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인물열전

경북 인물열전 (75)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던 영남학파의 종조 김종직(金宗直)

거북이3 2014. 7. 8. 12:04

 

경북 인물열전 (75)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던 영남학파의 종조 김종직(金宗直).hwp

경북 인물열전 (75)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던 영남학파의 종조 김종직(金宗直)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9. 慶尙道 善山[(龜尾로 통합)都護府 人物 條]

                                                                                                                                                    이 웅 재

김종직(金宗直, 1431년~1492년)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며 문신이다. 본관은 선산(善山, 자(字)는 계온(季昷), 효관(孝盥)이며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경남 밀양 출생이다. 아버지는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내고 증 호조판서를 제수받은 김숙자(金叔滋)이며, 어머니 밀양 박씨(密陽朴氏) 사재감정(司宰監正) 박홍신(朴弘信)의 딸 사이의 3남 2녀 중 막내이다. 김종직의 가문은 고려 말 선산의 토성(土姓) 이족(吏族: 鄕吏層)에서 사족(士族: 鄕班)으로 성장하였으며, 아버지 대에 이르러 박홍신 가문과 혼인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중앙관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길재(吉再)의 제자로,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운 김종직은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등의 학문을 계승하여, 조선조 도학의 학풍을 굳게 세운 영남학파의 종조(宗祖)이다.

그는 여섯 살 때부터 부친으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사서오경을 거쳐 『통감(通鑑)』을 비롯한 역사서와 백가의 서를 배웠다. 16세 때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는데, 시관으로 참여하였던 대제학 김수온(金守溫)이 낙방한 시권을 나누어주다가 그의 글을 읽어보고는, “이는 뒷날 문형(文衡)을 잡을 솜씨인데 이렇게 높은 재주를 가진 인재가 낙방한 것이 애석하다.” 면서 세종에게 알리어, 세종은 그를 영산(靈山) 훈도(訓導)로 임명하였다. 

  1453년(단종 1) 진사에 급제하고 3년 후 부친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한 다음, 1459년(세조 5) 식년 문과에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그는 벼슬에 처음 나가면서부터 뛰어난 학식과 탁월한 시문으로 널리 촉망을 받았다. 승문원 박사로 지낼 때에는 선배였던 어세겸(魚世謙)이 그의 시를 보고 감탄하여 “나는 그의 말구종이 되어도 달갑게 여기겠다.” 하였다고 한다.

출사한 지 얼마 안 되어 33세 때 사헌부 감찰로서 세조의 뜻에 반하는 발언을 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 이후 한 동안 후진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다가, 35세 때 영남병마평사(嶺南兵馬評事)로 다시 기용되었고, 37세 때는 홍문관 수찬을 거쳐 교리, 응교, 이조 좌랑, 수찬 등의 관직을 거쳤다.

그러다가 모친의 상을 당하여 다시 3년 동안 시묘를 마친 다음, 52세 때 홍문관 응교, 동부승지, 우부승지, 도승지를 거쳐 예문관 제학에 올라『동국여지승람』을 편수하였다. 57세 때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1년 만에 병조참판, 한성부 좌윤, 공조 참판, 형조 판서 등에 제수되었다.

성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신의 문인들을 관직에 많이 등용시켜서 훈구파(勳舊派)와의 반목과 대립이 심하였다. 그 때문에 59세 때 병으로 사직을 청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후진들을 가르치다가 62세를 일기로 성종 23년(1492) 타계하였다.

그가 죽자, 조정에서는 문충공(文忠公)의 시호를 내렸다. 그런데 유자광(柳子光)을 비롯한 일부 대신들의 이의로 이듬해 문간(文簡)으로 바뀌어졌다가 200년 후에야 다시 문충(文忠)으로 복원되었다.  

  훈구파와의 대립은 결국 1498년(연산군4),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제자인 김일손(金馹孫)이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까탈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항우가 초(楚)나라 회왕(懷王:義帝)을 죽인 것에 빗대어, 세조가 단종을 축출한 것을 비난하였다고 몰아세운 것이다. 이는 유자광(柳子光), 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내세운 명분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당하였고, 김일손 ·권오복(權五福) 등 문하생 33명이 참혹한 화를 입었으며, 그의 많은 문집이 소각되었으나 생질 강중진(康仲珍)이 화를 당하면서까지 10여 권의 책을 숨겨두어 오늘에 전하여지고 있다. 중종(中宗)이 즉위하여서야 그 죄가 풀리고 숙종(肅宗)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해동잡록(海東雜錄)』에는 “김종직은 몸가짐이 단정 성실하고 학문이 정밀 심오하며 문장이 고고하여 당대 유종(儒宗)이 되었다.”고 하였다. 남효온의 『추강냉화(秋江冷話)』에는 “점필재 선생이 상주 노릇을 하는 3년 동안 조석 상식에 곡을 할 때면 지나가는 사람이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지방관을 맡으면서 가는 고을마다 향사례(鄕射禮)와 향음례(鄕飮禮) 등의 의식을 정기적으로 시행하면서, 이런 의식을 통하여 어른을 공경하고 덕성을 존중하는 예절의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 구미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開寧)의 덕림서원(德林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점필재집(佔畢齋集)』, 저서에 『유두유록(流頭遊錄)』,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고, 편저로 『동문수(東文粹)』, 『일선지(一善誌)』, 『이준록(彛尊錄)』 등이 있다.

2001년 함양 상림숲의『함양을 빛낸 사람들』역사인물공원에 흉상이 건립되어 있다.

                                                                                                                                       (2014.7.8. 원고지 16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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