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인물열전

경북 인물열전 (82) 조선 개국 시 도승지로 왕명 출납을 엄격히 했던 안경공(安景恭)

거북이3 2015. 10. 11. 21:22

 

 

경북 인물열전 (82)

 

 

     조선 개국 시 도승지로 왕명 출납을 엄격히 했던 안경공(安景恭)

                                                                                             [大東野乘 第19卷 海東雜錄 1 安景恭 條]

                                                                                                                                                         이 웅 재

  안경공(安景恭: 1347년[충목왕 3]~1421년[세종 3])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흥령(興寧: 榮州 順興), 자는 손보(遜甫)다. 할아버지는 충목왕 때 찬성사를 지낸 근재(謹齋) 안축(安軸)이고, 조선 건국에 참여해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오른 아버지 안종원(安宗源)과 우상시(右常侍)를 지낸 광산 김씨 김휘남(金輝南)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 4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부인은 오천 (烏川>延日>迎日) 정씨(鄭氏)로서 문정공(文貞公) 정사도(鄭思道)의 딸이다. 아들은 안순(安純) 한 명뿐이다. 군호는 흥녕군(興寧君), 시호는 양도(良度)이다.

  1365년(공민왕 14)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하고 산원(散員: 別將의 보조관)·낭장(郎將) 겸 사헌규정(司憲糾正)을 지내었고, 1376년(우왕 2)에는 의영고부사(義盈庫副使: 의영고는 궁중에서 사용하는 기름‧꿀‧후추‧과일 등을 관리하던 관청)로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계속해서 사헌지평(司憲持平)·예의정랑(禮儀正郎) 등을 역임했다. 1382년에는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로 있으면서 합주(陜州: 현재 경상남도 합천)에서 사노(私奴)들이 일으킨 난을 진압하였다.

  삼사좌사(三司左使) 등을 거쳐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는데, 죄인을 불쌍히 여겨 가볍게 판결한 것이 많았으며, 황주 목사(黃州牧使)로 나가서는 백성을 자식처럼 대하며 은혜를 베풀었다.

  1390년(공양왕 2) 정몽주(鄭夢周)가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사(獄事)에 연루된 사람들을 두둔했다고 해 탄핵하였다가 오히려 좌천되었다. 이듬해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이 되고, 1392년 좌부대언(左副代言)을 거쳐 좌대언(左代言)에 올랐다.

  그 해에 조선건국에 참여하여 개국3등공신에 책록되고 도승지에 제수되었는데, 이때는 개국한 초창기라서 아직 새로운 제도가 마련되지 못하여 나라가 무질서한 어려운 때라 그가 핵심적인 지위에서 밝고 성실하게 왕명의 출납(出納)을 엄격하면서도 분명하게 시행하는 한편, 뛰어난 계책과 은밀한 논의로 나라에 크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듬해에는 사헌부 대사헌 겸 도평의사사 보문각학사(都評議使司寶文閣學士)에 올랐는데, 사헌부에 있을 적에는 풍채(風采)를 엄숙(嚴肅)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도(正道)를 지키면서 굽히지 않았다. 같은 해에 전라도관찰출척사(全羅道觀察黜陟使)로 나아갔으며, 1394년 부친상을 당하였고, 복상을 마치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고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다.

  1406년(태종 6) 곧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를 거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옮겨 약 4개월 동안 수도행정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고, 1408년에는 모친상을 당했는데, 상장(喪葬)의 예에서 정성과 효도를 극진히 하니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우러러보았다. 1410년에는 판개성부사가 되었다. 이듬해에 정탁(鄭擢) 등 개국 공신들과 더불어 1398년(태조 7)의 왕자의 난 때 주살된 정도전(鄭道傳)과 남은(南誾)의 죄를 감해 주도록 요청했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1416년 보국숭록대부 집현전대제학(輔國崇祿大夫集賢殿大提學)에 특별 임명되고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으로 봉작되었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국역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는 윤회(尹淮)가 지은 그의 묘지명이 있는데 그 일부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공은 벼슬길에 오르고부터 언제나 나라 일을 걱정하며 여러 사무를 합당하게 처리하였고, 대신(大臣)이 되고서는 법도를 따르며 장중(莊重)하여 조정의 귀감이 되었다. 공이 일찍이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와 전라도ㆍ황해도의 관찰사(觀察使)가 되었을 때는 풍교(風敎)를 이어받아 선정(善政)을 베풀면서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보살피어 너그럽고 간소하게 하며 까다롭지 않게 하였으므로 고을이 잘 다스려졌다. 신축년(辛丑年, 1421년 세종 3년) 정월 10일에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나니, 나이 75세였다. 공이 병에 걸렸을 때 태종과 우리 전하(殿下, 세종)가 급히 국의(國醫)를 보내어 치료케 하고 중사(中使)를 보내어 병을 보살피게 하였는데,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양궁(兩宮, 태종과 세종)이 애도하며 조제(弔祭)를 후하게 하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크게 장사지내게 하였으며, 시호(諡號)를 양도(良度)라 하였다. 2월 27일 경신(庚申)에 금천(衿川:시흥) 백사동(栢司洞)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마음가짐이 정직(正直)하고 신실(信實)하며 기거 동작(起居動作)을 삼가고 신중하게 하여 일찍이 권세(權勢)를 좇아 부침(浮沈)하지 않았고, 특별한 체하여 겉으로 드러내려고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과 사귀고 일을 처리하는 데 성심(誠心)으로 하고 허위(虛僞)가 없었으며, 마음속으로만 옳고 그름을 결정짓지 밖으로는 절대로 남의 장단점을 말하는 법이 없었다. 겸양(謙讓)하여도 빛나는 덕(德)은 벼슬이 높을수록 더욱 드러났으며, 평소에 전아(典雅)하여 화려함은 싫어하였고 검약(儉約)함을 힘써 좇았다. 만년(晩年)에는 한가롭게 지내며 때를 가려서 외출하였고, 손님이 찾아오면 꼭 술자리를 베풀되 오직 즐겁게 흡족함만 취하였고 호사(豪奢)함은 숭상치 않았으며, 흉금(胸襟)은 담박(澹泊)하여 남과 더불어 다투지 않았다. 공의 형제 세 사람이 모두 성명(盛名)이 있었으나 자식이 없이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오직 공은 천록(天祿)을 누리면서 나라의 원로(元老)가 되었고, 자손이 번성하여 가문이 더욱 번창하였으니, 적선(積善)의 보답이 참으로 헛되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네이버 지식백과’에서) (2015.10.11. 15매)