측면에서 한 교수는 아버지의 DNA를 고스란히 물려받지 않았나 싶다. “나는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올 때면 가끔은 노래를 흥얼거리고 온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버님의 전매특허이지 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라는 표현이 이를 증거한다. 아버지를 가시고기에 비유한 다음의 표현을 보자.

아비의 목숨이 끊어지면, 새끼들은 아비의 몸을 뜯어먹고 기운을 차려 다시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얻는 것이다. 이렇게 숭고한 아비의 사랑이 있을까?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가시고기와 같은 분이셨다.(-가시고기)

다음은 아내에 대한 그의 말을 들어볼 차례다. ‘개천에서 용 났다’를 보면 그가 결혼을 하게 된 내막이 드러나 있는데,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당시 그는 친구들하고 함께 가게를 하였었는데, 그 친구들이 저녁이면 술판을 벌이는 바람에 안 되겠다 싶어서 그들을 떼어 버리고 결혼을 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때 알고 있던 여인은 딱 한 사람. 그는 그녀를 놓고 100가지 질문서를 작성했다. 그것을 채점해 평균 50점 이상이 되면 결혼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그때 질문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뒷날 생각해 보아도 놀랄만하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동고동락을 했던 아내에 대한 그의 믿음은 대단했다. 더구나 유아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들 승수의 뒷바라지에 헌신하는 아내였던 것이다.

그가 움직이면 엄마가 같이 따라 다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애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면 내릴 줄을 모른다. 가는 대로 그냥 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버스가 서면 내려서 아무 곳이나 간다. 목적도 방향도 없이 그냥 걷는 것이다. 그러다 다리가 아프면 쉬고, 배가 고프면 아무 곳이나 가서 무엇이든 집어 먹는 것이다.(-한 많은 고뇌의 덫 승수)

아내가 늘 그렇게 따라다녀야 했던 아들 승수에 대한 한 교수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그는 그 아들을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한 천사’라고 말한다.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은 늘 그렇게 대우받는 것이다. 100가지의 질문서를 제시하고 결혼을 할 정도로 치밀하고 철저하고 꼼꼼했던 한 교수도 한 가정에서는 믿음직한 남편이요, 자애로운 아버지였던 것이다.

나는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한 천사라고 생각도 해 보았다. 그는 맞을 줄만 알고 자기를 때린 사람을 때릴 줄을 모른다. 보복을 모르는 아이. 그리고 배가 고프면 아무데서나 먹고, 잠이 오면 아무데서나 자고, 갈 곳도 없이 아무 곳이나 가고 이것이 우리에게 보내준 천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한 많은 고뇌의 덫 승수)

딸을 두고는 한 교수는 ‘우리의 공주’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로 무척이나 애지중지하였다. 그는 첫딸의 이름을 ‘은하’라고 이름까지 미리 지어 놓았었다. 1974년 3월 29일의 일기를 훔쳐보자.

우리의 공주는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여기는 아빠를 닮고 저기는 엄마를 닮았다고 아기의 몸과 얼굴을 점치시기에 분주하십니다. 예쁜 곳이 많습니다. 사랑스럽습니다.

우리 과에서는 단연 top뉴스. 같은 과 학생들이 소감을 이야기하라기에 “사윗감 구합니다. 어서 빨리 내 앞에 선착순으로 집합하시오.”라고 익살을 피웠습니다.…현재의 기분은 그냥 애드벌룬입니다.…

엄마, 아빠스런 연습을 부지런히 해야겠습니다. 가끔 큰 기침도 합니다. 사랑을 해야지요. 가장 값진 사랑을 아내와 아기에게.(-차 한 잔의 사색)

그 이튿날에는 또 누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딸을 낳은 것을 자랑하기도 하는데, 그 누나에 대한 정도 살갑기 그지없다.

그래야 누나가 할머니가 되고 내가 할아버지가 되는 날 고향인 군서에 가서 밤도 줍고, 화롯불에 그것을 구워 먹고, 엿도 만들어 먹고, 추수하는 날 화톳불에 튀밥도 만들어 먹고 하지. 그러다가 나는 옛날 생각이 나 누나를 시집가라고 놀려주고, 누나는 부지깽이를 들고 날 쫓아오기도 하지.(-차 한 잔의 사색)

청양군 교육장으로 정년퇴임하신 큰형님과는 나이 차이가 좀 많아서인지 다른 식구들처럼 세세한 감정의 표현은 별로 없다. 그러나 작은형님과는 대전 유학시절 함께 생활도 하면서 지내서 그런지 매우 믿고 의지했던 것 같다.

