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77 )26세의 젊은 나이에 효수(梟首)당한 천재 시인 박은(朴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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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인물열전 (77)
26세의 젊은 나이에 효수(梟首)당한 천재 시인 박은(朴誾)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9. 慶尙道 高靈縣 人物 條]
이 웅 재
박은(朴誾, 1479년~1504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시인이다. 본관은 고령(高嶺). 자는 중열(仲說), 호는 읍취헌(挹翠軒). 읍취헌은 그가 서울 남산 기슭 장흥동(長興庫가 있어서 붙은 이름으로 지금 會賢洞 부근이다)에 살았을 때 지은 당호(堂號)이다. 할아버지는 교하현감(交河縣監)을 지낸 박수림(朴秀林)이고, 아버지는 한성부판관 박담손(朴聃孫)이며, 어머니는 제용감직장(濟用監直長)을 지낸 경주 이씨(慶州李氏) 이이(李苡)의 딸이다.
박은은 어려서부터 범상하지 않았으며, 정신과 골격이 맑고 눈썹과 눈이 그림처럼 아름다워 속세에 사는 사람 같지 않았다고 한다. 4세 때에 능히 독서할 줄 알았고, 8세 때에는 문장의 대의(大義)를 깨치었으며, 15세(1493년: 성종 24)에 이르러서는 문장에 능통하였다. 최부(崔溥:1454~1504)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당시 대제학이었던 고령 신씨(高靈申氏) 신숙주(申叔舟)의 손자인 신용개(申用漑)가 이를 기특하게 여겨 사위로 삼았다.
그는 1495년(연산군 1) 17세로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같은 해 사가독서자(賜暇讀書者) 선발에 뽑혔으며, 그 뒤 곧 승문원(承文院) 권지(權知: 임시직)를 받고 홍문관에 선택되어 정자(正字)가 되고, 수찬(修撰)에 있으면서 경연관(經筵官)을 지냈다. 평소부터 성품이 곧아 부정을 보면 참지 못하고 바른 말을 잘하여 연산군의 눈 밖에 나게 되었는데, 더욱이 그는 1498년(연산군 4) 20세의 약관으로 연산군의 비호를 받던 유자광(柳子光)의 간사함과 성준(成俊)이 그러한 유자광에게 아첨함을 탄하는 소(訴)를 올려 오히려 그들의 모함을 받게 되었다. 평소 직언을 꺼리던 연산군은 그를 ‘사사부실(詐似不實)’이라는 죄목으로 파직시켜 버렸다. 박은이 그렇게 1501년(연산군 7) 23세에 파직되어 옥에 갇히게 되자, 분가(分家)하여 살고 있던 그의 가정은 정신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불안정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그는 스스로 세속 사람에게 용납되기 힘들 것이라 여기고 자연에 묻혀 밤낮으로 술과 시로써 세월을 보내며 집안 형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에 그의 아내는 힘을 다해 가사를 꾸려 나갈 비용을 마련해 나갈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려고 애썼으며 혹시라도 뜻을 어기는 일이 있을까 걱정하였다.
1503년(연산군 9)에 어려운 가정을 힘겹게 꾸려나가던 아내 신씨가 2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 이듬해에 다시 지제교(知製敎)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갈 뜻이 없었다. 그 1년 후,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4월에 동래(東萊)로 유배되었다가 6월에 다시 의금부에 투옥, 6월에 효수(梟首)되었으며 재산도 함께 몰수당하였다. 이유는 예전에 연산군이 밤늦게 사냥한 일을 여러 신하와 연명 상소한 일의 주동자였다는 것이었고, 죄명은 ‘사충자안 신진모장관(詐忠自安 新進侮長官: 거짓 충성으로 제 안일을 구하고 신진이 상관을 업신여김)’이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게 된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세 번 크게 웃었다고 한다.
이때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연산군은 박은을 너무나 미워하여 그가 죽은 지 4일 후에는 의금부로 하여금 박은의 친구들을 색출하여 장형(杖刑)과 함께 유배를 보냈으며, 8월에는 박은의 시체를 들판에 내버려 두게 한 다음, 봉분 없이 묻어버리게 하였고, 1505년에는 ‘음사해인(陰邪害人)’이라는 죄목까지 추가하였다.
3년 뒤인 1507년(중종 2) 신원(伸寃)되고 도승지(都承旨)로 추증되었다. 박은은 중국 강서파의 시풍을 수용하여 일가를 이루어서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의 대표적 시인으로 불리었는데, 절친한 친구인 이행(李荇)이 그의 시를 모아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를 냈다. 여기에 실린 시는 주로 파직된 23세부터 아내가 죽기 전까지의 것으로, 주로 현실세계의 온갖 고뇌로부터 벗어나 정신적 안정을 추구하려는 노력과 주변인물의 죽음을 통한 인생무상을 노래한 것들이다. 남편이 아내의 행장을 쓰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인데,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 속에는 아내를 위해 쓴 「망실고령신씨행장(亡室高靈申氏行狀)」이 들어있다.
박은은 어려서부터 천부적인 시재(詩才)로 일찍이 중국 사람들에게까지도 널리 알려졌고, 허균(許筠)·신위(申緯)·김만중(金萬重)·홍만종(洪萬宗) 등 여러 대가들로부터 우리나라 제일의 시인으로 추앙받기도 하였다. 남곤(南袞)은 일찍이, “박은의 시와 김일손(金馹孫)의 문장은 국조(國朝) 이래로 견줄 만한 이가 드물다.”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은 일종의 백과사전인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라는 책(60책 60권)에서 우리나라 역대 인물 중 제일가는 인재를 뽑아 기록한 대목 중, 시에 있어서는 단연 박은을 꼽았으며, 특히 정조대왕은 그의 시를 격찬하여 친히 서문까지 내려 중간(重刊)토록 하였다. 동문선에 실려 있는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 시작(詩作) 활동을 한 기간을 기준으로 한다면 가장 많은 작품이 실려 있는 사람이 박은이라고 한다. 세인들은 연산조의 문장4걸로 이행(李荇), 홍언충(洪彦忠), 정희량(鄭希亮)과 함께 박은(朴誾)을 들고 있다.
묘소는 용인시 처인구(處仁區) 양지면(陽智面) 식금리(植金里)에 있는데, 배위 고령 신씨와의 합장묘이다. 고령군(高靈郡) 쌍림면(雙林面) 평지리(平地里)에는 조선 숙종 당시 어사 박문수(朴文秀)가 박은을 포함한 고령박씨 조상을 위해 세운 만남재(萬南齋)가 있다. (15.2.27. 16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