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첫 번째 죽을 고비를 넘길 때의 추억

거북이3 2014. 12. 9.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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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죽을 고비를 넘길 때의 추억

                                                                                                                                                이 웅 재

 

  사람은 평생 3번 죽을 고비를 넘긴다고 한다. 우리네 세상살이에는 굴곡이 많다는 뜻일 게다. 그래서 우리의 할머니들은 말씀하셨다. ‘내가 살아온 얘기를 쓴다면 책 열 권도 넘을 게다.’라고. 나에게도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몇 번의 죽을 고비가 있었다. 지나간 죽을 고비를 생각해 보는 것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 것인가를 위해서 필요한 일은 아닐까 싶어 한번 되짚어 보고자 한다.

  첫 번째 죽을 고비는 내가 네댓 살 정도 되었을 때였다. 장소는 강원도 철원 재송(裁松)마을이었다. 지금의 철새도래지인 샘통[泉通] 북쪽 10여 리쯤 되는 곳이다. 그 마을에는 북쪽으로 큰 강이 하나 흘렀고 그 강의 지류가 마을의 한가운데를 가르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강은 T자 형으로 흐르면서 마을의 동서를 2등분한 셈이고, 다리 하나가 동서를 이어주는 연결 통로였다. 다리에는 쇠로 된 난간이 설치되어 있어서 마을의 8~10세쯤 되는 개구쟁이들은 그 난간을 철봉대로 삼아서 넘어갔다 넘어왔다 하면서 장난질을 치는 때가 적지 않았다. 술래잡기 따위를 할 때에는 난간 바깥쪽으로 넘어가 몸을 숨기기도 했는데, 나는 그것이 무척이나 재미있어 보였다. 하지만 내 또래의 아이들은 별로 없어서 그 재미난 철봉을 할 수 없는 것이 늘 불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마도 장마가 잠깐 그친 날이었다고 기억된다. 나는 어쩌다 형과 함께 그 다리 위로 놀러 나가게 되었다. 주위에 다른 아이들이 없어서 이때야말로 철봉 넘기를 한번 시도해 볼 때라고 여기면서 난간을 잡고 훌러덩 넘어 보았다. 그건 생각보다는 쉬운 일이었다. 그렇게 쉬운 걸 이제야 해 보았다니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당연히 그때에는 미처 ‘만시지탄’이라는 적절한 어휘는 모르고 있을 때였다)을 하면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그 ‘쾌재’는 오래가질 못했다. 다리[橋] 밖으로 넘어간 다리[脚]가 허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된 까닭이었다. 다시 되넘어 와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미리 익히지 못했었던 것이 문제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매달리고 있던 팔의 힘이 점점 빠지자 나는 시나브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형, 형!’ 하고 불러 보았지만, 그때 형은 무엇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는지, 나와는 정반대 쪽을 바라보면서 전혀 반응이 없었다.

  시간은 사정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에 비례하여 팔의 힘이 점차 약화되면서 나는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엄마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수많은 별들이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엄마의 얼굴이 그 별들 사이에서 보이다 말다 보이다 말다 했다. 되넘어올 방법도 모른 채 철봉놀이를 한 게 후회되었다. 그런다고 넘어가기 전의 원상태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은 나 자신의 무모함 때문이라는 것을 어슴푸레하게나마 느끼기 시작하면서, 나는 드디어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생각은 또렷해지지만 도리가 없었다. 다시는 이와 같은 무모한 철봉놀이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맹세하고 또 맹세하였으나, 내 인생을 찾아온 첫 번째 ‘포기’라는 손님은 계속 나를 윽박지르고 있었다. 놓아라, 그만 놓아 버려라. 속으로는 ‘안 돼, 안 돼!’를 외치고 있었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계속 ‘포기해, 포기해!’라고 나를 종용하는 것이었다.

  나는 결정해야 했다. 아니, 결정이 강요되었다. ‘그만 놓아 버려라!’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었다. 내 맥 빠진 두 팔은 스르르 풀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 몸은 허공중에 자유스러운 존재로 바뀌기 시작했다. 밑으로 떨어지는 시간은 그리 길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나에게는 무척이나 길고긴 시간이었다. 떨어지면서 본 광경들, 나는 지금까지도 그것을 잊지 못한다. 누군가가 저쪽에서 내가 있는 다리 쪽으로 급히 뛰어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것이 당시 나의 마지막 기억이다.

  나중에 알게 된 전말은 이렇다. 그때 내 쪽으로 뛰어오던 사람은 내 외삼촌이었단다. 해군이었다고 했다. 휴가를 받아 우리 집에 다니러 오다가 천만다행으로 내가 난간에서 떨어지는 순간을 목격했었더란다. 외삼촌은 옷을 벗을 겨를도 없이 물로 뛰어들어 나를 건져내었다고 했다. 다행이었던 점은 그 다리에는 세 개인가의 물문[水門]이 있었는데 당시 장마 가 잠깐 개었던 때인지라 그 중 한 개의 수문을 열어놓은 상태였고, 운 좋게도 나는 그 열어놓은 물문 쪽에 떨어지는 바람에 비교적 쉽게 건져 낼 수 있었다고 한다. 열어놓지 않은 물문 쪽은 물이 빙글빙글 돌고 있어서 쉽게 건져 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들 하였다. 게다가 그 아래쪽으로 몇 십 m만 더 가면 또 다른 물문이 있어서 거기에 걸리게 되면 내 몸은 그만 산산조각으로 바스라지고 말았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사건 이후 내게는 한두 가지의 변화가 생겼다. 그중 하나는 바로 사건 발단의 원인이 된 철봉 등 ‘운동’의 ‘운’ 자도 가까이 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중학교 때 하기 싫은 축구를 하다가 상대방의 발에 차여서 발목에 났던 대장 사마귀가 뿌리째 뽑혀 버렸던 일, 그래서 여기저기 나 있던 사마귀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몽땅 없어져 버렸던 일과, 최근에 거의 매일 하는 1시간 정도의 ‘탄천 산책’ 말고는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무사히 구조됨으로써 일단락이 된 사건의 결과라고 할 ‘물’과의 친연성은 오히려 가까워졌다는 사실이다. 그 이후 나는 틈만 나면 그 강에 나가서 수영의 기본조차 무시한 ‘개헤엄’으로 좌충우돌, 지금도 웬만해서는 물에 빠져 죽는 일과 같은 사단은 벌어지지 않게 되었다. 그 당시의 사건이 벌어졌던 증거로는 지금도 내 턱 약간 안쪽으로 물에 떨어지면서 무엇인가에 부딪혔던 흉터 하나가 무슨 훈장처럼 남아 있다. (2014.12.9. 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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