형님은 무척 자상한 분이셨다. 학교에 갔다가 일찍 오셔서 나를 위해 밥을 지어놓으시고 나를 기다리셨다. 그리고 잘 때면 나를 팔베개 해 주시고 꼭 끌어안고 주무시곤 했다. 형님은 그때 나의 아버지셨고 어머니셨다. 나는 작은형님의 보호 아래 나름대로 공부를 열심히 하며 무럭무럭 자랄 수 있었다. 덕분에 그 험악하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나는 곧게 자랄 수 있었다. (-국민학교 시절)

너무나도 조숙했던 젊은 시절

우리의 한 교수는 대학교 2학년 때 벌써 인생을 다 살아본 듯하다. 남들은 공부만 하기에도 바빴던 그 시절, 생의 가장 귀중한 경험을 모두 겪고 있었다. 어떻게 그러한 일인다역을 감당해 내었는지 놀랍기만 하다. 그만큼 그는 조숙하였고, 매사에 철저하고 강인한 의지의 인물이었다.

나는 그때 흔히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인생 중, 다섯 가지 인생을 살았다. 그것은 내가 다시 살아도 경험해 보기 힘든 그런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내 일생의 황금기를 그때 보냈던 것이다.

우선 나는 대학생이었다.

둘째, 나는 가게주인이었다.

셋째, 나는 과외 선생이었다.

넷째, 나는 가장이었다.

다섯째, 나는 한국DM광고기획사의 사장이었다.(-차 한 잔의 사색)

그가 가게 주인을 하게 되었을 때의 모습을 한번 살펴보자. 어떠한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헤쳐 나가는 그의 저력에 한번 부딪쳐 보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이처럼 온몸으로 살아가는 그를 외면하지는 못하였음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은 아니었을까? 그의 용기가 부럽다. 더러는 요사이 나약하기 짝이 없는 젊은이들을 볼 수가 있는데, 한 교수의 이러한 불굴의 정신을 배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좀 길게 인용한다.

등록금을 먼저 내고 가게를 차릴 돈을 계산하니 50만 원이 남았다. 그런데 가게를 빌리는 데 그 50만 원이 다 들어갔다. 그러니 물건을 살 돈이 없었다. 그 집에 있는 물건을 계산하니 무려 30만 원어치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돈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친구의 할아버지에게 달려갔다.… 할아버지는 이북사람이셨는데 이남으로 내려와 함경도 말씨를 쓰며 한약방을 하시는 분이셨다.…

나는 또 사촌형님 집에 가서 형수님께 돈을 좀 빌려달라고 했다. 형수님은 그때 돈을 좀 가지고 계셨는데 그 집에는 사촌들이 많이 와 친척들을 돕는 데는 좀 이상하게 야박하셨다. 나는 그런 분에게 가서 돈을 좀 빌려 달라고 했다. 그것도 신용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 형수께서 내게 10만 원을 선뜻 내주시는 게 아닌가.…

나는 또 친구 고모에게 가서 10만 원을 빌렸다. 이렇게 해서 30만 원을 모두 빌려 물건을 인수하고 우리는 드디어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차 한 잔의 사색)

그렇게 하여 차린 가게를 그는 어떻게 운영해 나갔을까가 궁금하여, 슬쩍 엿보았더니 스스로 전력투구하면서 끈기 있게 노력하고 있는 그의 뚝심을 대하게 되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가게에서 팔 과일을 힘들게 용산까지 자전거를 가지고 떼어오곤 하는 고생을 감수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안쓰럽기가 그지없는데, 조금이라도 거리를 단축시키기 위하여 자전거 통행금지 구역을 지나가는 그에게 경찰은 인정사정없이 대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2번에서 3번은 용산에 가서 과일을 떼어 와야 한다. 용산은 그냥 가면 그리 먼 길이 아닌데 자전거를 타고 과일을 떼어 오는 길은 왜 그렇게 멀던지.…

한참을 가는데 저만치서 경찰이 내게 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런데 그 손짓은 누구를 오라고 손짓하는 게 아니라 검지손가락을 하늘 쪽으로 향해 까닥까닥하는 게 아닌가. 나는 좀 심사가 사나웠지만 그곳으로 갔다.…

그 순경이,

“아 임마, 너 여기 자전거 못 다니는걸 알아 몰라?”…

“너 지금 왔던 길로 되돌아가. 그래서 저쪽 뒷길로 지나가란 말이야.”

