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이사(移徙)
이 웅 재
사람들은 평생 자기가 살 집은 세 번 정도 지어 보아야 한다고들 말한다. 이는 바로 ‘삼세번’이라는 말에 이끌린 때문일 것이다. ‘3’이라는 숫자는 그만큼 완전함을 뜻하는 숫자라고 하겠다. 세 번 집을 짓는다는 것은 최소 세 번은 이사를 가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여태껏 한 번밖에 집을 지어보지 못했다. 물론 내가 직접 노동을 하여 짓는 집짓기는 아니었다. 단지 건축주였을 뿐이다. 그러니까 집 짓는 일을 전체적으로 감독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아니, 그때 나는 직장엘 다니고 있었으니까 그 전체적인 감독이라는 것도 순전히 아내의 몫이었다. 그런데도 힘들었다.
건축 현장에는 ‘야방’이라는 것이 있다.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인 야간에 건축 자재들을 도둑맞지 않게 하기 위한 야간 경비를 맡는 사람이다. 야방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끔 그들은 시멘트나 철근 따위로 막걸리와 바꾸어 먹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그 야방을 해고하면, 다음에는 정말로 큰 도둑을 맞고야 말게 된다. 그래서 깨달았다. 작은 도둑을 세워 큰 도둑을 막는 일, 그것이 야방의 임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가 하면 쌓은 담이 약간 휘어진 듯해서 마음에 맞지를 않는다. 아무리 바르게 쌓아달라고 부탁을 해도 인부들은 콧방귀 하나 뀌지 않는다. 그럴 때에는 그들이 다 퇴근한 후에 슬쩍 밀어서 허물어버리는 것이 상수였다. 아마도 주인이 그랬을 것이라고 심증을 가질 수는 있지만, 어차피 다시 쌓아야 할 것이면 주인이 요구했던 대로 쌓아주는 것이 서로 간에 편한 일이라는 것을 그들은 체험으로서 알고 있는 듯했다. 사실은 그렇게 하는 것보다도 더욱 효과적인 것은 도목수(都木手)에게 부탁하는 일일 것이다. 목수 중에서도 우두머리 목수가 도목수이다. 인력시장에서 그날 일할 인부들을 지명하여 불러오는 일, 일감을 배분해 주는 일 등 인부들의 전반적인 관리를 하는 사람이 도목수이기에 도목수의 말을 거역하는 인부들은 거의 없다.
며칠 전이었다. 성남시 평생교육원 성인 문해(成人文解) 시화전 심사가 있어서 가 보았더니, 절반 정도를 탈락시키고 1차 선정된 작품들이 73편이 있었다. 작품들의 내용은 그림도 작문도 천생 유치원생이나 초등학교 1~2학년생들의 그것이었다. 문해(文解) 교육이란 한글을 깨우치기 위한 교육이다. 요즈음에는 비문해자[文盲者]가 별로 없을 것이라 여겼었는데, 예상 이외로 많아서 처음에 조금 놀랐다. 그러나 응모자의 신분을 개략이나마 알고 나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었다. 응모자들은 대체로 70~90대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들, 그리고 조선족이거나 중국인들이었다. 한국에 나와 있는 조선족이나 중국인들, 그들에게는 한글을 깨우쳐야 하는 일이 아주 절박한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런 점을 생각하니 작품 수준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판단이 섰다. 출품자들의 지역 분포를 보니 더욱 그랬다. 조선족이거나 중국인들이 많이 살지 않는 지역에서는 출품작들이 별로 많지 않았던 것이다.
작품들은 패널(panel)에다가 사인펜 등으로 글씨를 썼고, 거기에 나름대로의 그림을 그려 넣은 것들이었다. 어떤 작품은 상당한 수준의 문예적 표현도 있었지만, 나는 그런 것들보다는 자신들 삶의 곤고함이라든가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이 묻어나는 작품들에 애착이 갔다. ‘이사’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었다. 집짓기와는 조금 다르겠지만, 집을 옮기는 일이기에 관심이 갔다. 그 작품은 한마디로 띄어쓰기나 맞춤법 등을 잣대로 들이댄다면 전혀 관심 밖의 글일 수밖에 없는 글이었다.
내는 지금까장 24번에 이사를 댕겼다. 인제부텀두 이사를 댕길 거인자난 몰겠지망 이젠 나이도 만코 해여 거정이다. 아프루는 더 이사를 댕길 일은 목할 거 가트다. 심도 엣날처럼 목쓸 거 가트구, 눈도 잘 안 볼 수 잇다. 이사 인젠 고망 댕기구프다. 심들다. 다리 아프구 허리마정 깨갱깡이다. 전철 타는 거두 목할 거 가트이 우찌 이사가튼 일을 하당 말가.
한마디로 신세타령이었다. 받침에서의 ‘ㅅ’은 거의 ‘ㄱ’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하지만 가식이 전혀 없었다. 그저 순수한 마음을 그대로 옮겨놓은 글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글이었다. 24번이나 이사를 했다니 놀라웠다. 1970년대인가, 그때는 이사를 많이 다녀야지만 재산이 늘어났다. 하루가 다르게 집값이 뛰고 있었던 것이다. 돈푼깨나 만진다고 큰소리치는 사람 쳐 놓고 자주 이사 다니지 않은 사람이 없던 때였다.
대한민국의 헌법에서는 거주이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사는 가고 싶으면 언제라고 갈 수가 있었다. 그런 판국에 이사 한 번 가면 뭉칫돈이 생기는데 이사를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을 것이랴! 할아버지인 듯싶은 글쓴이는 24번이나 이사를 다녔다고 했다. 그러니 엄청 부자가 되어 있었어야 할 사람인데, 글 내용을 보면 전혀 아니었다. 이사를 많이 다닌다고 다 같은 이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사도 이사 나름, 살던 집을 팔고 다시 새 집을 사고, 또 팔고 또 사고…이렇게 ‘팔고 사고’를 계속하여야 돈이 불어나는 것이지, 내 집도 아닌 남의 집에 사글세나 전세를 사는 사람들이야 골백번 이사한들 동전 나부랭이 하나 불어날 리가 없었다. 불어나기는커녕 적지 않게 드는 이사 비용은 물론이고, 젖 먹던 힘까지 쏟아 부어야 함은 물론이요, 그럭저럭 정을 붙여 살만해지면 다시 생뚱한 곳으로 생활 근거지를 옮겨야 했으니, 얼마나 힘이 들고 안타까웠으랴! 그러니까 돈을 버는 사람들의 이사는 제가 좋아서 스스로 선택하여 하는 자의적인 이사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이사는 완전히 타의적인 것, 정말로 가기가 싫은 이사인 것이다. 그러한 이사를 24번이나 하셨다는 할아버지, 이제는 제발 그런 이사는 하시지 않으셔도 되기를 바란다. (14.11.6. 15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