라고 하며 나를 온 길로 다시 돌려보냈다. 나는 되돌아가며,

“그래 내가 동아일보 기자만 돼봐라. 너는 그때 죽었다.”(-차 한 잔의 사색)

그는 이때 벌써 동아일보 기자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후에 그 꿈을 이루고야 말았다. 아낌없이 박수를 쳐주고 싶은 대목이다. 그리고 이건 여담이지만…, “그래 내가 동아일보 기자만 돼봐라. 너는 그때 죽었다.”던 다짐의 실천은 어쨌는지가 궁금하다. 내 기억으로는 그런 일 때문에 죽었다는 경찰이 있다는 신문이나 라디오, TV 기사는 본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풍문으로도 들은 바가 없었다. 어쩌면 그가 하고자 했던 일 중에서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일은 이뿐이 아닌가도 싶다.

단풍도 예쁘게 볼 줄 모르는 당당한 국가유공자

한 교수는 가을에 여행 가는 것을 싫어한다. 단풍이 전혀 예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미술시간에 그린 그림에서 초록색의 나무를 모두 빨간 색으로 칠했었나 보았다. 그래서 알게 된 적록색맹, 때문에 의대를 가고 싶어 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문과를 택해야 했던 사정, 심지어는 신부와 결혼이야기가 나와 거의 성사됐을 무렵에도 신부에게 가족 중에 색맹이 있느냐고 신부한테 물어 보아야만 했던 아픈 기억이 그의 삶의 어느 한 부분을 강제로 결정짓고 있었다.

어느 날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치는데 어느 여인의 옷이 내 마음에 들어오는 게 아닌가. 그것은 보라색으로 된 코트였다. 그 옷을 입은 여인이 나는 선녀처럼 예쁘게 보였다. 그래서 집에 오자마자 큰딸한테 “너 결혼식할 때 보라색으로 된 옷을 입어라. 내가 사줄 테니까”라고 말을 하였다. 그러나 보라색 옷은 사주지 못했다. 그런 색의 옷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 옷이 진짜 보라색이었는지, 아니면 푸른색이었는지 잘 모른다.(-단풍이 예쁘지 않은 사나이)

색맹은 장애인으로 분류되지도 않는다. 개인의 삶의 아주 중요한 부분을 강제로 결정지어주고 있으면서도 장애인으로서의 혜택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 교수는 퇴직 후

서예와 문인화를 배워 한국미술협회의 대한민국 미술대전에 입선을 하기도 하고, 문인화와 서예의 초대작가가 되기도 했지만, 색깔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담묵으로만 그리는 사군자에서만 활동을 한다. 어쩌면 색맹이 보는 세계는 일반인이 보는 세계와는 또 다른 나름대로의 미적 감각을 향수할 수 있는 세계는 아닐까? 그는 색맹으로서가 아니라 월남 파병 시 적의 포탄을 맞았던 일로 인하여 당당한 국가 유공자가 되었다. 그것도 한참이나 오랜 시간이 지난 동아일보 기자로 있을 때 친구 병원에 갔다가 ‘하얗게 잃어버린 것을 그 병원 X-레이 기사가 찾아내어서’ 말이다.

첫사랑 월선이?

한 교수의 글 중에는 황순원의 ‘소나기’와 동명의 작품이 있다. 느낌도 비슷하다. 아마도 그 ‘소나기’에 등장하는 월선이는 그의 첫사랑이 아닐까 싶기도 하여 여기 소개한다.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오월의 어느 날, 1학년 때였던 것 같다고 했다. 무슨 일 때문이었던지 고향인 충북 옥천 군서 마을로 가는 곤룡재를 넘기 위해서, 소꿉동무 월선이와 같이 산길로 접어들었단다. 그 당시의 곤룡재는 오르기가 지루하고 힘든 고개였다. 6·25 때 보도연맹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천여 명이나 죽여서 파묻었다는 끔찍한 곳이라 가끔 인골이 발견되기도 해서 맑은 날에도 이곳을 지나치려면 섬뜩섬뜩한 곳이었단다.

그런 곳에 월선이와 나, 두 사람 뿐이었다.

곤룡재 중턱에도 이르지 않았는데 빗줄기는 점점 굵어져서 우리의 옷을 흠뻑 적셨다.…

나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그녀의 자그마한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녀가 사시나무 떨듯 오글오글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그녀를 꼬옥 껴안았다. 마치 모든 추위를 내가 책임지려는 듯이. 그녀의 새근새근하는 숨소리가 가슴팍으로 들려왔다. 우리는 한참 또 그렇게 있었다. 빗속에서 이 세상이 아주 멈춰주길 바라기라도 했을까…….

나는 그녀에게 왜 머리핀을 빼서 쥐었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거, 구리 핀 말이야? 만약 벼락이 치면 우리 둘이 다 죽을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나 혼자만…….”

그때 나는 머리카락이 쭈뼛하는 진한 감동을 받았다. (-소나기)

우리 한 교수, 여자 문제에 있어서만은 이처럼 플라토닉했다. 어쩌면 그것은 그의 삶을 올곧게 살아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한눈팔지 않고 철저한 계획으로 살아온 일생은 그러한 삶의 자세에 대한 전리품은 아닐는지?

자고로 ‘주색(酒色)’이라고 했는데, 그는 술에 대해서만은 누구 못지않은 애주(愛酒)의 면모를 보이면서도 색(色)에 대해서는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긴 100가지의 질문서를 제시하고 결혼을 할 정도의 깐깐함을 보였던 점을 상기한다면 어쩌면 그것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당연했던 일이 아닐까도 싶다.

좀더 많은 기행문을 기대한다

‘그때는 좋았지’에 들어 있는 그의 작품들 중에는 기행문이 3편 정도가 있다. 그것은 기실 예상보다는 훨씬 적은 숫자의 글이라 할 수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정지용은 지금도 살아 있다’는 제목의 글이다. 그의 글을 따라 한번 정지용의 생가를 찾아가 보자.

정지(부엌)와 아랫방과 윗방이 있는 본채가 하나 있고, 농기계가 한두 개 있는 바깥채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이곳이 민족의 시인 정지용이 태어난 충북 옥천의 생가다.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사립짝이 보인다. 나는 그 곳에 와 있다. 아주 자그마한 그의 집 옆에는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졸졸졸 자그마한 실개천이 지금도 옛이야기가 지줄대듯이 흘러간다.(-정지용은 지금도 살아 있다)

설명과 묘사가 적절하게 배합되어 있는 글이다. 담담하면서도 상큼한 느낌을 가져다주는 범상치 않은 표현이다. ‘지줄대듯이’와 같은 정지용 식의 어투를 사용함으로써 저절로 정지용에게로 한 발 다가가게 만들어 주는 절묘한 어투를 구사하고 있다. 억지로 떠다밀지 않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정지용의 체취를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범상치 않은 조사법이다.

이어지는 대목 역시 우리를 자연스럽게 정지용이 앉아있는 자리로 이끌어가고 있다. 앞으로 우리들에게 보다 많은 기행문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만들어 주는 소이이다.

감정이 배제된 것은 고도의 절제가 아니라, 차라리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시대를 향한 짜증스런 반응이었다. 바다, 산, 신앙, 고향 따위는 그의 한 모습이고, 정지용 문학의 큰 흐름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그의 생가 윗방에는 흐릿한 등잔불 밑에서 고민하고 있는 정지용 시인이 앉아 있다.(-정지용은 지금도 살아 있다)

다른 두 작품은 ‘육영수 여사의 생가를 다녀와서’와 ‘여인의 한이 서린 사릉(思陵)’이다. 세 작품의 공통점을 찾아본다면 그가 찾아본 곳은 특정 인물과 관련된 곳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 관련된 인물에 대한 사건 서사나 설명이 묘사보다 두드러지는 점이 느껴진다. 기행문에 서사, 설명이 없을 수는 없지만 묘사나 감상이 두드러지지 않으면 읽는 사람들로부터 감흥을 불러일으키기가 쉽지 않다. 기행문은 문학의 반열에 자리 잡게 해 주는 요소가 바로 그 묘사와 감상 곧 서정이다. 설사 역사적 인물의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 인물에 대한 서사나 설명보다는 그 인물 또는 그 장소에 대한 감칠맛 나는 묘사나 글쓴이가 느끼고 있는 감상이 남다르고 참신해야 읽고 싶은 기행문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는 특정 인물과 관련되는 장소에의 기행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정감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장소에 대한 기행문을 좀더 많이 써 주기를 바란다.

삶과 죽음에 대하여

한 교수의 글을 읽어 보면 그는 상당 부분 계획된 삶을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삶을 살아온 사람은 ‘삶’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것은 우리들에게 상당히 관심거리로 다가온다. 그의 고백을 한번 들어보자.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열심히 살았나, 남겨진 일은 없을까, 또 내가 할 일은 없을까’ 등 자신의 과거를 뒤돌아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만족하게 살지 못한 인생, 그저 회한만이 몰려온다. 좀 더 남에게 베풀 걸, 나 자신을 위해 열심히 살 걸….(-죽음에 관한 단상)

이 글을 보면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지나온 삶을 만족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젊어서부터 철저하게 계획된 삶을 살았고, 군대생활의 마지막 3년차의 생활은 퇴직 후의 삶과 맞먹는다는 나름대로의 진단마저 내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그러한 진단이 최근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더라도, 최소한도 퇴직 후의 생활에 대해서만은 그러한 진단 이후의 삶을 살아왔을 것으로 여겨지기에, 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은 어떠한 것일까가 매우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이미 전 생애에 대한 조망을 하고 있는 그인 까닭에 삶과 죽음에 대한 관념도 상당히 객관적으로 정립해 놓았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다. “아무리 생각해도 만족하게 살지 못한 인생, 그저 회한만이 몰려온다”는 그의 고백은 우리의 예상을 저만큼이나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라는 다음의 글은 우리들 자신이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 모두가 죽는다. 천석꾼이고 만석꾼이고 다 그렇다. 한번 왔다가 한 인생을 살고 가는 우리네 인생들. 누가 부자고 누가 가난한 것인가. 또 누가 행복하고 누가 불행한 것인가. 스티브 호킹 박사의 말이 떠오른다. “인간은 죽으면 모두가 그만이에요. 영혼이 있어 행복한 천국, 또는 지독한 고문을 받는 지옥에 간다구요? 영혼은 없는 거예요. 이 세상을 마치면 진짜 끝나는 것이라구요.” (-육영수 여사의 생가를 다녀와서)

스티브 호킹 박사의 말은 ‘죽음에 관한 단상’에서도 거듭 나오고 있다. 그것은 박사의 말에 동의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것이 의외라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좀더 구체적으로 밝힌 것은 다음과 같은 표현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얼마나 손쉬운 일인가. 숨을 쉬다가 쉬지 않는 것, 이것이 죽음이다. 나는 10여 년 전 장인 어른이 내 품에 안겨 돌아가실 때를 기억한다. 신문사에서 하던 일을 급히 끝내고 입원해 계시던 병원을 찾았을 땐 밤 12시쯤이었다. 그때까지 가는 숨을 몰아쉬면서 나를 기다리셨던 장인어른은 내가 도착해 몸을 안아드리며, “모든 미련을 버리시옵소서. 여기 세상사는 우리가 맡겠습니다”라고 마음속으로 말하자 곧 이어 숨을 거두시고 말았던 것이다. 그때 장인이 내게 준 죽음이라는 것은 ‘숨을 쉬다가 멈추면 죽는 것’이라는 바로 그것이었다. (-죽음에 관한 단상)

허무하다. 죽음이라는 놈이 원래 허무한 놈이기는 하지만, 한 교수의 말을 들어보니 정말로 허무하게 다가온다는 말이다. ‘숨을 쉬다가 멈추면 죽는 것’이 죽음이라는 말, 어디 하나 틀린 데가 없다. 그런데 그 말이 너무나 허망하다. 우리의 일상에서는 얼마나 많은 ‘숨을 멈출 수 있는 상황’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인가?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무래도 우리 인간의 의지로서는 불가능해 보이기에 더욱 허탈하다. 이제 우리는 그가 말하는 ‘아름답게 죽는 지혜’나 배워야 할까 보다.

나는 중풍도 앓았고, 심혈관 질환도 앓았으니 이제 어쩌면 좋은가. 옛날 같으면 벌써 죽은 사람이 아닌가. 이제 유서나 차근차근 써놓고 계로록(戒老錄)이나 하나하나 읊조리면서 노추(老醜)나 하지 말게 해달라고 빌어나 볼까.

일본에서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에 나오는 70을 백년으로 늘려 잡고 종래의 나이에 0.7을 곱하는 것이 현대인의 수명 계산법이라고 한다. 70세가 40대 후반의 청년으로 치부되는 것이다.

문제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슬기와 의지이다. 수많은 계로(戒老)의 변과 경구가 우리 주변에 범람하고 있다. 오랜 세월 속에 이어온 풍상 앞에 인간은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변하지만 우리 몸속엔 풍부한 시간과 빛과 생명의 우주가 녹아있다. 그래서 아름답게 죽는 지혜가 필요하다.(-당신은 아직도 살아있나요?)

다양성의 완성은 강아지에서

‘강아지’는 어찌 보면 좀 생뚱맞은 작품이다. 한 교수가 강아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강아지는 1인칭 시점이라는 얘기다. 강아지에게까지 ‘나’의 자리를 내어준 그는 바로 개의 입장에서 우리 인간을 희화화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할 일이 없으면 베란다에 가서 아파트 밑을 내려다봅니다. 벌써 봄은 봄인가 봅니다. 저 밑 산책로에는 나와 거의 크기가 같은 개 대여섯 마리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야단입니다. 난 그 애들을 보며 “왜 재들이 저렇게 뛰고 야단들이지?”라고 생각합니다. 개쯤 됐으면 나처럼 이렇게 점잖게 있어야지 저렇게 철없이 구니까 ‘개처럼 군다느니, 개만도 못하다느니’라는 소리를 사람들에게 듣는 게 아니겠습니까.…(-강아지)

슬쩍 눙치는 솜씨가 압권이다. “저렇게 철없이 구니까 ‘개처럼 군다느니, 개만도 못하다느니’라는 소리를 사람들에게 듣는 게 아니겠습니까.” 시침 뚝 따고 하는 이러한 표현이야말로 이 작품의 매력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밖에 나가 있는 아빠가 그립습니다. 얼른 들어오셔서 나를 데리고 산에나 가줬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옛날보다 말의 권위는 떨어지셔서 가족들이 듣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이럴 때 보면 아빠가 참 불쌍할 때가 많습니다. 저도 늙으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요?(-강아지)

강아지의 말 치고는 뼈가 있는 말이라고 하겠다. 한 가정의 가장을 보고 ‘불쌍한 때가 많습니다’라고 연민의 눈길까지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모자라서 ‘저도 늙으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요?’라고 말하고 있다. 그 순간 이 강아지는 인간과, 아빠와 동격으로 승격을 하고 있다.

이 글을 보면서 생각나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아내가 치부하는 가족 구성원의 우선순위가 그것이다. 1순위는 손자, 2순위는 며느리, 3순위에 아들, 4순위 강아지, 5순위 가사도우미, 남편은 그 다음의 6순위라는 것.

‘그때는 좋았지’에 나오는 글들에서는 이처럼 무엇보다도 다양성을 느낄 수가 있었다. 여러 개의 글들에서 다양성을 느낄 수가 있었다는 것은 그 글 하나하나가 모두 개성적이고 참신했다는 말과 동의어가 되는 것이다. ‘강아지’는 그러한 다양성의 완성을 느끼게 만들어 주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사람의 속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글들

이제는 이 수필집 속에서는 비교적 사회적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는 ‘데스크의 눈’ 속 작품들을 일별해 보자. 데스크란 신문사나 잡지사에서 취재의 지시 및 기사의 내용을 검토하는가 하면 기사에 제목을 붙이는 등의 편집업무를 총괄하는 곳이다. 그러니까 여기에 들어있는 글들에는 가치 판단을 위한 객관적 입장이나 비판적 안목이 반영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의외로 ‘국민학교 시절’, ‘나의 군대생활’, ‘가장 편했던 서무계 시절’, ‘나의 결혼 이야기’ 등과 같은 사적인 영역의 글, 말하자면 다분히 주관적 감정이 개입될 수 있는 글들도 많이 포함이 되어 있다. 어쩌면 그와 같은 사적 영역의 내용도 나름대로 객관화시켜서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이미 ‘그때는 좋았지’라는 글들 중에서 그의 사생활의 대부분을 보아 왔기에 글의 길이를 위해서도 가급적 그런 내용의 글들은 제외하고 보기로 한다.

먼저 일제의 강제징용과 관련된 데스크의 눈을 보자. 17세 때 평양의 한 이발소에서 조수로 일하고 있다가 월급도 많이 주고 공부도 시켜 준다는 일본기업의 거짓말에 속아 오사카 일본제철소로 갔던 여운택 옹(89)이 당했던 일을 소개하면서 일본의 피해 배상이 있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그는 뜨거운 용광로 앞에서 하루 10시간씩 일을 했지만, 하루치 식사를 3일 동안 나눠 먹게 해 늘 굶주렸다. 일본인들은 야구방망이 크기의 정신봉으로 수없이 때리기도 했다.

일본인은 매달 담배 2갑 살돈만 용돈으로 줬다. 기숙사 벽에 한국인 이름과 적금 명세표를 그려 놓고 ‘나중에 한꺼번에 찾아갈 수 있다.’고 속였다. (-강제징용, 日기업 배상의무 있다)

독일은 이미 2007년 강제노역자 167만 명에게 보상금 지급을 마무리했는데, 이제는 일본도 전후 피해보상을 통해 한층 더 성숙된 모습을 보여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니냐고 일갈을 한다. 속이 시원하다. 한 교수의 말대로 빨리 강제징용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는 국내의 정치인들, 특히 국회의원들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마다않는다. 주말을 맞은 고위 공직자가 북한산 둘레길을 돌다가 이재오 의원 일행과 마주쳤던 이야기를 소개한다. 평소 안면이 있어 인사를 하고 악수를 나눈 뒤 길옆으로 비켜선 것까지는 좋았는데 뒤따라오는 일행이 끝이 없었다고 한다. 한 200명이나 됐을까. 그 사람들이 모두 지나갈 때까지 그렇게 기다리던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던지 모르겠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말한다.

인간은 본래 권력 지향적이다. 그래서 권력을 쥔 사람에게 매달리고 그 앞에서 아부를 떤다. 온갖 향응과 접대를 해주며 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얻어내려 한다. 국회의원이 된 분들은 그런 것에 얽매이지 말고 본연의 자세로 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4년 후에 다시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다시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선량, 국민을 먼저 생각하라)

고위 공직자의 경우에도 이런 정도라고 한다. 온갖 향응과 접대, 거기에 익숙해지면 권력은 썩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4년 후에는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가 없게 되니까 스스로 자숙하라는 일침이다.

이어서 그는 ‘레임 덕’이란 글에서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들의 경우에도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등 역대 대통령들이 하나같이 레임 덕 현상에서 허덕였음을 말하면서 공자의 ‘불환인지불기지 환부지인야(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곧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보지 못함을 걱정하라는 말을 인용하여, 남을 탓하기보다는 자기반성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공자의 말은 그의 다른 글에서도 종종 나온다. ‘인(仁)에서 해법을 찾다’라는 글을 보자.

논어에서 공자는 우선 ‘눈이 녹으면 무엇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물이 된다’라고 답하지 말고, ‘봄이 온다’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큰 흐름을 조망해 보면 우리 사회가 ‘몸의 시대’에서 ‘마음의 시대’로 넘어가는 변곡점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인(仁)에서 해법을 찾다)

그러면서 미국의 한 대형병원에서 실시했던 실험을 인용한다. ‘환자의 간호에는 누가 가장 좋은가’ 하는 문제인데, 가족의 경우도, 전문 간병인의 경우도 아니었다고 했다. 그것은 뜻밖에도 개 한 마리와 함께 있는 경우가 가장 효과적이었다는 것이다. 가족이나 친구가 있는 것도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요인이라는 말이다. 마음이 편한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오늘날 글로벌 경제위기의 근본적 이유이기도 하다고 경제의 문제까지도 마음에서 해법을 찾아야 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말한다.

GDP의 결함은 경제성장률에 집착한 나머지 삶의 질을 높이는데 소홀해 질 수밖에 없다는 비판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를 대표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책임진다는 자세로 살고, 불평을 하지 말고, 도전적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당신은 행복하십니까)

‘빨리빨리’에 덧보태야 하는 것은?

한 교수는 근래에 우리 민족의 특성으로 굳어졌다고들 말하는 ‘빨리빨리’도 심리적 연유가 있는 일이요, 그것도 경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원유가 많이 생산되는 국가는 원유와 관련된 산업이 발전한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 등이 그 같은 예일 것이다. 이와는 달리 부존자원이 거의 없는 한국은 부존자원을 중시하는 패러다임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국가다. 우리들은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했고, 더 빨리 발전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끊임없이 혁신을 추구해 왔다.(-‘빨리빨리’ 경제학)

그 구체적인 예로 동대문 의류상들을 들었다. 의류 관련 업체들이 반경 1km 내에 집중해 있어서 기획부터 생산, 판매까지 함께 해결할 수 있는 기업 군(群)을 만들어 그 유통망을 다른 어느 곳보다 빠르게 할 수 있었던 것으로 세계최대 패션시장으로 성장했다고 하였다. 한마디로 스피드로 일어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덧붙인다.

너무 스피드만 강조한 나머지 정확성을 등한시하면 사고가 일어난다.(-‘빨리빨리’ 경제학)

그러니까 ‘빨리빨리+정확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빨리빨리’는 자칫 ‘졸속’으로 떨어질 우려가 깊다. 졸속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서 만든 물건은 ‘조잡’한 것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해서 결정한 의견은 ‘오류 투성이’나 ‘허점 덩어리’일 수가 있고, 그렇게 해서 얻은 결과는 “부실” 그 자체가 되어 버릴 수도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스피드, 그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한국은 스피드 스케이팅의 강자가 아니던가? 기자로서의 안목이 이런 데에서 아주 잘 드러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가 하면 그는 ‘비효율적인 관행의 덫’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하였다.

제정러시아 때 페테브스부르크 겨울 궁전 잔디밭 한가운데에는 항상 경비병 둘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무려 200년 간이나 이 관행은 이어졌다.…산책을 하던 여제가 아름다우니 꽃을 보호하라며 경비를 서게 한 것이란다.…여제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려면 꽃이 시든 후에도 그 자리에서 계속 경비를 서는 것이 아니라, 잔디밭 가운데 조그만 화단을 가꿔야 했을지도 모른다.…우리는 가끔 일관성의 덫에 빠지기 쉽다.(-비효율적 관행의 덫)

비합리적 관행처럼 되어 있는 일관성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겨울 궁전의 잔디밭 한가운데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경비병처럼 쓸모없는 데에 값진 시간을 허송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당신은 폭도가 아닙니다

신문기자라면 한 시대의 증인이 되어야 함은 천번 만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한 교수도 그랬다. 5·18을 두고 그는 말한다. ‘당신은 폭도가 아닙니다’라고.

광주 사람들은 그렇게 살았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그저 밥이나 먹고, 아무 말도 못하고, 어떤 제스처도 쓰지 못하고 그냥 죽은 사람처럼 살았다. 그러나 그것은 되살아나 다시 원점을 찾고 있다. 이제야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5·18 사건이 있던 그 해, 바로 그 전날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사건을 담당한 판사까지 ‘폭도’라는 말을 이제는 쓰지 말라고 당부하지 않았던가.

본인도 그때 신문사에 있었기 때문에 제작거부에 참여했었다. 한 사람의 과욕이 얼마나 많은 시민들에게 비극을 주는지 생각해 봐야 할 때다. (-당신은 폭도가 아닙니다)

그는 도가니 사건에 대해서도 그 사건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면서 우리는 피해학생들이 건강한 사회인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한다. 다 함께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조화로운 세계를 꿈꾸는 것이다.

영화 한 편이 가져다 준 엄청난 사건, 그 사건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지금 전국 어디에선가는 제2, 3의 인화학교 사건이 일어나고 있을는지 모른다. 힘없고 몸이 어딘가 부족한 어린 소녀들에 대한 성폭력 사건, 그것은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치졸한 치부일지 모른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피해학생들이 건강한 사회인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부모의 마음 같은 지원을 보내는 일일 것이다.(-도가니 사건이 남긴 것)

그는 ‘싸이의 막춤’에 대해서도 ‘이 시대에 자칫 잃어버릴 수 있는 권위주의를 탈피’하여 일시적인 ‘유행과는 달리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는 게 특성’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그러면서 이제 국가와 국민이 힘을 합쳐 ‘혁신’을 만들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AA-그룹에 맞게 국민의 수준을 높이고 경제를 운용해야 합니다. ‘경제 원조를 받은 나라’에서 지금은 ‘경제 원조를 주는 나라’라고 자평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우리도 혁신기술을 국민들에게 제공해 줘 국격에 맞는 일을 벌여야 될 때입니다. (-싸이와 혁신기술)

‘아니 벌써 술시(戌時)잖아?’에 나오는 글들은 한 마디로 재미가 있었고, ‘그때는 좋았지’에 나오는 글들은 매우 다양했으며, 글 하나하나가 매우 개성적이고 참신했다. 그리고 ‘데스크의 눈’에 실린 글들은 가치 판단을 위한 객관적 입장이나 비판적 안목이 두드러져 있어서 읽는 사람이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글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 글을 많이 써줄 것을 기대한다.

                                             분당(盆唐)의 광거재(廣居齋)에서 이웅재(李雄宰) 근지(謹識) (2014.1.26. 140매)

                 

한경석 교수의 수필을 읽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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